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2) 재산의 상속

2) 재산의 상속

 고려시대의 상속 대상인 전토·노비 그 밖의 가산들 중에서 노비의 경우는 자녀간의 균분상속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176)이에 대해서는 旗田巍,<高麗時代の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女均分相續>(≪東洋文化≫ 22, 1957;≪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 出版局, 1972)에 제시된 이후 통설화되었다. 그 밖의 다른 가산들도 균분상속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전토의 상속에 대해서는 고려 후기 이후에도 조선초처럼 자녀간의 균분상속이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나, 고려 전·중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연구에서 제기된 것은 적장자 단독상속설이었다.177)旗田巍, 위의 글.
姜晋哲, 앞의 책, 426·428쪽.
이 嫡長子單獨相續說은 토지상속을 직접 다루지 않은 경우라도 고려시대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에서는 우선 토지 사유권의 발달이 고려 후기에나 있게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토지상속의 연구를 田丁連立에만 국한시켰다. 그리고 전정연립을 이해함에서도 부계친족집단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에서는 자녀균분상속설178)구체적인 논증을 통해 고려시대 사유지상속을 다루지는 않았으나, 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360∼361·369쪽에서는 적장자단독상속설은 국가의 수취 단위인 田丁의 상속을 사유지의 상속으로 잘못본 데서 오는 오해라고 하고, 토지(사유지)와 노비의 상속에 있어서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자녀균분상속제였다고 하였다. 그 후 토지의 자녀균분상속설은 여러 연구들에서 주장되었다.
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시대적 연변>(≪慶北地方古文書集成≫, 嶺南大 出版部, 1981).
崔在錫,<高麗朝에 있어서의 土地의 子女均分相續(≪韓國史硏究≫35, 1981).
―――,<高麗時代 父母田의 子女均分相續再論>(≪韓國史硏究≫44, 1984).
李羲權,<高麗의 財産相續形態에 관한 一考察>(≪韓國史硏究≫41, 1983).
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그간의 토지제도에 대한 연구의 진전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전정연립을 상속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民田만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당시의 토지상속의 한 면만을 검토하였고, 그와 관련된 법제의 해석 등에는 재검토를 필요로 하는 부분들도 있다.

 고려시대의 토지상속은 사유지인 민전의 상속과 수조지인 전정의 상속, 두 가지로 구성되고 있었다. 전정연립은 직역과 연계된 수조권의 승계로서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상속과는 다르지만, 그 속에 내포된 친족관계를 토대로 한 권리·의무의 승계는 당연히 상속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당시에 그 상속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는 소유권의 상속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179)盧明鎬,<高麗時代의 土地相續>(≪中央史論≫6, 中央大 1989).

 고려시대에 사유지를 비롯한 재산의 상속은 아들과 딸들에게 균분상속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시대의 상속 사례들에서는「財産」·「財」·「家業」·「全家産」 등을 자녀간에 균분상속한 것이 나타난다. 이러한 가의 재산을 포괄하는「재산」·「가산」등에는 당연히 토지(사유지)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는 기존연구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180)有井智德,<高麗朝にお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그것은 뒤에서 보게 될 예종 17년(1122) 判文에 언급되고 있는「文契」에 의해 상속되는 전토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산이 자녀들간에 균분된 실례로 다음의 사료를 보자.

충혜왕 4년에 尹宣佐는 微疾에 걸리자 자녀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요즈음 형제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은 다툴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라 하고 아들 粲에게 명하여 文契를 써서 家業을 균분하였다. 또 훈계하여 이르기를 ‘和하여 다투지 않는 것으로써 너희의 자손을 가르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09, 列傳 22, 尹宣佐).

 위에서 보면 윤선좌는 자녀를 불러 놓고 상속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한 문서인 문계를 써서 가업을 균분하도록 하고 있다.

