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1) 가족과 혼인
  • (2) 혼인

(2) 혼인

 가족은 혼인과 출생에 의해 구성되므로 당시의 婚俗은 가족구성에 작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혼속에 대해서는 일찍이 민속상의「데릴사위」와 문헌사료에 보이는「男歸女家」·「壻留婦家」등을「率壻制」라는 하나의 계통으로 묶어 검토한 연구가 있었다.152)孫晋泰,<朝鮮の率壻婚俗に就いて>(≪史觀≫3, 1933).
―――,<朝鮮婚姻의 主要形態인 率壻婚俗考>(≪朝鮮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이 연구는 사회사 연구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사실에 대한 연구이었음에도 한국사 전공자들에게 주목되지 못했고, 타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보다 세부적 연구가 발표되었다.153)朴秉濠,<率壻婚俗에 由來하는 親族과 禁婚範圍>(≪法學≫4-2, 1962;≪韓國法制 史攷-近世의 法과 社會-≫, 法文社, 1974).
李光奎,<韓國家族의 史的 硏究≫(一志社, 1978).
崔在錫,<韓鷗家族制度史>(≪韓國文化史大系≫Ⅳ, 高麗大出版部, 1970).
朴惠仁,<壻留婦家婚俗의 變遷과 그 性格-朝鮮時代 家族制度變化를 중심으로->(≪民族文化硏究≫14, 1979).
―――,≪韓國의 傳統婚禮硏究-壻留婦家婚俗을 중심으로-≫(高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그 간의 연구에서는 용어의 사용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어 먼저 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 데릴사위·남귀여가를 기본적으로 같은 혼속의 계통으로 보고 솔서혼으로 이들을 묶어서 이해하는 견해이다.154)孫晋泰, 앞의 글(1948).
朴秉濠, 위의 글.
다른 하나의 견해는 ㉯ 데릴사위는 딸만 있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 동족에서 별도로 양자를 입적시키는 한편 사위를 맞이하여 그 노동력으로 家事를 협조케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과거 거의 누구나 다 거치게 되는 결혼 형식인 서류부가(남귀여가)와는 다른 것이며, 데릴사위만을 솔서라고 보는 견해이다.155)崔在錫, 앞의 글(1970).
朴惠仁, 앞의 글(1979).
또 다른 견해로는 ㉰ 데릴사위와 남귀여가를 ㉯ 에서처럼 구분하면서 남귀여가만을 솔서라고 보는 견해이다.156)李光奎, 앞의 글. 여기서 솔서란 ‘본가로 돌아오기 이전까지만 한정적으로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들에서 보면, 솔서라는 용어는 데릴사위나 남귀여가를 이해하기 위해 각기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어서,「솔서」에 대한 정의 자체만으로는 어느 한 견해의 타당성을 논할 수 없다. 문제는 각 견해에서 데릴사위와 남귀여가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한 점에서 ㉯ 가 입각하고 있는 데릴사위에 대한 민속상의 자료는 남부지역의 혼속에 국한된 것이어서 ㉮ 를 비판하기에는 불충분하다.

