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1) 가족과 혼인
  • (1) 가족

(1) 가족

 고려시대의 가족에 대한 자료로는 소수의 단편적인 사례나 고려 중·후기 의 戶籍, 가족과 관련된 법제, 그리고 혼인제도 및 친족제도 관련 자료 등이 있다. 또한 신라말의 촌락문서나 몇몇 사례자료 등도 바로 고려시대로 연결되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고려시대 가족의 검토에 참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것이고, 그 자료 자체에 대한 세 심한 주의를 기울인 분석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아서 쉽사리 당시의 현상을 드러내주지 않았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기왕의 연구서에서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가족구성을 소가족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고, 그와는 달리 대가족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가족구성 및 그 가족이 존재하게 되는 배경으로서의 친족제도에 대한 해석에서는 더욱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단편적인 자료는 하나의 현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고려시대의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로부터 정리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첫째, 당시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역사적 현상의 완성된 모습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가는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가족제도나 친족제도도 사회의 다른 부분들에서 흔히 그렇듯이 규격화되어 있는 단일성을 갖기보다는 종종 변이적인 요소들이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일부 혼재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당시 역사적 흐름의 일반적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가족의 구성 형태만이 아니라 그 가족이 가족범위를 넘는 친족들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당시의 일반적인 가족이 소가족이라 해도 촌락내에서 다른 친척들과 긴밀한 연고관계 속에서 생활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대의 소가족과도 다른 존재양태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고려시대의 가족은 單婚的인 부부와 미혼 자녀들로 이루어진 부부가족이 기본적인 단위가 되어 때로는 夫妻의 노부모나 생활 능력이 없는 가까운 미성년 친척 등을 부양가족으로 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확대 가족적인 구성도 일부 소수의 경우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가족을 대가족으로 파악하는 이해에는 고대 이후에도 부계 친족 집단과 함께 대가족의 존재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되었다는 가설적 이해가 전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해서 보면 고려시대로 들어오기 직전 신라말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중앙귀족들의 경우 신라 하대에 오면 왕위를 둘러싼 정쟁의 격화와 함께 친족집단이 분열되고, 4촌간에도 서로 다른 세력으로 나뉘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123)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盧泰敦,<羅代의 門客>(≪韓國史硏究≫31·32, 1978).
崔柄憲,<新羅下代社會의 動搖>(≪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소가족 단위로 친족집단이 분해되는 현상은 하층민들과 지방사회에서도 진행되었다. 신라 중대와 하대 이후에는 부모와 미혼 자녀 또는 기혼 자녀의 하나가 노부모를 모시고 그 안에서 家 단위를 이루고 있는 농민들의 사례가 발견된다.124)≪三國遺事≫권 5, 孝善 9, 眞定師孝善雙美·大城孝二世父母·孫順埋兒.
≪三國史記≫권 48, 列傳 8, 向德·聖覺·孝女知恩.
특히 이들의 경우는 도움을 받을 만한 친족공동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고단하고 한미한 처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존재는 친족공동체의 분해가 진행됨에 따라 부부와 미혼 자녀 그리고 때로는 노부모나 미혼 형제자매가 포함되는 소규모 가족들이 출현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족공동체가 소규모 가족단위 이하로 분해되고 있었던 현상은 중대말∼하대 전반 무렵 西原京 부근 촌락의 상황을 전하는 신라촌락문서에서도 나타난 다. 신라촌락문서에서는 본래 그 기원이 대가족적인 단위에 기초하여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孔烟의 편제가 그 내부에 8∼14인에 달하는 평균 인수를 포함하며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실질적인 가족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거주의 기본 단위를 보여주는 移住의 단위는 소가족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125)盧明鎬,<羅末麗初 親族組織의 변동>(≪又仁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8). 촌락 문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소가족적인 단위로의 분해현상은≪三國史記≫나≪三國遺事≫등에서 나타나는 친족공동체 및 그 내부의 확대가족의 분해 그리고 소가족 단위의 대두라는 사실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족에 대한 자료로서 주목되는 것으로는 우선 족보 등에 전재되어 온 고려시대의 戶口單子나 准戶口 및 國寶戶籍 등의 37개 호적 자료가 있다. 여기서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고려시대의「戶」와「가족」의 관계이다. 호와 가족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바로 일치시켜서는 안되는 면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호로 지칭된 대상에는 자연호와 編戶가 있었고, 편호로서의 호는 가족과는 다른 것이었다. 편호는 행정적으로 편성된 호로서, 가족은 보통 그것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존재하였다. 예컨대 우왕 원년(1375) 2월에 외방 각처의 民戶를 京中에서 행해지는 법과 같이 대·중·소의 3등급으로 나누고, 중호는 둘로써 1(戶)로 삼고, 소호는 셋으로써 1(戶)를 삼는다126)≪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고 하였는데 이는 편호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민왕 5년(1356)의 敎에 3家로써 1戶로 삼아 無事하면 3家가 돌아가며 番上하고, 유사시에는 3家에서 1丁씩을 내며, 위급할 때는 家의 丁 모두를 징발한다는127)≪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9년 8월. 것에서의 戶는 바로 그러한 편호이다. 편호의 방식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고려 전기에는 문종대에 州鎭入居軍人에게 예에 따라 본관의 養戶 2인씩을 주도록 한 것에서128)≪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27년 3월.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편호들은 가족으로서의「家」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니, 이 편호로서의 호를 가족과 구분하지 않는 해석은 큰 잘못이다. 편호의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은 軍戶였는데, 고려시대의 軍籍 등은 그러한 군호로서의 편호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보통 戶口籍 또는 戶籍으로 불리우는 것은 원칙적으로「家」로서도 지칭된 가족을 단위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법제와 실제는 시기에 따라 불일치의 정도가 심할 수 있듯이 호적의 호도 항상 실제의 가족과 일치하는 정도가 같지는 않았던 것에 유의해야 한다.

