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9) 진척·역민

9) 진척·역민

 105)津尺·驛民에 관하여서는 驛站制의 관점에서 쓰여진 內藤雋輔,<高麗驛站考>(≪歷史と地理≫34-4·5, 1934;≪朝鮮史硏究≫, 東洋史硏究會, 1961)에 언급이 있고, 身分制의 관점에서 접근한 洪承基, 앞의 글(1975)에 설명이 보인다. 여기서의 논의는 주로 후자의 글을 참고하였다.고려는 驛站制를 실시하여 거의 전국을 망라하는 도로망을 가지고 있었다.106)이 驛站制의 실제에 관해서는 內藤雋輔, 위의 글 참조. 도로 가운데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요로에는 驛이 두어졌고, 교량으로 이어지지 않는 하천에는 津이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전국적인 도로망은 진에 의하여 보완되는 驛路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역이나 진은 일반 군현이나 부곡처럼 행정단위이기도 하였다. 역에 사는 주민은 驛民이라고 일컬어졌고, 진에 사는 사람들은 흔히 津尺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이 둘의 신분상 지위는 거의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郡·縣人과 津·驛·部曲人이 交嫁하여 낳은 자는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하고 진·역·부곡인과 雜尺이 교가하여 낳은 자는 똑같이 나누고 남는 수는 母에 따른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교가소생의 귀속을 설명하는 가운데에서 진척과 역민은 부곡인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이 셋의 신분상 지위가 동일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지위는 잡척과도 비슷하게 견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지위가 군현인의 경우와는 일단 구별되었다. 그들과 군현인 사이에 혼인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그 혼인에서 얻어지는 자식들의 귀속처리를 보면 진척과 역민의 신분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역민은 법제적으로는 驛戶로 파악되기도 하였다.

申靑은 … 多仁縣 伐里驛의 吏였다. (중략) ‘靑은 본레 驛戶였는데 이름을 고치고 役에서 도피하여 함부로 큰 벼슬을 받았습니다’(≪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申靑).

 역호에는 역리도 포함되었는데 역호가 국가에 지고 있던 역이 站役이었다. 물론 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참역은 요역의 한 형태였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국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보고하는 따위의 일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그리고 생산물의 운반도 역호의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참역은 역리와 그 밖의 일반 역민이 함께 져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들이 지는 참역은 형태가 각기 달랐다. 역민은 직접 노역을 담당하였고, 역리는 그것을 지휘·감독하면서 驛務를 총괄하여 책임지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군·현의 吏와는 구별되었지만 그래도 진의 吏와 함께 공식적으로는 長이라고 불리었다.107)≪高麗史≫권 94, 列傳 7, 崔士威. 그들은 역민의 장으로서 공관에서 역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역에 배치된 역리의 수는 역의 크기에 따라서 2∼3명 정도 였는데,108)≪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성종 2년 判. 그들은 일반 역민과는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역리에게는 外役田이 주어졌고, 역에는 公須田과 紙田이 지급되었다. 일반 역민들에게는 아무런 경제적인 처우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경작하여 생계를 꾸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리에게 주어진 외역전과 역에 지급된 공수전과 지전의 경작은 그들이 맡았을 것이다.

‘여러 道의 館·驛의 公須田租는 大路가 100石, 中路 50石, 小路가 30石으로 하여 儲積하여 두고 廩給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組는 각각 州倉에 수송하도록 하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문종 2년 12월 判).

 공수전의 조는 역민들이 경작하고 냈을 것이다. 공수전은 국유지였다고 보 여진다. 전호가 무는 租는 대체로 생산량의 1/2에 해당되었으므로 역민들은 조액을 빼고 남는 1/2로써 생계를 꾸려갔을 것이다 이것은 佃作하는 경우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역민 가운데에는 자신의 토지를 자작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믿어진다.

‘管內의 龍泉驛이 지난번 수해를 입어 公館과 民家가 모두 漂沒하여 이제 바야흐로 옮겨서 館宇를 새로 짓는데 民力을 다 소모하고 있사오니 청컨대 올해와 내년 두 해의 租稅를 감면하여 주소서’(≪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災免之制 문종 15년 정월 韓丁翊奏).

 龍泉驛民들에게 2년간 조세를 감면하여 주자는 의견이 보이고 있다. 이로 써 역민들이 국가에 조세를 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국가에 조세를 내는 토지는 역민들의 소유경작지였을 것이다. 일반 역민들은 自作을 하건 佃作을 하건 경작을 통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농민이었다. 그들이 貢賦를 포함하여 그 밖의 부담도 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튼 站役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임무였음에는 틀림없다. 참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申靑은 일명 松이니 多仁縣 伐里驛의 吏였다. 일찍이 元에 들어가 瀋王 暠의 從者가 되어 사랑을 받았다. 충숙왕이 원에 행차함에 미쳐서 瀋王邸로 行宮을 삼으심에 靑이 왕을 만나뵙고 前散員에서 護軍에 제수되고 累遷하여 上護軍이 되었다. (중략) 충혜왕이 즉위하자 權省 洪彬을 시켜 청을 理問所에 가두고 耆老府院君 權溥 등에게 명하여 청의 죄를 들어 行省에 고하게 하였다. (중략) ‘청은 본래 驛戶였는데 이름을 고치고 役에서 도피하여 함부로 큰 관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죄입니다. 청은 멀고 가까운 親屬들을 거두어 站役을 면제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죄입니다’(≪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申靑).

 申靑은 驛吏 출신의 驛戶였다. 그가 도피하여 죄를 짓게 된 역은 그가 그와 친족들로 하여금 벗어나게 한 참역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참역을 벗어나거나 남에게 벗어나게 하거나 모두 범죄가 되었다. 그런데 참역은 한 사람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고 군역이 그러하였듯이 멀고 가까운 친족들이 모두 그 부담을 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멀고 가까운 친족이 역호의 구성의 범위를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참역이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세습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세습의 원칙을 깨는 것이 범죄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그런 원칙이 지켜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청은 끝내 치죄의 대상이 되기는 하였지만, 참역을 벗어나는 데 일단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上護軍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세는 당시가 원의 간섭기로서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 있었다는 점, 그가 국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 또 그가 일반 역민이 아닌 역리였다는 점 따위를 아울러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참역을 피하고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 죄를 짓는 일이라고 탄핵을 받았다. 고려 전기에 역민들은 참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관리가 되는 일도 금지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에 맞을 듯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