•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2) 관인계층
  • (4) 문반·무반과 남반

(4) 문반·무반과 남반

 관인계층이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음서제도와 공음전제도가 각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요긴하였다. 이 둘에 미치지는 않았지만 과거제도와 한인전제도도 여기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 가운데 음서제와 공음전제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한인전제도 아예 관인층의 독점물이었다. 그런데 이 셋 가운데 음서제와 공음제는 5품 이상 관리에게 국한되었고, 한인전제는 6품 이하의 관리에게만 해당되었다. 이것은 5품 이상의 관리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특권적인 집단에 해당하였음을 말하여 준다.028)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朴龍雲은 5품 위에 貴族線을 설정하고 그 이하와 구분하여 그 이상의 관리들을 귀족으로 볼 것을 제의하였다. 또 그러한 관직상의 지위가 3세대 이상 지속되면 귀족가문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朴龍雲,<高麗家産官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檢討>,≪史叢≫21·22, 1977;≪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 1981, 311∼314쪽). 이것은 경청할 만한 의견이지만 官品을 가지고 어느 신분층의 지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차라리 그 출신 인물들이 오를 수 있는 관품상의 상한선이 어디인가에 주목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文班은 1품, 武班은 3품, 南班은 7품이 각기 그 상한선에 해당하는데, 그러한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차라리 그들 사이의 신분상 지위의 높고 낮음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관품이 규정하는 관직들이 따로 있어서 관직을 접어두고 관품만 가지고 기준을 삼는다는 것이 여전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5품 이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문반과 무반뿐이었다. 남반도 고려 초에는 4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대체로 문종대에는 7품에 상한선 이 그어져 고정되었다.029)曺佐鎬,<麗代南班考>(≪東國史學≫5, 1957).
李丙燾,<高麗 南班考>(≪論文集-人文社會科學篇-≫12, 서울大, 1966).
반면에 문반은 1품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무반은 3 품까지는 오를 수가 있었다.030)무반이라고 해서 2품의 벽을 허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어디까지나 武官이 文官職을 兼帶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고, 더욱이 武班의 신분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邊太燮,<高麗時代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湖閣, 1974, 294∼304쪽) 참조. 그러나 무반은 문반과 달리 3품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무양반의 관직은 3품까지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2품 이상의 관직은 문반직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2품 이상의 문반직은 흔히 宰臣이나 宰樞로 표현되었다. 재추는 재신과 추신의 합칭으로 이들을 宰相이라고도 하였다.031)邊太燮,<高麗宰相考-3省의 權力關係를 중심으로->(≪歷史學報≫35·36, 1967;위의 책, 58∼59쪽). 재상이야말로 최고급정책을 최후로 결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무반을 3품에 묶어두었다는 것은 결국 문반만이 재상이 되어 가장 중요한 정책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특권이 재상에게는 정치적인 특권에 해당하였다. 재상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반계층에게 사회적인 특권을 뜻하였다. 대대로 재상직에 나아갈 수 있는 사로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반신분계층에게 신분적인 특권을 의미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신분적 특권이 배타적·독점적이었다는 점에서 문반은 최고의 신분계층이었다. 무반은 그 다음의 지위에 있었다. 무반은 재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점이 문반과 무반의 신분상 지위의 차이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반은 문반과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을 나누는 유일한 신분층이었다. 교육의 기회에 있어서도 무반은 문반과 함께 국자감의 국자학에 입학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신분층이었다 이것은 과거시험에 있어서도 그들이 문반과 함께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남반은 처음에 4품까지 오를 수 있어서 무반과의 차이가 별로 없었지만, 문종대 이후 7품 이하에 한정됨으로써 문무양반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음서와 공음전의 혜택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식이 한인전을 받을 수 있었다. 자손에게 대물림되는 공음전과 비길 수는 없지만, 한인전의 혜택만으로도 그들이 신분상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남반은 국자감의 입학에 있어서 문·무반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사문학에는 입학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03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仁宗朝式目都監詳定學式의 조항에서 국자감의 四門學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文武官 7품 이상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雜學의 경우는「8품 이상(하)의 아들 및 庶人」이라고 하였다. 잡학에 서인도 입학이 허용되었으므로 그와 나란히 있는 8품 이하의 관리에는 南班이 포함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8품 이하의 관리는 四門學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서 文·武官을 뜻한다. 결국 남반은 文官 안에 포함시켜 표현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四門學의 경우에도 남반은 문관 안에 넣어서 따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무양반과는 구별되었지만, 그들은 일정한 사회적·신분적 혜택이 기대되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그 말단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누릴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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