 현재 남아 전하는 고려시대의 호적자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군은 하나의 부부가족 단위를 기본으로 하되 子와 女의 부부가족들 중의 어느 하나가 노부모를 모시는 단위로 되어 있는 戶이며, 이들은 소가족적인 단위로 볼 수 있다. 제2군은 외형은 단일 부부가족 단위이나 고령인 자녀들이 미혼인 상태로 기록된 것은 기록상의 어떤 문제가 있는 경우로 보인다. 제3군은 2개 이상의 부부가족 단위를 포함한 호이다. 그런데 고령의 자녀나 형제자매의 경우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가 기록되지 않아 미혼인 것처럼 되어 있는 기록상의 문제는 제3군에서도 존재한다.129)고려시대의 가족제도와 관련한 호적자료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盧明鎬,<高麗時代 鄕村社會의 親族關係網과 家族>(≪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참조.

 제2군·제3군의 호들은 1333년 이후 모두 여말의 호적자료들로, 이들은 여말의 통치질서의 문란에 따른 호적기재상의 누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의 호들에도 누락은 있었겠지만,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심히 부실한 기록은 여말의 상태로 이해된다. 제2군과 제3군의 호적기록에 누락 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우선 고령의 자녀들의 경우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 중의 상당수는 배우자와 그들 자녀들의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러한 누락은 다른 자녀들을 통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제2군의 호들의 대부분도 2개 이상의 부부가족 단위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고, 제3군의 경우는 내포하는 부부가족 단위가 더 증가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개 이상의 부부가족 단위를 포함하는 제2·3군의 호들과 같은 경우에 대해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들을 하나의 대가족단위로 이해하기도 하였다.130)許興植,≪高麗社會史硏究≫(亞細亞文化社, 1981), 229·241·294쪽 및 崔在錫,≪韓國家族制度硏究≫(一志社, 1983)에서도 ‘雙系的 傍系家族’이라 하여 역시 하나의 가족단위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戶籍 작성에서 대상으르 하는 戶의 실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자연호로서의 가족 내지 家口(House Hold)로 이해되어 왔으나, 조선시대 戶의 실체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를 한 韓榮國,<朝鮮王朝 戶籍의 基礎的 硏究>(≪韓國史學≫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에서는 조선시대 호적의 戶는 그 실체가 家屋(烟戶)이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의 가족단위로 이해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두 개 이상의 부부가족단위를 내포한 호적들인 제2·3군은 모두 고려 말기의 것들인 반면에 1200년대 호적들만 해도 모두 소가족적인 단위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驪州李氏 족보에 수록된 일련의 호적자료에서도 1237년과 1270년의 것은 제1군에 속하는 한편, 1333년과 1372년의 것은 제 2군에 속한다.131)李佑成,<高麗時代의 家族―친족집단·사회편제 문제와의 관련에서―>(≪東洋學報≫5, 檀國大, 1975). 신라촌락문서를 비롯한 통일신라 후반 이후의 자료에서 이미 소가족단위의 기능이 강화되었음을 고려한다면, 1200년대 호적자료들은 소가족적인 단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상황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제 2·3군의 호적자료를 대가족적인 단위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고려말에 갑자기 대가족적인 단위가 발달했다는 부자연스러운 이해를 낳게 한다.