 균분상속의 대상으로 자녀 중 딸이 실제로 상속받은 다른 예로는 孫抃이 판결해준 남매의 경우를 볼 수 있다.181)≪高麗史≫권 102, 列傳 15, 孫抃. 이들 남매간의 사건은 당시의 일반적인 상속관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우선 남동생이 누이에게「全家産」을 상속시키도록 한 선친의 문계에 따르지 않고 항변한 것이 官에 받아들여져 여러 해 송사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남동생이 자녀간 균분상속의 관례에 입각하여 권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속관례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균등한 것’이라는 손변의 말이나 가산을 中分하도록 한 판결 결과에서도 나타난다.182)旗田巍는 이 사례를 자녀간의 균분상속의 관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田土의 적장자 단독상속을 주장하면서 자녀간의 균분상속대상인 家産에는 전토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旗田巍, 앞의 글, 1957). 崔在錫은 전토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崔在錫, 앞의 글, 1984).

 딸쪽에 토지가 상속된 실례로는 이승휴의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는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로 생업의 토대를 삼았다.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사실은 그 상속된 토지가 있는 외가쪽의 지방으로 이승휴가 거주지를 결정하였다는 점이다. 전토를 보유하는 층의 절대 다수였던 중소규모의 전토 보유자들의 경우, 전토가 있는 곳에서 거주하게 됨이 일반적이었을 것이고, 자녀균분상속으로 처가나 외가로부터의 전토의 상속이 큰 비중을 가졌기 때문에 거주지의 결정에도 이러한 상속은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의 사유지의 자녀간 균분상속은 다음과 같은 고려시대의 규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종 17년(1122)에 判하기를 무릇 父祖田으로서 文契가 없는 것은 嫡長을 爲先하여 決給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訴訟).

 위의 예문은 정종 12년(1046)의 전정연립에 대한 판문과 연결되는 전정연립에 대한 규정으로서 완화된 적장자상속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183)旗田巍, 위의 글.
武田幸男,<高麗田丁の再檢討>(≪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이 판문은 그 내용이 전정연립에 관한 것이라고 보기가 어려운데, 그러한 해석이 이루어진 것은 고려시대의 토지사유제의 발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전제로 하여 사유지 상속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토지사유제의 발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된 바로, 그 사유지의 상속이 하층민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계층들 속에서 행하여졌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위 판문은 바로 이러한 사유지의 상속에 관한 규정이다. 그 상속은 일차적으로 피상속자와 상속자 사이의 사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이 판문은 그러한 사적 결정이 피상속자의 생전에 미처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분쟁이 발생할 경우의 상속에 대한 국가의 판결원칙이다.

 전정연립은 전정 상속만이 아니라 직역과 연계된 것임에 비하여, 이 판문에서의 상속은 직역과 관계없는 전토 자체의 상속이며, 그 때문에 일차적으로 국가적 제반 규제를 받는 전정연립과 달리 사적 결정이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것이다. 여기서의 문계는 그러한 상속상의 사적 결정을 법적 효력을 갖는 문서로 만든 分財記類이며, 위의 판문은 분재기류인 문계가 없는 경우의 상속상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보충적 규정이다. 위 규정의 그러한 보충적 성격은 당시에 사적 결정을 기록한 문계에 의한 토지의 상속이 그만큼 광범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문계에 의한 토지 상속의 기원은 사적 토지소유 관계나 토지에 대한 권리들이 문서화되기 시작한 시기로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신라 말기에는 토지의 매매와 소유관계를 문서화한 田券이 작성되었는 데,184)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史學雜誌≫, 1970 ; 앞의 책, 1972). 토지상속 문계의 출현도 전권의 출현에 수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 규정에 대해서는「父祖田」을「田丁」을 포함하는 토지로 보고, 문계가 있는 경우에는 적장이 아니더라도 상속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적장우선주의 상속원칙에서 나온 것으로서 문계가 없으면 적장에게만 전토를 상속시키라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었다.185)旗田巍, 앞의 글(1957).
武田幸男,<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社會經濟史學≫33-5, 1967).
그러나 만일 그 내용이 그런 것이라면「爲先」이라는 부분은 불필요한 구절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잘 파악되지 않는다.

