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8) 향·소·부곡인
  • (1) 사회·경제적 지위

(1) 사회·경제적 지위

 鄕·所·部曲은 州·府·郡·縣과 같은 행정단위였다. 같은 행정단위였지만, 그것들은 저마다 높고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군·현은 주·부보다는 낮지만 향·소·부곡보다는 높았다. 그렇지만 군·현이 주·부보다 낮은 행정단위였다고 해서 군·현인이 주·부인 보다 신분상의 지위마저 낮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향·소·부곡인은 군·현인에 비하여 낮은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이 어색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하여튼 이 신분상의 차이에 주목하여 향·소·부곡인은 오랫동안 천인으로 간주되어 왔다.089)旗田巍,<高麗時代の賤民制度「部曲」について>(≪和田博士還曆記念 東洋史論叢≫, 1951;앞의 책, 1972, 65∼69쪽).
金龍德,<鄕·所·部曲巧>(≪白樂濬還曆紀念國學論叢≫, 1955), 187∼189쪽.
村上四男,<高麗時代の「所」について>(≪和歌山大學藝學部紀要≫7, 1957;≪朝鮮古代史硏究≫, 1978), 457쪽.
洪承基,<賤民>(≪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의 신분이 양인이었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090)李佑成,<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대하여>(≪震檀學報≫29·30, 1966;앞의 책, 1991, 114∼130쪽).
金龍德,<部曲의 規模 및 部曲人의 身分에 대하여>(上)(≪歷史學報≫88, 1980), 53∼69쪽.
武田幸男,<朝鮮の律令制>(≪岩波講座 世界歷史≫6, 岩波書店, 1971), 77∼78쪽.
朴宗基,<高麗 部曲制의 構造와 性格 ―收取體系의 運營을 中心으로―>(≪韓國史論≫10, 서울大 國史學科, 1984), 121쪽.
요즈음의 학계에서는 오히려 양인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091)朴宗基는 종래의 賤人說을 매우 심도있게 비판하고 良人說을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다(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 서울大 出版部, 1990). 그의 설명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이제 양인설은 더욱 유력한 견해가 되었다. 천인설에는 부곡인에게 주어진 사회적 제약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양인설을 내세우는 이들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가령 전자에서는 부곡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는가 하면 후자에서는 부곡인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설사 천인이 반드시 노비였다고 못박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노비가 대표적인 천인임은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노비는 남에게 소유되어 재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서 그들은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기도 한 신분층이었다. 부곡인과 군현인 사이에 신분상 격차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또 부곡인이 안고 있는 신분상 제약이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부곡인을 노비의 경우와 견줄 수는 도저히 없다. 노비가 천인인 한 부곡인은 천인일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천인이 良賤制에서의 그것을 의미하는 한, 부곡인은 양인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경제적인 측면에서 향·소·부곡인의 생활의 실제를 알아볼 차례이다. 일반 군현인과 마찬가지로 향·소·부곡인들도 기본적으로는 농민이었다.092)이와 관련된 설명은 洪承基, 앞의 글(1975), 340∼343쪽 참조. 그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경작노동을 통한 농업생산에 의지하지 않고는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일반 군현인과 다름없이 공부·요역·군역 등의 의무를 국가에 지고 있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 토지를 소유한 자는 국가에 전세를 물었다. 다만 여기서 所民만은 향·부곡인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향·부곡인에게는 그들이 조세와 요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관련사료들이 전하고 있는데, 소민의 경우는 그러하지가 않다.09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災免之制 정종 2년 6월·숙종 7년 3월 및 恩免之制 숙종 3년 10월.

 소민은 원칙적으로 조세와 요역의 부담이 면제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들에게는 금·은·철·자기·먹·소금 등 특정한 물품을 생산하여 국가에 바치는 부담이 있었다.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특별한 물품의 생산을 맡은 그들로서는 아무래도 더 많은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부곡인들과 같이 徭役을 지울 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더 좋을 물품을 더 많이 수취하기 위해서는 소민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따로 토지나 녹봉을 지급하여 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세가 면제된 것은 이러한 사정이 고려된 결과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렇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소민이 전세와 요역을 면제받았다고 해서 향·부곡인과 비교하여 국가에 대한 전체적인 부담이 덜하였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향·소·부곡인의 국가에 대한 부담은 그 형태가 서로 달랐다고는 해도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일반 군현에 사는 양인농민들과 견주어서도 향·소·부곡인의 국가에 대한 부담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근본적으로는 이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094)특히 이 점에 관해서는 洪承基, 앞의 글(1975), 341∼343쪽 참조.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朴宗基는 부곡인이 일반 주현인과 마찬가지로 조세나 力役 같은 부담을 졌지만, 주현인과는 달리 부가적으로 국가직속지의 경작과 같은 특정의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었다고 하였다(朴宗基, 앞의 책, 142∼151·159∼16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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