 이들 호적자료에서 보면 1300년 이후의 총 34호 중에서 약 3/4 정도가 두 개 이상의 부부가족 단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말의 호적자료가 갖는 기록상태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제2·3군의 호적들 중에는 실제의 대가족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도 일부 있겠으나, 그 대다수는 실제로는 소가족 단위로 분가되어 여러 개의 별도의 호들을 이루는 것을 하나의 호로 파악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여러 개의 호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 하나의 호로서만 파악됨으로써 호구 파악에서「口」만이 아니라「戶」단위가 누락된 것이었으니, 실제로 그러한 호의 누락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소가족적인 단위가 거주상의 기본 단위가 됨은 제2·3군의 호의 구성상태 에서도 추정된다. 제2·3군의 호들에는 아들과 딸 및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내외손들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모든 호들이 戶主의 자녀 및 그 배우자들을 자체내에 함께 유지할 수는 없다. 어느 한 호에 다른 호로부터 며느리와 사위가 들어 오면 상대편 호들에서는 女나 子가 나가야만 한다. 결국 모든 자녀의 부부가족 단위를 기록한 것은 그들 중에서 어떤 것과 동일 호를 이루도록 하는 규정, 예컨대 아들의 부부가족이 호주와 동일한 호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女 및 女壻와의 동거도 결혼 초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1·2·3군의 호적 자료에서도 40대, 50대 연령의 여서도 처부모와 동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여럿 나타난다.132)호주가 고령의 딸(실제로는 이 경우 딸의 부부가족)과 함께 기록되고 있는 것은 논외로 하고, 호주가 처부모와 동거하고 있는 사례들만을 보아도 상당한 비중이 된다. 그 호들의 본관과 호주 성명 및 연대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군;총 13개호 중 6개호―咸昌 金鏡高戶(1280), 光州 金璉戶(1301)·咸昌 金克孫戶(1336)·金州 金永祿戶(1392)·(국보호적 7폭 2호, 부분 파손) (1392)·三陟 金德原戶(1392).
제2군;총 12개호 중 1개호―旌善 李天祿戶(1392).
제3군;총 12개호 중 2개호―安東 金得雨戶(1391)·升平 金代介戶(1392).
제2·3군에서는 처부모와의 동거가 극히 적게 포함되고 있는데, 이는 이들 호의 절대다수가 고령의 딸을 호에 포함하고 있어 실제로는 딸의 부부가족과 동거하는 경우가 더 있었을 것이다.
소가족단위의 이주 빈도가 비교적 높은 속에서 부모나 처부모와의 동거는 혼초부터 계속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분가 후 중간에 변동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노년에나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동거는 자녀의 이동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부모쪽의 이동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133)그 예로서<橫川郡大夫人趙氏墓誌銘>(李蘭暎 編,≪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289쪽)에서 보면 조씨부인은 어려서는 외조 文公元에게서 자랐고, 남편 柳英材가 죽은 후 ‘門戶가 장차 떨어지려는’ 상태에 이르렀으나 同母弟의 돌봄으로써 모면하였고, 노후에는 아들과 사위의 봉양을 받았다고 한다.
李奎報 모친의 경우 둘째 사위 집에서 기거한 것은 이규보가 29세 되던 1196년부터 시작하여 1201년까지로 나타난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年譜).