 ㉮ 의 연구는 용어에서도 데릴사위를 북부지역의 방언에 따라「대리사위」라 할 정도로 북부지역의 혼속에 실증적 검토의 비중을 두고 있다.157)‘대리사위’는 명천·경원·종성의 방언으로 조사되었고, 청진·부령·회령에서는 ‘대릿사위’라는 방언이 조사되었다(金泰均,≪咸北方言辭典≫1986). 한편 평안도 방언으로도 ‘대릿사우’가 조사되었다(金履浹,≪平北方言辭典≫1981). 그에서 조사된 북부지역의 혼속에서 대리사위는 아들이 있어도 행하여졌으며, 몇 명의 자녀를 낳은 후 처가에서 분가를 하거나 일생을 처가에서 살기도 하였다.158)이 북부지역의 혼속은 혼인 후 처가에서 상당 기간을 경과한 후 일부는 그대로 처가와 함께 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머무는 기간이 때로는 몇 명의 자녀를 낳을 정도로 길었다는 점에서, 1960년대까지도 경상도 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처가에서 1년 정도를 머문 후 夫家로 오는 ‘해묵이’ 관습(朴惠仁, 앞의 책, 1988)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는 서류부가의 혼속이 ‘반친영제’의 영향을 받아 이미 크게 변형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북부지역의 혼속은 無産 농민이나 화전민 등 하층민에서 조사되었으며, 조선 중기까지는 일반적이었던 남귀여가의 혼속이 그 후 지배층에서부터 半親迎制로 바뀌어 가서 당시에는 북부지방의 하층민에게만 남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 에 의하면 이 북부지역의「대리사위」는 조선 중기 이전의 혼속의 원형에 보다 가까운 것이며, 남부 지역의 그것은 본원은 같지만 이미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 의 견해를 비판하려면「데릴사위」에 대한 남부지역의 민속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북부지역을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각 지역 혼속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역사적 연계성에 대해서도 검토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 의 연구에서만 선구적으로 다루어졌다. 앞으로 보다 확대된 시각과 폭넓은 자료조사를 토대고 한 데릴사위 혼속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과제가 남아 있는「데릴사위」·「대리사위」라는 혼속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세부적인 정의를 유보해 둔다면, ㉯ 가 근거한 혼속의 사례가 제한적인 것이어서 ㉮ 에서 제시된「솔서」·「남귀여가」·「서류부가」등의 용어 사용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와 솔서혼은 그 전통이 조선 전기에까지 강하게 영향을 주었으니 다음에 보는 조선초 실록의 기사에서도 그것을 前朝 이래의 혼인 예법이라 하였다.

前朝의 舊俗에 혼인의 예법은 남자가 女家에 가서「男歸女家」자손을 낳으면 외가에서 자라므로, 외친의 은혜가 무거워서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服은 모두 30일의 暇를 주었다(≪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정월 갑인).

 위에 의하면「남귀여가」의 풍습으로 말미암아 고려시대에는 喪禮에서도 외조부모복과 처부모복이 중시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복제는 이미 고려 성종 4년(985)에 성립되었으며, 외조부모복은 친조부모복과 같은 齊衰 周年으로 되고 처부모복도 중국제도보다 높여 小功服으로 되었다.159)盧明鎬,<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韓國史硏究≫33, 1981).

 이러한 솔서혼은 고려 당시의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고려 중기 이 규보의 祭文에는 솔서혼에 의한 처가와 사위의 관계가 보다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① 옛날에는 親迎에 부인이 남편의 집으로 시집오므로 妻家에 의뢰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장가듦에 남자가 처가로 가니「男歸于女」, 무릇 자기의 필요한 것을 다 처가에 의거하여 장인·장모의 은혜가 자기 부모와 같습니다(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 祭外舅大府卿晉公文).

② 불초한 제가 외람되게도 일찍 사위가 되어 밥 한 술과 물 한 모금까지도 모두 장인에게 의지했습니다. 조금도 보답을 못했는데 벌써 돌아가시다니요(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7, 祭李紫微諒文).

 위의 자료들에서는「남귀여가」의 풍속과 그로 인해 사위가 처가에 의지해 살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위의 제문 중에서는 ‘옛날에는’ 남귀여가의 풍속이 없었다고 했는데, 이 귀절은 고려의 풍습에 대한 사료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유교경전에 나오는 親迎의 예법을 비교한 것이다.

 남귀여가 혼속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壻屋制에 연결시켜 이해하는 한편 그 거주형태도 母處-父處(妻處-夫妻)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160)孫晋泰, 앞의 글.
金斗憲,≪韓國家族制度硏究≫(서울大出版部, 1969), 384쪽.
李光奎, 앞의 책, 148∼150쪽.
종래 의 연구에서는 솔서혼과 서옥제 모두를 婚初에는 母處이나 일정 기간 후에는 父處로 거주를 옮겨 확정하는 母處-父處的인 거주규칙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 연구들의 친족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계 아니면 모계라는 제한된 틀 속에서 부계제도에 한정되어 제약을 받은 결과이니, 기존연구에서 조사된 자료와도 부합되지 않는다.