 위 규정에 대해 비교적 본래의 의미에 가까운 해석에 의하면,「부조전」은 민전이며 부조로부터 자손에게 전급된 토지였다. 그리고 “적장자에게만 전급 하고 다른 자손에게는 전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적장자손에게 유리하게 전급하지만 다른 자손에게도 전급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186)有井智德, 앞의 글, 56∼59쪽. 그런데「적장에게 보다 유리하게 전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위의 ‘적장을 위선하여 결급한다’는 의미는 전토의 상속이 이루어지는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토 등의 부동산은 대개 상속할 몫을 배분할 때 아무리 균분하려 해도 화폐나 곡식처럼 완전히 균등한 분할은 불가능한 것이다. 한 곳의 전토를 분할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몇 필지의 다양한 크기의 전토들을 상속자들에게 할당하게 되므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187)고려시대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우나, 여러 곳의 田土들이 상속자들에게 할당되는 실례는 전토의 균분상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조선 전기의 分財記類에서 볼 수 있다. 당시의 분재기류에서는 형제·자매가 여러 필지로 나뉘어 있는 크고 작은 田畓들을 각 필지를 단위로 할당받는 식으로 되어 있다. 한 예로 중종 5년<李繼陽妻金氏許與文記>(李樹健, 앞의 책, 137∼138쪽) 참조. 그리고 때로는 전토가 너무 소규모이어서 분할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게 된다.

 따라서 전토의 상속에는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많으므로, 균분을 원칙으로 하더라도 부모의 생존시에 구체적인 몫을 할당하여 문계로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에 나온 윤선좌의 경우 형제간에 다툼이 많은 당시의 세태를 말하면서 다툴 거리를 없애기 위해 자녀를 불러 놓고「문계」로서 가업의 균분을 문서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임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문계가 없으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은 균분의 원칙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몫을 할당할 때 분쟁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분쟁에 대한 판결의 원칙이 규정될 필요가 있게 된다. 위의 판문은 바로 그 원칙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내용을 보여주니, 위 판문이 刑法志 訴訟條의 한 규정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러한 자료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위 판문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규정도 소송관계의 규정들이 많은≪經國大典≫刑典에 들어 있고, 그 자체가 상속상의 분쟁이 있을 경우의 판결 원칙이었다. 위 판문은 앞에서 본 토지를 포함한 재산의 상속에서 자녀간의 균분원칙과 상충·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실행을 위한 보충적인 규정이다.

 위 규정에서「嫡長」을「嫡長子」로 해석하는 것은 자료를 있는 그대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구를 임의로 첨가함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달라지게 하는 것이다.「적장」을 자구 그대로 해석하면, 嫡은 庶와 衆에 대한 적통 즉, 庶子 또는 衆子 등에 대한 嫡子 등을 의미하는 것이나, 長은 年長 즉 幼에 대한 長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嫡長爲先決給」이란 (여러 자손들 중에서) “적통과 연장을 先으로 하여 (먼저) 결정하여 주도록 하라”로 해석된다. 이는 적장자에게만 단독 상속시킨다거나 또는 그만을 우대한다는 의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균분의 원칙에 의해 분할되었을지라도 구체적인 몫의 할당에서는 嫡子로부터 衆子 또는 庶子 등의 순서로 그리고 연장자로부터 연하자의 순서로 그 몫을 결정하도록 한 규정이다. 따라서 이는 적장자 단독상속과 연결되는 규정이 아니라, 부조전의 균분상속 원칙과 연결되어 그를 보충해 주는 규정이다.188)盧明鎬, 앞의 글(1989).

 위의 규정과 같은 원칙은 고려시대의 친족관습을 크게 물려받고 있었고, 전지의 자녀 균분상속이 행하여지고 있었던 조선 전기의≪경국대전≫에서도 발견된다.

부모의 생전에 나누지 않은 노비는 자녀의 생몰과 관계없이 나누어 준다.〔자녀가 죽은 경우, 그 자손이 없는 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나누기에 부족한 경우에는 嫡子女에게 우선 균급하고, 남는 경우에는 承重子에게 우선 주며, 또 남는 경우에는 長幼의 次序로 준다. 嫡妻에게 자녀가 없으면 良妾子女에게, 양첩자녀도 없으면 賤妾子女에게 그와 같이 한다〔田地도 위와 같다〕(≪經國大典≫권 5, 刑典 私賤).

