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3) 향리
  • (2) 향역의 세습과 종사

(2) 향역의 세습과 종사

 향리들이 향리직에 나아가 수행하는 임무들은 자식들에 의하여 세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렇다고 향리의 자식은 누구나 그 아버지를 이어 반드시 향리직에 나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시 잠시 다음 사료를 보도록 하자.

嚴守安은 寧越郡의 吏였는데 키가 크고 담력이 있었다. 나라의 제도에 吏에 세 아들이 있으면 한 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엄수안이 例에 따라서 重房의 書吏에 補하여졌다. (그는) 원종 때에 등제하여 都兵馬錄事가 되었다(≪高麗史≫권 106, 列傳 19, 嚴守安).

 향리의 세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벼슬길에 나아감을 허락하는 것이 나라의 제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향리의 자제로서 其人이 되어 중앙정부에 입역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인다.041)韓㳓劤도 嚴守安이 例에 따라서 補하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其人의 選上立役의 내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韓㳓劤, 위의 글, 88쪽). 기인은 중앙에서 일정기간의 역을 마치면 吏職에 나아갔다.04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其人 문종 31년 判 및 권 83, 志 37, 兵 3, 工役軍 충선왕 원년 3월.
李佑成,<高麗朝의 ‘吏’에 對하여>(≪歷史學報≫23, 1964;앞의 책, 1991, 93∼95쪽) 참조.
엄수안은 기인으로서 입역하고 중방의 서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향리의 세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은 기인이 되어 중앙의 이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담은 나라의 제도라고 하는 것은 나머지 두 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향리직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에 있어서도 기인이 못 되는 나머지 두 아들은 꼭 향리직에 나아가야 하였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본국의 鄕吏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는 (鄕)役을 면하고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충숙왕 12년 敎).

 이 사료를 보면, 향리도 과거에 합격하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향리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기인이 되는 길이 있었고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세 아들 가운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시사되어 있다. 기인이 되는 것에 짝하여서 과거에 합격하는 것도 향리의 아들들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방도였다. 기인이 되어 選上立役의 길을 떠나야 할 사람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응시는 또 다른 아들의 몫일 것이다.

 향리의 세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 기인이 되어 떠나면 나머지 두 아들은 향리직에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응시가 허락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다음 사료를 참고하여 보자.

樂工에게 3, 4명의 아들이 있으면 한 아들로 하여금 업을 잇게 하고 그 나머지는 注膳·幕士·驅史에 소속시켰다가 陪戎副尉·校尉에 옮기되 耀武校尉에 이르는 데 그치게 하라(≪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문종 7년 10월 判).

 악공의 경우 3, 4명의 아들 가운데 父業을 이어 악공이 되는 것은 한 아들뿐이고, 나머지는 잡류의 직에 나아가게 하고 그 임무가 끝나면 요무교위에 한정시켜 武散階로 승진시키게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향리의 아들로서 한 아들은 반드시 부업을 이어야 했겠지만, 나머지 두 아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짐작된다. 둘 가운데 하나는 기인으로 선상입역되는 방법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응시하는 방법으로, 각기 중앙의 벼슬길에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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