 「남귀여가」에 대한 실증적인 작업은 초기의 연구에서 이미 치밀하게 이루어져, 이미 솔서혼의 중요한 사실들을 조사해 놓았다.161)孫晋泰, 앞의 글(1948). 즉 북부지역의 혼속에서 사위가 일생을 처가에서 살기도 하고 혹은 그의 손자까지 생긴 뒤에도 처가의 가족으로 살지만 누구나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조선시대의≪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서 남귀여가의 혼속에 의해 처가(자식으로서는 외가)에서 영구적인 가족으로서 생활하여 내외족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 사료들을 들고 있다. 이러한 사료의 의미에 대해 초기의 연구에서도「남귀여가」의 의미는 일시적으로 처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영구적으로 女家의 가족으로 되는 것 같이도 해석된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당시의 친족조직을 부계 아니면 모계일 것으로 생각하고, 모계제도를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자료의 내용을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162)孫晋泰, 위의 글, 95쪽.

 근래의 연구에서도 처가 지역에서 살고 뒤에 그곳에 묘소까지 남긴 개인의 사례들을 조사하는 등 보다 세밀한 자료조사를 하였으나, 역시 남귀여가 혼속의 거주를 모처-부처제로 보는 데서 그쳤다.163)朴惠仁, 앞의 책, 177∼187쪽. 이는 초기 연구의 경우에서도 보이듯이 당시의 친족조직을 부계적인 개념에만 한정하여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증적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나듯이, 고려 및 조선 전기「남귀여가」혼속에 서의 거주는 모처-부처 또는 다른 어떤 하나의 형태로 고정시켜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사례들에서는 혼인 후 처가에서의 생활이 얼마간 지 난 후에 처가에서 처의 노부모를 봉양하며 계속 살게 되는 경우도 있고, 夫家로 옮겨 남편의 노부모를 봉양하며 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분가하여 처가나 부가의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 외가 지역 등 가까운 친속과의 연고지로 거주지를 정하는 경우, 그리고 그러한 연고가 없는 새로운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사료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잘 드러나며, 그 와 관련된 사료는 비교적 많이 발견된다. 그러한 거주형태는 당시의 재산상속의 형태와도 연결되는 것이니, 아들쪽만이 아니라 딸쪽으로도 대등한 상속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경제적 토대가 있는 쪽으로 다양한 거주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옥제와 솔서혼 사이에 역사적 연계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서옥제에서는 혼인 초기를 지나서는 남편쪽으로 가족의 거주가 정해지는 夫處(父處)制였다. 앞에서 본 제문들의 내용에서 보듯이 남귀여가혼에서는, 혼초에는 모든 생활을 처가에서 하며 “밥 한 술, 물 한 모금까지도” 모두 처가에서 해결하였지만, 혼초가 지난 후의 거주는 부처제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려시대에는 40∼50대의 사위들이 처부모와 동거하는 경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솔서혼 연구에 의하면 18세기경 이후 솔서제(남귀여가)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半迎親制가 확대되고 나서도 북부지역의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는 솔서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졌고, 때로는 사위와 종신토록 동거하는 경우도 있었다164)孫晋泰, 앞의 글(1948). 한다.

 솔서혼의 풍습은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에는 지배층과 하층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65)孫晋泰, 위의 글. 고려시대 하층민의 率壻戶의 실례로는 딸의 부부를 포함한 국보호적의「韓祐 戶」를 볼 수 있다. 한우 호의 경우 호주의 직역이「軍」으로 되어 있고166)韓祐의 직역에 대해 李基白, 앞의 책에서는 판독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許興植, 앞의 책, 44쪽에서는 ‘軍’으로 판독하였다. 다른 호들과 달리 호주와 戶妻의 4祖의 직역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호처의 4조가 파악되지 않는 것 등으로 보아 평민층 이하로 추정된다.

 이러한 딸 부부와의 동거는 의외로 고려시대의 전사회층에 걸쳐 광범위했 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자료는 그러한 면을 엿보게 해준다.

典儀副令 李穀이 원에 있을 때, 원의 御史臺에 말해 童女 구함을 파할 것을 청하였다. 그 일을 위해 고려조정을 대신하여 疏를 올리기를 … 고려의 풍속을 생각컨대 아들과는 함께 살지 않을지언정 딸은 집에서 내보내지 않으니, 秦 나라 때의 贅壻 제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무릇 부모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주관하는 일입니다(≪高麗史節要≫권 25, 충숙왕 후 4년 윤 12월).