 위는 끝 부분의 세주(〔 〕로 표시)에 명시된 바와 같이 전토의 상속에도 적용되는 규정으로서, 앞에 나온 고려 예종대의 판문과 서로 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양자는 모두 부모의 생존시에 배분되지 않음으로써 문제가 되는 전토의 상속을 국가가 판결해 주는 원칙을 규정한 것이다. 둘째, 양자 모두는 嫡과 長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으로 배분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위의≪경국대전≫규정 중에서도 균분을 원칙으로 하지만 배분에서의 차이가 불가피할 경우에는 예종대의 판문에서와 마찬가지로 庶子女에 대한 嫡子女, 衆子에 대한 承重子를 우선으로 하는「嫡」 우선의 원칙과「幼」에 대한「長」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 즉 적·장 우선의 원칙에 의해 균분되지 않는 부분을 배분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 사유지(민전)의 상속은 전정의 상속과 달리 피상속자나 상속자간 의 사적 결정에 의해 문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속은 자녀간의 균분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토지의 상속은 균분의 원칙에 의해 분할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차이가 발생할 수 있어서, 그에 따른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종 17년에는 균분을 원칙으로 하되 균분되지 않는 부분은 중자녀·서자녀에 대한 적자녀 우선과「유」에 대한「장」우선의 원칙에 의해 배분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지 상속에 대한 보조적 기능을 갖는 법제는 그 후≪경국대전≫에도 그 원칙이 계승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관습을 반영하는 사료들이나 개별적 사례자료들, 그리고 국가의 규정들을 통해 확인되는 균분상속은 소가족적인 단위에 의한 토지소유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사회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뒤에서 보게 될 전정이 기본적으로 소가족단위에 의해 보유·상속되고 있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토지의 자녀간 균분상속은 토지가 혈족집단에 의해 보유·상속되고 있었다는 것의 전제가 된 토지의 적장자 단 독상속설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민전의 상속과는 구별되지만, 부의 연구들에서 고려시대의 토지 상속의 주 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던 것은 田丁의 상속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전정연 립이었는데, 그와 같은 계열로서는 功蔭田 상속, 收租地로서의 功臣田 상속 등이 있다. 이들 세 부류의 상속은 ① 원초적으로 국가제도에 의해 지급·보유된 토지에 대한 권리의 상속이라는 점, ② 그 상속자의 결정과 분할상속 또는 단독상속 등의 방식에 국가가 깊이 개입·규정하고 있다는 점, ③ 직역 봉사 또는 공로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대가 또는 포상적 은전으로 지급되어 특수한 신분적 부류들에게만 보유 및 상속되었다는 점, ④ 그 대상토지가 국가에 의해 수취단위로 편성된 전정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고, 민전의 상속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세 부류의 전정상속은 서로 다른 점도 있어, 그 중에서 가장 광범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정연립부터 보기로 하겠다.