 결혼한 자녀들의 부부가족의 거주가 일반적으로 유동적이라는 사실은 이들의 독자적 단위로서의 기능이 그만큼 컸음을 반영해 준다. 이러한 사실에 유의할 때≪高麗史≫刑法志의 分家規定의 의미가 드러난다.

(A)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子孫이 戶籍을 나누고 財産을 나누어 〔別籍異財〕供養에 궐함이 있으면〔供養有闕〕, 徒 2년에 처하고, 服을 입는 기간 내에 戶籍을 나누면 徒 1년에 처한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이 규정에 대해서 3세대 친족내「同籍異財」가 무너져 가는 것을 금지한 법령이라는 해석도 있었고,134)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出版部, 1980), 184쪽. 唐律의 규정과 달리「供養有闕」의 단서가 들어간 것은 공양에만 문제가 없으면 조부모·부모의 생존시에도 분가를 허용한 규정이라는 해석도 있었다.135)李佑成, 앞의 글. 그 후 다시 이 규정을 당률과 세부적으로 비교 검토한 연구에서는「공양유궐」과 관련된 규정은 당률의 조항 중에도 있었음을 지적하고, 다시 이 규정을「別籍異財」를 금지한 규정이라고 하였다.136)金壽泰,<高麗初 別籍異財에 관한 法律의 制定>(≪東亞硏究≫17, 西江大, 1989). 이에 대한 해석은 고려시대의 가족제도의 이해에 기초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항이니 관련된 당률의 조항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Bl) (十惡 중) 7번째는 불효이다.〔다음과 같은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告言詛罵祖父母父母, 祖父母父母別籍異財 若供養有闕, 居父母喪身自嫁娶 若作樂釋服從吉(하략)〕(≪唐律疏議≫권 1, 名例 十惡).

(B2) ① 조부모와 부모가 있는데 자손이 別籍異財하는 자는 徒 3년에 처한다. 〔別籍과 異財는 동반되지 않아도 해당한다. 이하의 조문도 이에 준한다.〕② 만약 조부모나 부모가 別籍을 시키거나 자손으로 망녕되이 다른 사람의 後를 잇게 한 者는 徒 2년에 처하되, 子孫은 不坐한다(≪唐律疏議≫권 12, 戶籍 子孫不得別籍).

(B3) 부모상 중에 아이를 낳거나 형제가 別籍異財한 者는 徒 1년에 처한다(≪唐律疏議≫권 12, 戶婚 居父母喪生子).

(B4) 자손이 (父祖의) 敎令을 어기고 범하거나 供養에 궐함이 있으면 徒 2년에 처한다.〔이는 가히 따를 수 있는데 어기고, 공양을 감당할 만한데 궐한 자를 말한다. 모름지기 조부모나 부모가 告해야 坐한다〕(≪唐律疏議≫권 24, 鬪訟 子孫違犯敎令).

 위의 당률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공양유궐」과 관련된 조항이 별도의 규정으로 되어 있어, (A) 하나의 조항 속에 들어가 있는 고려율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B1)은 이른바 10악의 하나인 「불효」에 해당하는 죄목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A)가 (B2)·(B3)·(B4)를 함께 묶어놓은 규정이라고 보는 해석은 (A)가 戶婚條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질적인 鬪訟律의 (B4)조항과 함께 묶어 놓은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A)가 당률의 (B2)·(B3)을 함께 참조하여 성립되었다 해도 (B3)의「諸居父母喪生子」부분은 제외하고「별적이재」부분만을 발췌한 것도 (A)의 규정의 초점이 戶籍律의「별적이재」에 대한 문제에 있음 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당률의 투송률의 조항인「공양유궐」이 별도의 독립된 죄목으로서 (A)에 묶여졌다고 볼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며, 그만큼 이 귀 절이「별적이재」에 결부된 단서일 가능성이 커진다.

