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3) 향리
  • (1) 임무

(1) 임무

 신라말 지방에 산재하여 웅거하고 있던 호족들은 신라를 멸망으로 이끈 주역이었다. 고려가 건국된 뒤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중앙의 귀족이 되어 지배계층으로 발돋움하였다. 한편 그 일부는 각 지방에 그대로 남아 지방행정을 맡게 되었다. 고려 향리는 바로 이들 호족에 연원을 둔 것이다. 호족들이 지방의 유력자로서 지방행정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堂大等―大等을 중심으로 한 관직체계가 이들의 임무 수행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다가 광종 무렵부터 점차로 戶長 ― 副戶長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향리의 관직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대체로 성종 2년(983)에 지방에 중앙관이 파견되는 것에 짝하여 보다 체계화되고 또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036)성종 2년 戶長·副戶長 중심의 새로운 향리의 관직체계는 일찍이 주목되었다(金鍾國,<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朝鮮學報≫25, 1962, 88쪽 및 朴敬子,<高麗鄕吏制度의 成立>,≪歷史學報≫63, 1974, 70쪽 참조). 그런데 종래에는 성종 2년에 처음으로 호장·부호장 중심의 관직체계가 성립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러한 향리직체계가 慶州지역에서 광종대 무렵에 보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서 이의를 제기한 이도 있다(李純根,<高麗初 鄕吏制의 成立과 實施>,≪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83, 216∼218쪽). 새로이 정비되어 모습을 드러낸 향리의 관직체계를 표로 만들면 아래와 같다.037)朴敬子, 위의 글, 73쪽의 주 31)에 있는 표를 전재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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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정되기 이전에 있었던 직책의 이름은 대부분이 신라시대 중앙의 고급 관료들이 지니고 있던 직명이었다.038)金鍾國, 앞의 글, 87쪽. 그러한 것들을 호장·부호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직책명으로 바꾼 것은 지방행정의 담당자들에게 남아 있는 독립적·독자적 색채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중앙집권체제의 틀 속에 편입시키고자 한 국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이제 호족으로서의 풍모를 떨쳐버리고 鄕吏로 서의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무한정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그렇게까지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들의 협조가 없이는 중앙의 지방지배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 고려 전기의 사정이었다. 外官이 파견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지방행정의 단위가 더 많았다. 뿐만 아니라 외관이 있다고 하여도 짧은 임기에 관할하여야 할 지역은 큰 것이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향리들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향리들에 대한 회유도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향리들은 비록 과거와 같을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향리의 임무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대부분이 농민인 지방민으로부터 조세·공납·역역·군역 따위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다.039)金鍾國, 위의 글, 94∼102쪽. 또한 州縣軍 가운데 一品軍 장교의 직도 향리가 맡았다. 한편 향리 가운데 어떤 이의 자제는 其人이 되어 개경의 중앙정부에 가서 출신 지방에 관련된 여러 사무를 처리하거나 그 원활한 처리를 위하여 의견을 내는 일을 하였다.040)金鍾國, 위의 글, 98∼100쪽.
金成俊,<其人의 性格에 관한 考察>(下)≪歷史學報≫11, 1959;≪韓國中世政治法制硏究≫, 一潮閣, 1985, 65∼74쪽).
韓㳓劤,<麗初의 其人選上規制>(≪歷史學報≫14, 1961;≪其人制硏究≫, 一志社, 1992, 78∼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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