 전정의 지급은 수조권의 지급으로 해석되므로, 전정연립은 토지소유권의 상속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토지사유가 근대적인 토지사유처럼 철저히 전면적이지 못하여, 전정을 지급받은 자가 田主로 이해되고 그 전토의 실제 소유자는 佃客으로 간주된 사실에서 보면,189)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李成茂, 앞의 책(1980).
지급된 전정의 보유는 전근대적인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보유와 병존한 또 다른 토지보유의 한 형태였음이 잘 부각된다. 또한 전정연립의 대상토지는 연립할 친속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대를 거듭하여 배타적인 상속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고 있었다. 그 결과 연립 대상 토지인 軍人田·外役田·兩班科田 등은 연립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승되는 공음전과 함께 世傳되며 永業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190)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武田幸男, 앞의 글(1967).
李成茂, 위의 책.
영업전에 해당하는 지목으로 李佑成은 양반공음전·군인전·외역전을 들었으나 여기에 양반전도 포함시키는 武田幸男·李成茂의 해석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口分田의 지급규정 등에서 보듯이 전정연립에서는 직역과 연계된 상속권자가 없는 경우 토지에 대한 권리의 승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러한 경우 처 나 출가하지 않은 딸의 경제적 대책을 위해 구분전이 수여된 것이다. 즉 전 정연립은 민전과는 달리 직역과 연계된 토지에 대한 권리의 상속이고, 그에 따른 몇 가지 세부적 성격이 존재하였다.191)전시과의 전정 분급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으나, 전정연립이 분급된 전정에 대한 직역과 연계된 권리·의무의 승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적장자 단독상속 설 등에서 전정연립만을 토지상속의 전부인 것으로 간주한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성격이 있다고 해서 전정연립을 상속의 범주에서 제외하려는 이해도 타당하지 않다. 친족관계를 토대로 한 권리와 의무의 승계라는 점에서 전정연립도 당연히 상속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토지소유 상황과 다른 당시의 토지보유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정연립을 토지상속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은 당시의 토지보유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결함을 갖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전정연립의 상속권자에 대한 주요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정종 12년에 判하기를 諸田丁의 연립은 嫡子가 없으면 嫡孫으로, 적손이 없으면 同母弟로, 동모제가 없으면 庶孫으로, 男孫이 없으면 女孫으로 한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위에서는 연립의 대상으로 적자-적손-(적자)동모제-庶孫-女孫(외손)의 순서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의 직계(lineal)후손 범위는 그 후 언제부터인가 女壻도 첨가된 보다 넓은 범위의 내외친속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예종 4년(1109)의 판문에서는 포괄적인 범위인 ‘內外族親’의 전지를 神步班에 속한 백정이 승계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192)≪高麗史≫ 권 81, 志 35, 兵 1, 兵制 예종 4년 判. 인종대 자료에서는 妻의 養父의 전정 을「遞(立?)」또는「遞(受?)」한 사례가 나타나기도 한다.193)<喬桐縣君高氏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156쪽)에서 ‘遆’라고 판독된 것은 ‘遞’의 異字로 보인다. 養女壻에 의한 전정체립은 당연히 사위도 체립대상에 들어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전정연립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는 공통적으로 非單系的 상속이 나타난다는 점이다.「외손」,「內外族親의 田地」,「女壻」,「養女壻」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위 자료들의 개략적인 내용을 파악하더라도, 정종 12년 판문에 입각 한 이른바 적장자 단독상속설은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적장자 단독상속설에서는 사유권이 미발달된 상태에서 부계 혈족집단에 의한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토지소유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소유관계를 국가에서 파악하기 위한 법제적 수단으로 적장자 단독 명의에 의한 승계로써 토지소유 관계를 표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의 중심적인 자료가 된 위의 전정연립 규정에 대한 이해부터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전정연립 규정에서 우선 주목되어야 할 사항은 전정의 연립이 내·외족을 포함한 직계혈족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정연립이 직역과 관계되어 있으므로 딸이 그 대상에서 빠진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 구성은 적자-적손-(적자)동모제-서손-여손(외손)의 순서로 승계를 규정하고 있다.194)정종 12년 判文의 田丁連立 대상 친속들에게는 누락이 추정되기도 하였다(旗田巍, 앞의 글, 1957 및 武田幸男, 앞의 글, 1971).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직계자손 중에 여손 즉 외손이 승계권자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부계혈족집단이 존재하여 그에 의한 집단적 소유상태 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전정의 보유자에게 아들이나 男孫이 없을 경우 전정은 그 보유자의 형제나 姪 또는 從孫(형제의 손) 등 방계의(collateral) 부계혈족에게 승계되어야 한다. 그와 달리 외손에게 승계된다는 것은 부계로는 다른 혈통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결혼한 형제간으로 이루어지는 최소의 집단일지라도 부계집단에 의해 집단적으로 전정이 보유되고 있었다면 그와 양립될 수 없는 일이다.195)李佑成, 앞의 글(1975).
盧明鎬, 앞의 글(1989).

 전정의 보유가 혈족공동체에 의한 보유가 아니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예종 4년의 신보반 소속 백정에 대한 조치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군인전으로 보이는 내외족친의 전지는 그 전토를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는 집단내에서가 아니라 그 전토의 보유와는 분리되어 있는 백정에 의해 승계되고 있다. 이는 전정의 보유가 집단적인 소유관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소가족단위의 개별적 보유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외족과 마찬가지로 사위에 의한 전정연립 역시 부계혈족집단에 의한 집단적 소유가 존재했다면 다른 부계집단으로 넘어가는 것이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문종 34년(1080)의 판문에서 적에게 항복한 軍·將들의 田은 친자의 연립 자격을 박탈하고 역을 감당할 만한 친척에게 주도록 한 처벌조치도 주목된다.19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柴科. 이러한 처벌이 성립되는 것은 전정을 보유하는 경제적 생활단위가 일반적으로 부모와 친자를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자 대신 일차적으로 연립의 연고권을 부여하고 있는 친척의 경우는 국가에서 영업전적 속성을 존중하는 관계로 연립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들은 소가족적인 단위가 일반적인 당시에 별도의 가족단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전정을 연립함으로써 항복한 군장의 소가족적인 단위에 대한 경제적 처벌이 이루어졌던 것이라 이해된다.

