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8) 향·소·부곡인
  • (2) 신분상 지위

(2) 신분상 지위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국가에 일정한 부담을 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향·소·부곡인은 일반 군현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일반 군현인과의 결혼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095)武田幸男, 앞의 글, 78쪽.
洪承基, 위의 글, 335쪽.
朴宗基, 위의 책, 61쪽.

郡·縣人과 津·驛·部曲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인과 雜尺이 교가하여 낳은 자는 똑같이 나누고 남는 수는 母에 따른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부곡인이 군현인과 교혼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향·소민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교가하여 낳은 소생들의 귀속에 있어서는 부곡인이 군현인에 비하여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이 사실에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곡인의 신분상 지위가 군현인의 그것과 똑같지 않았음을 말하여 준다. 부곡인은 군현인이 아니라 진·역·잡척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부곡인은 교육을 받을 기회에 있어서도 군현인에 비하여 불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인종조에 式目都監에서 學式을 詳定하였다. 國子學生은 文武官 3품 이상의 아들과 손자, 勳官 2품으로 縣公 이상을 띤 사람과 아울러 京官 4품으로 3품 이상을 띤 사람으로서 勳封된 사람의 아들로써 이를 삼는다. 大學生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아들과 손자, 정3품·종3품 같으면 그 증손, 그리고 훈관 3품 이상으로 훈봉된 사람의 아들로써 이를 삼는다. 四門學生은 훈관 3품 이상으로 훈봉되지 않은 사람과 훈관 4품이지만 훈봉된 사람 및 문무관 7품 이상인 사람의 아들로써 이를 삼는다. 三學의 학생은 각기 300명씩인데 在學은 연령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해서 순서를 정한다. 雜路와 工·商·樂에 이름이 올라 있는 따위의 賤事者, 大小功親 사이에서 혼인을 범한 자, 家道가 올바르지 못한 자, 惡逆을 범하여 歸鄕된 자, 賤人·鄕人·部曲人 등의 아들과 손자 및 자신이 私罪를 범한 자, 이런 경우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入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律學·書學·算學은 國子學에서 학습한다. 律學·書學·算學 및 州縣의 學校의 학생은 모두 8품 이상(이하의 잘못)의 아들과 庶人으로서 이를 삼는다. 7품 이상의 아들로서 情願하는 사람은 들어준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 사료는 국자감에의 입학 자격을 알아보는 일과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도 이 자료는 제대로 해석되는 일이 오히려 드물었다. 특히 입학이 안되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의 해석이 그러하였다. 3학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위에 보이듯이 최소한 7품 이상의 관리거나 훈관의 자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도 이러 저러한 사람들은 안된다는 것이고 그 내용이 위의 관련 기사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관련 기사는 어디까지나 입학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단서조항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안되는 조건들은 모두 다섯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하나하나는 별개로 독립된 조건을 이루고 있다. 부곡인의 자손의 경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는 7품 이상의 관리의 아들이면 3학에 나아가지만 그들 가운데 부곡인의 자손이면 7품 이상의 관리의 아들이라고 해도 안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아무리 고급관리의 아들·손자·증손이라도 또 勳官의 자식이라도 부곡인의 피가 흐르면 3학에는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 위의 해당되는 글의 취지이다. 하물며 고급관리나 훈관은 커녕 그들과 전혀 무관한 보통 부곡인이라면 그는 아예 3학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고 보아야 실정에 맞는 이해라고 할 것이다.

 혹은 부곡인이 律·書·算의 3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서인이면 이 3학과 주현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도 서인은 8품 이하의 자식과 함께 허용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기술학의 3학은 이 가운데 8품 이하 관리의 자식이 입학에 있어 서 우선권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서인은 주현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다. 관리의 자식이 주나 현에 내려가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학조차도 관인계층이 독점하고 싶어하였던 것이 당시 법을 만든 위정자들의 입장이었다. 굳이 기술학의 입학에 있어서 단서를 달아 7품 이상 관리의 자식도 원하면 허용한다는 것도 그러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서인은 주로 주나 현에 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여기서도 향리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주나 현에 사는 주현민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향·소·부곡인은 마지막으로나 입학이 고려되었음직한데,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드문 일이었다고 보아야 온당할 줄 안다. 입법 취지를 무시하고 법조문을 중시하는 입장에 선다고 하더라도 부곡인이 기술학이나 주현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이 지니는 현실적인 의미는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아무리 높은 관리나 훈관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그 몸에 부곡인의 피가 흐르는 한 3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최고의 관직자나 훈관의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서조차 사정이 그러하였다면, 그런 배경이 전혀 없는 보통 부곡인들은 3 학의 입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물론 잡학의 경우에는 그러한 단서가 없었다. 오히려 입학자격이 인정된 서인 속에 부곡인이 포함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서도 위에서 본대로 부곡인의 교육 가능성에 대한 국가의 냉정하고도 편협한 태도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군현인이라고 하여도 국학에서 환영받는 계층은 아니었다. 그들은 3학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3학 입학의 자격에 관한 단서조항에 그들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들도 고급관리거나 훈관의 가문을 배경으로 할 수 있었다면 3학에 입학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조건을 구비하는 일이란 현실에 있어서 별반 의미가 없다. 다만 여기서 부곡인에 대 한 국가의 부정적인 태도와 같은 것이 일반 군현인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은 가벼히 볼 수 없다. 이 점이 이 둘 사이의 신분상 지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현인에게도 주나 현의 학교에 입학하기는 어려웠다. 잡학에의 입학은 더욱이 그러하였다. 그렇더라도 주현인은 부곡인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하면 유리한 여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부곡인은 이처럼 군현인에 비하여 교육받을 기회에 있어서 불리하였다. 군현인은 국자감의 잡학에 간혹 입학할 수 있었겠지만, 부곡인은 3학은 물론 잡학에 이르는 길도 설사 원칙은 아니었다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96)국법이나 윤리적인 규범 따위를 위반하지 않았던 부곡인 자손들은 원칙적으로 국학에 입학이 가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朴宗基, 위의 책, 51∼52쪽).