 (A)에 수용된 것이 (B2)중에서도 (B2)-① 이며, (B2)-② 는 제외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B2)-② 는 조부모나 부모의 지시로 별적을 할 경우도 부 모 등을 처벌하는 규정이니, 별적에 강경한 대응을 보여 주는 규정이다. 그런데 당률의 이러한 규정이 제외된 것은 당률과 달리 고려에서는 적어도 조부모나 부모의 허락이 있는 경우 別籍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중국에서도 (B2)의 규정이 明律에서는 (B2)-② 의 귀절은 빠지고 조부모 나 부모가 별적이재 문제에 관해 親告하는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바뀌어지고 있었다.137)≪大明律直解≫권 4, 戶律 別籍異財.≪元典章≫至元 12년(1271) 기사에 의하면 그 이전부터 漢人들에게 는 (B2)-② 와 같은 질서가 무너져「別無定制」인 상태에서 쟁송이 빈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진인은 그 전부터도 조부모나·부모가 허락하면 별적이 재 가되고 있어, 지원 12년 법령 후로는 한인들도 조부모나 부모가 허락하면 별적이재를 들어주도록 하고 있다.138)≪元典章≫권 17, 戶部 3, 分析 父母在許令支析. 중국 한족들에서도 (B2)-② 와 같은 규 정에 의한 질서는 당대를 지난 언제부터인가는 흔들리고 있었고, 그것의 붕괴는 명률에서처럼 그 규정의 삭제를 수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A)의 고려율에 (B2)-② 가 제외되고 있는 것은 당률에서와 달리 부모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한 분가가 문제되지 않는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의 婚俗이나 상속제에서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가 분가하는 것은 일반적이라 할 만큼 흔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관련하여 한인과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여진인 사회에서는 당률과 다른 질서가 시행되고 있었음이 참고된다. 고려사회의 혼속이나 재산상속제 등은 중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니, 고려사회의 경우 당률과 보다 많은 차이를 가질 소지가 있었다. 중국의 혼속은 父處制인 親迎制였고, 상속제도 아들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딸과 아들에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상속제와 결합되어 거주가 父處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率壻婚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부모로서는 결혼한 딸·아들 어느 쪽과도 동거할 수 있고, 자녀로서는 夫家나 妻家 모두로부터 상속기회가 주어져 있었으며 동시에 양쪽 어디에도 거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3세대 친족」단위를 묶어 놓는 것은 어렵고, 제도적으로도 모순되는 것이다.

 3세대 부계친족단위를 묶어 놓은 당률에서는 養子制가 중요한 기능을 하였으니, 당에서와 같은 부계 가족구조에서는 양자를 필요로 하는 경우로 無子女만이 아니라 딸만 있고 아들이 없는 경우가 빈발하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양자제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갖지 못하였고,139)許興植, 앞의 책, 74∼75쪽. 양자제에서도 양자만이 아니라 양녀가 행해지고 있었다.140)<喬桐縣君高氏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56쪽)에는 인종대에 高氏가 養女가 되어 그 남편이 妻 養父의 田丁을 遞立한 사례가 보인다.<李公遂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674쪽)에도 아들이 없는 이공수가「養族女」한 것 외에도 이러한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고려의 양자제가 이렇게 된 요인의 하나는 딸 및 女壻가 노부모의 봉양이나 가족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있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혼속이나 상속제 등에 의해 딸·아들 중의 어느 누구도 부모와의 동거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고려에서는 당에서와 달리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별적이재가 문제 없는 속에서 실제의 중요한 문제는「供養」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실례에서도 별적이재하여 공양을 궐함으로써 처벌된 사례가 나타난다.141)≪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정월 을유조에는 趙俊明이라는 자가 아버지가 사망한 지 4년이 되도록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고 동생들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처벌된 예가 보인다. 父의 생존시에 子가 호주가 된 사례도 있고,142)1390년 義城 金洊의 호구단자에는 그 父가 56세로 생존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李基白,≪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一志社, 1987, 252쪽). 그리고 조선초 이지만 1462년 登州 朴師顔의 호구단자에도 그 父가 61세로 기록되어 있다(許興植, 앞의 책, 183쪽). 이미 결혼 후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는데도 처부모와 동거하고 있는 호의 사례도 여럿 나타난다. 이상으로 보면, 고려에서는 형제·자매가 분가하는 소가족이 기본적 가족형태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뒤에서 사례 자료와 관련하여 보듯이 결혼한 형제·자매가 노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우는 희소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소가족단위가 일반적인 거주의 기초단위가 된 것은 기혼 자녀와 기혼 형제·자매의 분가에 의한 것이나, 그 소가족단위에는 종종 노부모나 생활능력이 없는 가까운 친속의 부양·동거가 수반되었다. 그리고 소가족 단위는 무연고지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연고에 의해 가까운 친속들과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한 거주의 양태는 사례 자료와 함께 결합시켜 검토하면 보다 잘 드러난다.