 위에서는 노후의 봉양이 아들에 의한 것보다 딸 즉, 여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으로 진술되고 있다. 원나라의 동녀 요구를 막으려는 정치적 의도의 진술이므로 과장된 면이 개입될 수 있겠으나, 딸과 사위에 의한 봉양이 큰 비중을 가졌던 실정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곡의 진술처럼 아들보다 딸쪽에 편중된 동거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아들과 딸에 대한 재산의 균분상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적어도 양쪽의 비중은 대등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 때문에 고려에서는 사위와 처부모와의 관계 및 외손과 외조부와의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여 그것이 복제에까지 반영되고 있었다.

 처부모가 빈번히 노후를 딸 부부와 지내기도 하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한편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은「預壻」의 혼속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원종 12년 2월) 이 달에 脫朶兒가 며느리감을 구하는데 반드시 재상가문 출신이라야 된다 하니, 무릇 딸이 있는 자들은 두려워하여 다투어 먼저 사위를 들였다. 국가에서 재상 두·세 집을 기록하여 탈타아에게 택하게 하니, 姿色이 있는 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려 하였다. 김련의 집에서는 이미 預壻를 들여놓고 있었는데, 그 사위가 두려워하여 (처가에서) 나갔다. 당시 김련은 원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서는 돌아오기를 기다려 혼례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나라의 풍속이 나이가 어린 자를 (사위로) 들여서 집에서 양육하여 성년이 되기를 기다리니 그것을 예서라 한다(≪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2일).

 이 예서혼속의 기원을 후대의 민며느리 혼속에 견주어 남자의 집이 가난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위 자료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예서가 반드시 그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위의 자료에서는 예서혼속이 하층민들 사이에서 행해졌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특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유수한 상층 가문들에서도 행해졌던 것이 언급되고 있다. 당시의 계급내혼적 경향을 본다면 재상가문인 김련의 예서가 된 인물도 하층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預壻婚이 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당시의 혼속의 바탕인 솔서혼 이 행해지는 속에서 조혼이 이루어지면 바로 예서가 되는 것이다. 조혼의 계기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고려 후기에는 원의 동녀 요구를 피하기 위한 동기가 큰 비중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서혼에서는 혼초에 처가에서의 생활이 끝난 후에는 일단 분가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에는 처부모와의 동거는 아니라도 계속 처가쪽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고, 시댁쪽에서 생활을 하는 경우나, 새로운 지역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호적자료에는 부모나 처부모가 호주가 아닌 동거가족인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대부분 자녀의 가족이 분가한 후에 부양을 위한 동거가 이루어진 경우로 보인다.

 부모와의 동거·부양에서 결혼한 자녀가 대등한 비중을 가졌으므로 내외손이나 내외조부모 사이의 동거·부양에서도 같은 관계가 나타남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현전하는 호적자료에서는 호주의 친조부모나 외조부모가 동거하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호주의 부모나 처부모와의 동거는 호주의 자녀와의 관계에서 보면 친조부모나 외조부모와의 거주가 된다.167)외조부모와의 동거도 흔히 있었던 때문에 외조부모와 한가족을 이루는 것도 당시에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高麗史≫권 110, 列傳 23, 金倫 참조.

 고려시대 혼인형태에 대해서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병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일부일처제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168)전자에 해당하는 이해는 今村●,<朝鮮に於ける一夫多妻の存在について>(≪稻葉博士還曆記念滿鮮史論叢≫, 1938) 및 金斗憲,<朝鮮妾制史小考>(≪震檀學報≫11,1940;≪朝鮮家族制度硏究≫,乙酉文化社, 1949)를 비롯하여 그 후의 대부분의 연구들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후자에 해당하는 이해로는 張炳仁,<高麗時代 婚姻制에 대한 재검토>(≪韓國史硏究≫71, 1990)에서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적 계층별 차이, 妻妾制의 문제, 고려시대 중에서도 시기별 변화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국왕의 경우는 여러 명의 后妃를 두고 있어 다처제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국왕의 後嗣확보와 관련된 특수한 것이며, 당시의 일반적인 혼인 양태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배층의 경우에서도 여러 명의 처를 두는 이른바「多妻竝畜」이 행해지게 되어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고려 후기의 일이었다. 이러한 풍조는 충렬왕대에 다처제를 공식화하는 법제화가 시도되다가 중지되기도169)≪高麗史≫권 106, 列傳 19, 朴褕. 하면서 국가적으로 법제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묵인되는 형태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되어 공민왕 3년(1391)에는 왕비를 비롯한 왕실 및 문무 5·6품 이상의 처에 대한 봉작을 正妻를 원칙으로 하여 제정하면서 次妻는 그 아들이 봉작제의 해당 관인이 된 경우에「縣君」 이상에 봉하도록 하였다.170)≪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封贈.