 부곡인은 군현인에 비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일에 있어서도 불리하였다. 일반 군현인은 제술업을 제외하고는 과거응시에 제한이 없었다. 그런데 부곡인은 靖宗 때에 그들에게 과거응시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국왕의 判文이 있었다.

5逆·5賊·不忠·不孝·鄕·部曲·樂·工·雜類의 자손은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정종 11년 4월 判).

 그러나 외조가 부곡인이었지만 國子監試를 통하여 관리가 된 문종 때의 鄭文의 예가 있었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정종 때 부곡인과 나란히 과거에 나아갈 수 있는 권한이 인정되지 않은 잡류의 경우 고려 초기부터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부곡인도 고려초부터 과거응시가 허용되었다고 보인다.097)洪承基, 앞의 글(1975), 336∼337쪽.
朴宗基, 위의 책, 49∼52쪽.
다만 정종 때의 예처럼 간간이 일시적으로 과거응시가 금지되는 적이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일시적으로나마 부곡인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고 하는 점은 역시 그들의 신분상 지위가 군현인과는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군현인에게는 그러한 금지조치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직에 나아가 승진하는 데 있어서도 군현인과 달리 제약이 뒤따랐다. 정문은 부곡인 신분으로 마침내 刑部尙書·政堂文學(종2품)에까지 올랐지만, 부곡인 신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淸要職인 右拾遺에 취임할 수 없었다.098)≪高麗史≫권 95, 列傳 8, 鄭文. 원칙적으로 말하면 부곡인은 승진 품계에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部曲吏의 경우 그가 오를 수 있는 관계상의 상한은 5품이었다.099)≪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柳淸臣傳에 보면 부곡의 吏는 비록 공이 있어도 5품을 넘지 못하는 것이 나라의 제도였다는 설명이 보인다. 그런데 柳淸臣은 高伊部曲의 吏의 자손으로 3품에까지 나아갔다. 이 파격적인 승진은 그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여러번 다니면서 고려를 위하여 세운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유청신 당대에 한하여 3품에 나아갈 수 있게 하였을 따름이다. 부곡리가 그러하였다면 일반 부곡인은 그보다도 낮은 품계에서 승진을 멈추어야 하였을 것이다.100)위에서 鄭文은 종2품까지 올랐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곡인에게는 7품에서 限職 제한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6품과 7품 사이에는 參上과 參下로 갈리는 큰 경계가 있었고, 이에 따라 실제로 7품을 상한선으로 해서 한직의 규제를 받는 신분층도 많았다.101)朴宗基, 앞의 책, 36∼38쪽 참조.

 부곡인은 형사처벌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군현인에 비하여 어느 정도 불리한 입장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기록이 참고가 될 것이다.

部曲人 및 奴가 주인 및 주인의 극히 가까운 친척의 尊長을 奸하면 和奸은 絞하고 强奸은 斬한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奸非).

 부곡인이 奴와 나란히 처벌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부곡인을 노비와 같은 신분상 지위로 해석할 수는 없다. 노비는 특정한 사람이나 기관에 소유되어 있었지만 부곡인은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 기록에서의 주인은 노에게는 소유주이지만 부곡인에게는 그러한 것일 수가 없다. 부곡인에게 주인이란 佃戶에 대한 田主와 같은 일종의 계약관계에서 생겨난 주인의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리적일 것으로 믿는다.102)洪承基, 앞의 글(1975), 338∼339쪽. 그렇기는 하지만 군현인에게는 없고 부곡 인에게만 보이는 이 처벌조항이 상대적으로 낮은 부곡인의 신분상 지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로 미루어서 그 밖의 형사처벌에 있어서도 부곡인들이 더 불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주로 부곡인에 한정되다시피 하였으나, 향이나 소에 사는 사람들의 신분상 지위도 부곡인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곡인과 군현인은 모두 크게 보아서 양인이었고 기본적으로 농민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부담도 형태는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상의 지위는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서로 동일하게 여길 수 없는 대목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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