 거주의 단위가 대가족적인 것이었는지 소가족적인 것이었는지는 방계 친속과의 동거상태에서 나타나게 된다. 고려시대에도 결혼한 형제·자매가 동거하는 대가족적인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아래에서 보듯이 그러한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黃守는 대대로 平壤府에 살았는데 충숙왕 때 本府의 雜材署丞의 되었다. 부모의 나이가 모두 70세였는데, 賢·仲連·季連이라는 아우와 자매 2명이 있어 함께 밥을 지어먹으며, 날마다 때에 맛나는 음식을 갖추어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나 함께 먹은 지 20여 년이었다. 자손들도 따라 익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成 姜融, 判密直 金資가 친히 그 집을 방문하니, 백발인 부모가 뜰에 나와 맞이하므로 만류하여 앉게 하였다. 강융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해 말하기를 ‘오늘날 士大夫간에도 듣기 어려운 바인데 어찌 이 城 중에 이런 효자의 가문이 있을 줄 뜻하였으리오’라 하였다(≪高麗史≫권 121, 列傳 34, 黃守).

 위에서 보면 부모의 나이나 20여 년의 세월로 볼 때 모두 기혼자들로 보이는 세 형제와 두 자매가 그 자녀들과 함께 노부모를 봉양한 경우이다. 이에서 주목되는 것은 분가한 형제·자매간의 노부모 봉양에서도 단계적인(unilineal) 편향성이 없듯이 여기서도 기혼의 형제만이나 자매들만으로 동거·부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설명한 고려시대의 호적문서에서도 제2 군과 제3군의 호들에서 형제와 자매가 차별됨이 없이 포함되고 있는 호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단 이들 호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대가족이라기보다는 몇 개의 소가족들을 하나의 호로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황수의 가족에 대해 “사대부간에도 듣기 어려운 바”라는 강융의 말을 참조한다면 황수의 가족과 같은 대가족적인 거주는 역시 일반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다.

 결혼한 동기간에는 분가하여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니, 방계 친속과의 동거·부양관계는 대개 생활능력이 없는 가까운 친속을 부양하기 위한 경우들로 보인다. 그러한 동거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일단 분가한 후에도 사정이 발생하면 부양을 위해 동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선 동기간의 동거·부양 사례로 李公遂의 경우 父祖 쪽 인물들이 증조대 이래로 현달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매부인 全公義의 집에서 자랐으며, 현달해지자 전공의를 아버지같이, 누이를 어머니같이 섬겼다고 한다.143)≪高麗史≫권 112, 列傳 25, 李公遂.
<李公遂墓誌>(≪朝鮮金石總覽≫上), 671쪽.
이처럼 동생이 누이집에서 양육된 경우는 고종 때 孫抃이 재판한 남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144)孫抃이 慶尙道按察副使로 있을 때 父가 전재산을 출가한 딸에게 상속하도록 하고 어린 아들에게는 衣·冠·鞋 1습과 종이 1권만을 주도록 유언함으로써 소송이 있게 된 남매의 경우도 누이에 의해 남동생이 길러진 사례이다(≪高麗史≫권 102, 列傳 15, 孫抃).

