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4) 군인
  • (3) 군인의 신분

(3) 군인의 신분

 군인에게는 군역에 대한 대가로 군인전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 지급의 내용은 수조권이었다. 그리고 그 지급의 규정을 담은 것이 田柴科였다. 전시과의 규정에 의거하여 일정한 크기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계층은 문반·무반·남반의 관인계층이었다. 군인들도 군역을 이루면서 관인층과 나란히 전시과의 규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고 군인들의 신분상 지위를 관인계층과 견주자는 것은 아니다. 군인들이 전시과의 규정 속에 있었지만, 그들은 품관이 아니고 吏屬들과 거의 비슷하게 말단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057)李基白, 위의 책, 288∼289쪽.
洪承基, 앞의 글(1983), 48∼49쪽.

 그런데 이속은 胥吏職과 雜類職으로 대별되었다. 전자는 사무직이었고 후자는 기능직이었다. 전자와 관련이 있는 주된 계층은 관인층이나 향리였지만, 후자의 경우는 잡류였다.058)金光洙, 앞의 글(1969), 21쪽.
洪承基,<高麗時代의 雜類>(≪歷史學報≫57, 1973), 69∼77쪽 참조.
군인이 무예로써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점에 유의하면 이속 가운데에서 서리직보다는 잡류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잡류직에 나아가는 잡류는 이직인 잡류직을 세습하는 이족이었다. 품관과 구별되는 잡류와 무반과 구분되는 군인과는 이런 점에서도 어느 정도 통하는 일면이 있다. 군인이나 잡류는 대체로 그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조건이나 한계가 둘 사이에 혹 비슷한 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電吏·杖首·所由·門僕·注膳·幕士·驅史·大丈 등의 자손은 군인의 자손에게 諸業의 選路에 許通하는 예에 따라서 赴擧하게 하라. 製述·明經의 두 大業에 登第한 사람은 5품으로 한정하라. 醫·卜·地理·律·算業에 등제한 사람은 7품으로 한정하라 … (중략) …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入仕한 사람도 또한 7품에 한정시키되 玄孫에 이르르면 許通하게 하라(≪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限職 인종 3년 정월 判).

 전리 등의 자손이란 잡류의 자손을 말하거니와 그들에게 제술·명경·잡업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 위 기록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 허락의 조치를 “군인의 자손에게 그렇게 했던 예에 따라서 하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과거에 급제하거나 아니거나 입사한 뒤에 잡류 자손이 감수해야 할 제약들이 상세하게 보이고 있는데, 이것도 군인의 경우에 준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잡류의 자손이나 군인의 자손에 대한 과거응시의 허용여부는 그들의 신분상의 지위를 고려하여 결정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요컨대 잡류의 자손에게 과거응시를 허락하면서 그 시행을 굳이 군인의 자손의 예에 따르게 한 것은 그들의 신분상 지위를 같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 다. 그렇다면 과거급제 뒤에 나아갈 수 있는 한계도 이 둘이 비슷해야 하고 설사 과거를 통하지 않고 나아가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다만 과거응시나 관직진출만이 신분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나 또 원칙과 실제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여기서의 이야기가 단정적일 수가 없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과거응시나 관직진출에 있어서 국가에서 원칙적으로 군인과 잡류 사이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 둘 사이에 신분상 차이도 크게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 국가의 입장이었다는 점도 대체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군인의 품관진출이 잡류의 경우보다 훨씬 더 용이하였을 것이다. 잡류와는 달리 군인에게는 무반에 나아감으로써 품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흔히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령 戰功이 있으면 물론이고 무예가 출중하거나 勞功을 쌓거나 해서도 군인에게는 무관이 되는 기회가 많았다.059)洪承基, 앞의 글(1983), 50∼51쪽. 그래서 무반은 군인으로 보충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다고 보는 견해조차 있다.060)邊太燮, 앞의 글(1961), 51∼53쪽. 물론 이 견해는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반의 보충에 있어서 더 많은 경우는 음서 등에 의하여 임명되었을 것이다.061)李基白, 앞의 책(1968), 291쪽. 또 군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무관이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도 소홀하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잡류의 경우와 비교해서는 군인이 좀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크게 보면 군인의 신분상 지위를 잡류의 그것과 비슷하게 보아야 하겠지만, 엄격하게는 군인들이 잡류에 비하여 다소나마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한편 군인의 신분상 지위는 향리의 그것과도 견주어 볼 소지가 있다. 물론 하는 일의 성격상 군인은 잡류 쪽에 더 가까운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향리도 잡류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吏族이었으며 따라서 품관과는 동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군인은 吏屬과 나란히 전시과를 받고 있었는데 이속 가운데에서도 향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其人이 군인과 나란히 취급되는 경우도 있었다.06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制의 조항에 보면 其人田 과 軍人田을 나란히 하여 언급한 예가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군인을 향리와 견주어 그 신분상의 지위를 헤아려 보는 것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향리들이 과거를 통 하여 품관이 되는 것이 더 유리하였고 또 실제로도 그런 예는 많았다. 더욱이 그럴 경우에 향리는 무반이 아니라 문반으로 나아가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군인들의 처지는 향리들의 그것에 비하여 다소 열세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063)향리와 군인의 신분상 지위를 견주면서 전자가 文班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비하여 후자는 武班과 연결되어 있었음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李基白, 앞의 책, 1968, 290∼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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