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3) 향리
  • (3) 향리의 신분

(3) 향리의 신분

 鄕役을 세습하는 향리들은 일정한 지역에서 일반 백성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러하였지만, 향리가 주현군의 一品軍 장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적으로도 백성들을 지휘하는 입장에 있었다.043)旗田巍도 향리에게 武散階가 주어지기도 하였음을 지적하고 그 배경을 향리들의 현실적인 위치에서 찾은 바 있다(旗田巍,<高麗の「武散階」―鄕吏·耽羅の王族·老兵·工匠·樂人の位階―>,≪朝鮮學報≫21·22, 1961;≪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408∼411쪽). 이 점에서 보아도 향리들이 일반 농민보다 신분상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향리들이 향역을 세습한다는 것이 귀족의 입장에서는 향리들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나 제약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일반 농민들의 견지에서는 권리나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향역의 세습은 향리에게 -그것이 제약이든 특권이든 상관없이-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일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방에서의 향리가 주도하는 행정에 지장이 없는 한, 향리가 향역을 벗어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아울러 주어졌다. 그 하나가 其人이 되어 중앙의 胥吏職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과거를 통하여 品官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기인이 되는 것은 향리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농민에게도 그 문이 열려 있는 것이 과거였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은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製述業에 나아갈 수는 없었다.044)李基白, 앞의 책(1990), 57쪽.
朴龍雲, 앞의 책(1990), 239∼243쪽.
반면에 향리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일반 군현의 향리는 그러하였다.045)일반 군현이 못되는 행정 단위의 吏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部曲吏에게는 5품의 관직이 그가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군현의 향리이다. 향리는 제술업을 포함하여 과거의 전 분야에서 응시하는 데 제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벼슬길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일반 농민과의 차별은 저절로 드러나는 바이지만, 이 점에서라면 오히려 관인계층과 사정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의 응시에 있어서 향리가 관인계층과 비교하여 모든 면에서 차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위에서 본 대로 향리의 아들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은 향역의 세습이 먼저였으므로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제술업이나 명경업에 나아가는 경우에도 그 아들은 부호정 이상의 향리 자제에 한하였다.046)李基白, 앞의 책(1990), 58쪽.
朴龍雲, 앞의 책(1990), 237∼238쪽.
자세히 보면 이와 같이 향리는 관인계층에 비하여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나아가 향리들의 신분상 지위를 관인계층의 그것과 견줄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여 준다.

 과거에 나아갈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과거급제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향리 출신이었다는 점도 지적되어 왔다.047)金鍾國, 앞의 글, 112∼115쪽.
李基白, 위의 책, 58∼61쪽.
그러나 과거급제는 관인계층에게도 어려운 것이었다. 향리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한편 기인이 되어 중앙에 진출하는 것은 이에 비하면 용이한 것이었다. 과거처럼 어려운 시험을 거치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처럼 다른 신분층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인으로 중앙의 이서직에 나아가는 것은 향리의 자식들만이 늘상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향리의 신분상 제약이라기 보다는 특권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5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이 蔭補될 때 실질적으로건 同正職으로건 중앙의 서리직이 初職인 경우가 흔히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048)李佑成, 앞의 책, 92쪽.
朴龍雲, 앞의 책(1990), 652쪽.
사실 향리의 아들로서 기인이 되어 뒤에 서리직을 맡는 것은 5품 이상의 관리의 아들이 음보되어 그렇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향리의 아들이 고급관리의 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같은 성격의 서리직을 맡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향리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받을 만하다.049)李佑成, 위의 책, 95쪽. 어느 쪽도 기본적으로 능력보다는 먼저 혈연이 고려된 결과였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사실에 매달려 향리의 신분상 지위를 관인계층의 그것과 혼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기인으로 서리직에 나아갈 경우에는 그것을 벗어나 품관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050)필자는 기인이 궁극적으로 서리직에의 入仕를 통하여 주로 문반으로 진출하였다고 본 적이 있으나 여기서 종래의 견해를 바꾸어 둔다(洪承基,<高麗 초기 中央軍의 組織과 役割―京軍의 性格 ―>,≪高麗軍制史≫, 陸軍本部, 1983, 51∼52쪽). 이와 관련하 여 다음의 사료를 보도록 하자.

州縣에서 進奉한 長吏에게는 同正職을 한 등급 더하여 주고 職이 찬 사람에게는 武散階를 더하라. 承天府에서 進奉한 (사람으로서) 戶長 이상에게는 武散階를 가하고, 副戶長 이하에게는 직을 한 등급 더하여 주고, 職이 없는 이에게는 初職을 허락하라(≪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2일 신묘).

 주현에서 진봉한 長吏는 아마도 기인일 것이다.051)旗田巍, 앞의 책, 390쪽. 그들로서 직이 찬 사람은 武散階를 받도록 하였다. 여기서의 직은 초직은 아니라고 본다. 부호장 이하의 향리는 직을 한 등급 더하여 주고 직이 없는 이에게는 초직을 주었다고 하였듯이 한 등급 더하여 받게 된 직이 초직이었음을 말하여 준다. 즉 중앙 정부에 진봉한 부호장 이하의 향리 가운데 초직이 있으면 그 안에서 등급을 하나 높여주고 초직이 없으면 그것을 주라는 뜻이다. 문제의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옳다고 본다. 따라서 위에서 직이 차서 무산계를 받게 된 長吏의 직은 바로 초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초직은, 胥吏職에서의 그것을 뜻하며 入仕職이었다.052)金光洙,<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10∼12쪽. 초직은 人吏 라고도 불리웠는데 그 내부에 위아래로 연결되어 있는 몇 개의 등급이 있었 다. 기인은 마침내 서리직의 초직을 받아 입사직에 진출하여 그 내부의 등급 에 따라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가 오르는 입사직은 품관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다시 말하여 기인은 蔭補者와는 달리 서리직 내부에서만 승진이 허용되었을 따름이다. 혹 운이 좋으면 그는 무산계를 받을 수 있었다. 일종의 포상으로 진봉장리가 직이 차서 무산계를 받게 되었음을 일러주는 위의 기록이 바로 이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老兵·工匠·樂人 등과 나란히 받을 수 있는 무산계의 비중이 品官들이 받는 문산계와 비교될 수는 없다.053)旗田巍, 앞의 책 참조. 향리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관대하게 주어지고 중앙 정부의 서리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이족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크게 기대되는 신분층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