 일부에서「다처병축」이 행해진 고려 후기에는 고려 지배층들이 元의 다처제적인 습속을 깊이 접하고 있었고, 고려의 전통적 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 아래서 충렬왕대에 다처제 논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고려사회 전래의 일부일처제 혼속에 따른 반발이 컸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 전기의 다처제 사례라고 알려진 것은 전란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거나, 재혼의 경우를 다처제로 오해하는 등 사료해석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171)張炳仁, 앞의 글. 고려시대에는 남녀 모두의 재혼이 별문제 없이 행하여졌는데, 사별 등으로 재혼함에 따라 한 인물의 처가 둘 이상이 된 것은 동시에 여러 명의 처를 두는 ‘多妻’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만 인종 원년(1123)의 고려사회에 대한 견문을 담은≪高麗圖經≫雜俗條에는 “富家에서는 3∼4인에 달하는 처를 둔다”고 하여 처제의 습속을 언급한 자료로서 주목되기도 한다.172)崔在錫,<家族制度>(≪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361쪽에서도 이 자료를 “다처 혹은 축첩의 습속을 더욱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일각에서 다처를 거느리는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것이 법제화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며, 그만큼 제한된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묘지명 등을 통해 나타나는 실례들에서도 전기의 경우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음이 확인된다.

 고려 전기에는 일부일처가 법제화된 일반적 혼인이었다 해도, 고려시대 전 체에 걸쳐 부유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사회 일각에서 蓄妾이 종종 행해지고 있었다. 첩에게는 正妻와는 달리 정식 혼인에 의한 법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고 있었으나 擅去·改家의 경우, 처보다 등급을 낮추어 처벌하는 법금이17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唐律을 참고하여 만들어져 있었다. 축첩제는 고려에서 법으로도 인정되었고, 고려 전시기에 걸쳐 지배층 경우 처와는 별도로 婢妾이나 妓妾 등의 첩을 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첩의 경우도 그와 관련된 서자의 문제가 법 제적으로까지 문제되는 것은 여말선초 이후의 일이었다. 다처병축의 사회적 풍조가 역시 여말선초의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서자의 문제가 이 때에 대두된 것은 그러한 다처와 축첩 풍조의 확산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혼인은 사회계층적 측면에서는 강한 계급내혼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노비의 경우 노비간의 혼인이 원칙이었으며, 양친간의 교혼이 이루어질 경우 그 자식도 노비신분으로 하는「一賤則賤」의 규정이174)洪承基,≪高麗貴族社會와 奴婢≫(一潮閣, 1983), 22쪽. 적용되는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일반 군현민과 차별되고 있었던 진·역·부곡 등 특수구역 주민과 군현민과의 혼인도 그와 유사하게 그 자식이 모두 특수구역민으로 귀속되는 제약이 수반되었다.175)≪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지배층에서도 고려 전·중기에는 대대로 호장이나 부호장을 배출하는 고위 향리층은 지방에서 상층의 계급내혼적 단위를 이루는 한편, 하위의 중앙 품관층과도 통혼하는 하나의 계급내혼적 단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대로 중앙의 고관을 배출하고 있었던 문벌층도 왕실을 포함하여 하나의 계급내혼적 단위를 형성하여 하위계층과의 혼인은 대개 회피하고 있었다.

 계급내혼을 벗어난 상하층간의 혼인이 법적 인정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급내혼은 사회적으로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는 혼인의 경향이었다. 하위 계층과의 혼인은 일반적으로 혼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비롯한 가까운 친속들에게 재산의 상속이나 제반 신분적 권리·의무면에서 중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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