 동거와 부양은 형제·자매의 자녀(조카 및 생질)와 부모의 형제·자매(친삼촌·외삼촌·고모·이모) 사이에서도 흔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대에 태어나 예종대까지 생존한 인물인 閔瑛은 舍兄인 起居注 閔修가 일찍 죽고 형제·자매 5∼6인이 차례로 죽음으로써 형제·자매의 자식을 자기의 자식처럼 길렀다고 한다.145)<閔瑛墓誌>(≪朝鮮金石總覽≫上), 365쪽. 민영의 경우는 질과 생질에 대한 친삼촌 또는 외삼촌으로서의 부양·동거 사례이다.

 숙종∼명종 년간에 살았던 咸有一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舅(외삼촌)에게서 자랐다.146)≪高麗史≫권 99, 列傳 12, 咸有一.
본인 묘지에는 ‘舅’가 ‘母兄’ 즉 외삼촌으로 되어 있다(<咸有一墓誌>,≪朝鮮金石總覽≫上, 412쪽).
이 경우는 생질과 외삼촌 사이의 부양·동거 사실을 보여준다. 또 고려 후기의 인물인 李尊庇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그 외삼촌인 白文節에게 배웠다고 하였다.147)≪高麗史≫권 111, 列傳 24, 李嵒.
李仁成(李尊庇의 초명) 墓誌에 이존비가 죽고나서도 그 母는 생존해 있었음을 보면, 父가 죽고나서 이인성과 그 母는 함께 백문절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韓國金石文追補≫, 209쪽).
여기서 이존비는 외삼촌에게서 교육도 받았겠으나 양육되기도 했다고 보인다.

 姑母(夫)의 집에서 양육된 사례도 나타나는데, 고려 후기의 廉悌臣은 어려 서 고아가 되어 고모부인 元의 平章 末吉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148)≪高麗史≫권 111, 列傳 24, 廉悌臣. 역시 尹澤은 3세에 고아가 되어 고모부인 尹宣佐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는데,149)≪高麗史≫권 106, 列傳 19, 尹諧傳 附 澤. 고 모의 집에서 양육된 것으로 보인다. 姨母(夫)의 집에서 자라난 경우도 있는 데, 閔頔은 이모부인 前宰相 金頵의 집에서 양육되었고,150)≪高麗史≫권 108, 列傳 21, 閔宗儒 附 頔. 許珙은 처제의 딸 을 양육하였다.151)≪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珙.

 호적자료에서는<국보호적 5폭 1호>의 경우만 생질 남·여 2명을 포함하고 있지만, 형제나 자매가 대등하게 포함되고 있음을 보면, 많은 인원이 누락된 당시의 호적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는 많지는 않아도 생·질이 대등하게 포함되었을 것이다.

 위의 사례들에서는 방계혈족에 의한 부양·동거관계에 친삼촌·외삼촌·고모(부)·이모(부)가 나타나, 3촌 범위의 모든 계보의 친속들이 대등하게 관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들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사항은 실제의 가족과의 차이가 문제되는 호적자료들에서와 달리 실제의 동일 거주관계를 보여주는 사례 자료에서는 모두 고아가 된 질 및 생질과의 부양·동거관계라는 사실이다. 동기간의 동거 사례도 부모를 여읜 어린 동생이 누이에 의해 양육된 경우이다. 이는 양측적 친속관계에 따른 상호간의 유대·보호 관계가 작용하는 속에서도 당시의 실제 생활 단위는 일반적으로 형제·자매간의 분가에 의한 소가족적인 단위로 되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황수의 가족처럼 일부 소수의 대가족적인 단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앞에서 본 사례들이나 호적자료에서처럼 친삼촌·외삼촌·고모·이모 등이 대등한 관계를 갖는 것은 그것이 부계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가족은 일반적으로 소가족단위였다. 그리고 간혹 보다 확대된 범위의 친속간에 부양·동거관계가 이루어질 때는 부계적인 대가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측적 친속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것은 혼인과 관련하여 다음에서 보게 될 결혼한 자녀와 부모의 거주관계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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