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5) 잡류
  • (2) 이족으로서의 잡류

(2) 이족으로서의 잡류

 잡류는 잡로의 사로에 있는 이직이었지만, 그것은 그 이직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 잡류직이 세습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이어졌다는 점에서 잡류는 그들의 신분계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신분계층으로서의 잡류는 이직이었다. 그들이 대대로 이직인 잡류직에 나아가야 하였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그러면 이족으로서는 잡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서리직에서의 경우이다. 서리직은 같은 이직이라도 잡류직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였다. 그 직에는 5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들의 자제가 음보되기도 하였다. 기인들 또한 그 직에 나아갔다. 기인은 향리의 자제이므로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그 밖에 또 누가 서리직에 나아갔을까.

吏職의 服色은 庶官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다만 綠色의 옷에 짙고 옅은 차이가 있었다. (중략) 省府에 吏를 임명하는 것은 流品에 한정시키지 않고 貴家의 자제도 때로는 그것에 임명하였다. 이제 이 靑服을 입은 사람은 이것이 바로 吏를 세습한 자일 따름이다(徐兢,≪高麗圖經≫권 21, 皁隷 吏職).

 省府는 三省과 일반 관청을 뜻하는 것이겠는데, 여기에 관리들이나 귀가의 자제들이 吏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음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이직을 세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관리나 귀가의 자제로서 나아가는 吏는 물론 서리직이었다. 이직의 세습자는 靑服을 입고 있던 유일한 신분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관리나 귀가의 자제와 나란히 같은 서리직에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이직이라도 잡류직에 나아가는 잡류였다고 생각된다. 관련 사료도 없거니와 구체적인 사례도 없어서 서리직을 세습하는 신분층의 존재를 더 이상 확인하기가 현재로서는 어렵다.069)李佑成은 위의 인용 사료에 보이는 吏職세습자와 관련하여 主事·令事 등 서리직과 堂從 등 잡류직을 언급하였는데, 이 점에서 보면, 그는 서리직과 잡류직에 吏職을 세습하는 吏族이 나아가기도 했다고 본 듯하다. 그러나 상세한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李佑成,<高麗朝의 ‘吏’에 대하여>,≪歷史學報≫23, 1964;<高麗 官人禮制下의 ‘吏’>, 앞의 책, 94쪽). 다만 기인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기인은 일정한 입역기간이 지나면 서리직의 동정직과 그 실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해서 받게 된 서리직을 자식들이 세습적으로 이어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 그럴 경우 서리직에서만 승진할 수 있었는지 하는 점도 중요하다. 요컨대 기인들이 서리직을 세습하는 이족으로서 자리를 굳혔는지가 궁금한 문제이다. 그러나 짐작은 가지만 실제가 어떠하였는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070)지금의 짐작으로는 좀 부정적이다. 만일 기인이 其人으로서 끝나지 않고 서리직에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가 서리직에서 물러난 뒤 자연히 開京에 머물게 되었으리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아들들 가운데 누군가가 서리직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기인제도가 지속적으로 운용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 서리직에 보충되는 것은 또 다른 기인이지 其人의 아들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서리직을 세습하는 이족을 결국 발견하지 못한 셈이다. 현재 확실한 이족으로서는 잡류만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로 잡류가 이족으로서 유일한 신분층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잡류가 대표적인 이족이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족으로서 잡류는 기능직에 해당하는 잡류직에 나아가야 하였다. 그 자손들도 그러하였다. 잡류직이 있는 사로는 雜路였다. 그것은 서리직의 正路의 경우와는 달리 품관과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잡로에 있는 이직만을 세습적으로 맡아야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점에서 잡류는 이족이었던 것이다. 이족이었다는 점에서 중앙의 잡류는 지방의 향리와 통하였다. 그러나 하는 일의 성격에 차이가 있어서, 잡류가 기능직의 일을 한 데 비하여 향리는 사무직의 일을 하였다. 향리의 자제가 기인이 되어 이직을 맡게 되어도 서리직에 나아갔다. 이 점은 이 둘 사이의 신분상 지위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을 시사한다.

 잡류의 자손은 처음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인종 때부터는 잡류가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일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다만 잡류가 製述業과 明經業에 합격되어도 5품을 넘어서 진급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잡류가 雜業을 통하여 과거에 급제하면 7품에 한정시켜 진급을 허용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진급하는 데 限職의 제약을 받지 않았던 향리와 비교하면, 잡류의 경우는 커다란 차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 잡류가 과거에 합격하는 일도 드문 것이었지만, 설혹 그렇다고 해도 미관말직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과거로 현달한 사람들이 많았던 향리의 경우를 떠올리면, 이 점에서도 잡류의 신분상 지위는 향리의 경우와 비교하여 열세를 면할 수 없다.071)雜類의 신분상 지위에 대해서는 洪承基, 앞의 글(1973), 78∼9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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