 이상으로 볼 때, 전정은 혈족집단에 의해 소유된 것이 아니라 직역을 승계 한 자 개인에게 상속 및 보유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종 12년 판문에 열 거된 것은 어떤 집단적 소유의 대표적 존재들이 아니라 개인적 상속권자들의 우선 순위를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개인별 승계권의 순서를 규정해 놓는 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직역수행자를 확보하기 위해,197)정종 12년 판문과 동일한 승계 순서를 보이는 ≪高麗史節要≫ 권 4, 정종 12년 2월 制의 立嗣 규정의 내용도 개인별 승계권의 순서를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상속자의 입장에서는 개인별 상속권의 순위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전정연립은 개인에 의한 상속이었고, 이를 토대로 경제적 생활단위를 이루 는 것도 소가족적인 가족범위가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분전 제도에서는 전정의 보유자가 연립할 직계자손이 없이 죽음으로써 전정이 회수될 경우 생계보호를 위해 구분전을 지급하는 대상으로 처를, 처가 없는 경우는 출가하지 않은 딸만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전정을 보유하여 경제적 생활단위를 이루는 가족범위가 전정보유자 본인과 처 그리고 미혼인 딸과 아들을 기본 단위로 고려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들에게 전정연립이 이루어질 경우 구분전의 지급이 없음은 노부모나 미혼 형제자매가 부양가족으로 고려된 것이다.

 아들 이외의 친속에게 전정연립이 이루어질 경우에도 구분전의 지급은 없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부양가족으로 고려되는 범위들이 있게 된다. 예컨대 여서에 의해 전정연립이 이루어질 경우는 처부모나 처의 미혼 형제자매가 당연한 부양가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친손자나 외손자에 의해 전정연립이 이루어질 경우는 조부모나 외조부모가 그에 해당된다. 전정연립과 관련하여 경제적 생활단위로 나타나는 이러한 가족범위는 앞 절에서 살펴본 고려시대의 가족구성과 부합되는 것이다. 즉 夫·妻와 미혼 자녀를 기본 단위로 하고, 부·처의 노부모나 미혼 형제자매, 내외조부모 등이 부양가족으로 포함되기도 하는 가족구성을 볼 수 있다.

 전정이 소가족 단위의 경제를 바탕으로 개인별로 상속되고 있었듯이 공음전이나 공신전의 상속도 마찬가지였다. 공음전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이설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상속과 관련된 면에 국한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현종 12년(1021) 판문의 “공음전은 直子가 죄를 범하면 그 孫에게 移給한다”고 한 것에서19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功蔭田柴. 공음전의 우선적인 승계자가 직자와 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종 27년(1073)의 판문에서는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女壻·親姪·養子·義子를 상속권자로 규정하였다.199)위와 같음. 이 친속들의 열거된 순서는 공음전 상속의 우선순위일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속순위의 존재는 다음에서 보는 공음전의 지급 규모와도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종 3년 5월에 兩班功蔭田柴法을 정하였다. 1품 門下侍郎平章事 이상은 田 25結과 柴 15결, 2품 參政 이상은 전 22결과 시 10결, 3품은 전 20결과 시 10결, 4품은 전 17결과 시 8결, 5품은 전 15결과 시 5결을 자손에게 전하게 하되, 散官은 5결씩을 감하고, 樂·工·賤口로서 放良된 員吏에게는 모두 줄 수 없게 하였다. 功蔭田을 받은 자의 자손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거나 모반·대역에 연좌된 경우 및 공사의 여러 가지 죄를 범하여 除名되는 외에는 비록 아들이 죄가 있어도 그 손자가 죄가 없다면 공음전시의 1/3을 주게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功蔭田柴).

 위에서 공음전의 지급규모를 보면 품에 따라 田 25∼15결·柴地 15∼5결이고, 散官은 이에서 다시 5결을 감하였다. 이러한 액수는 대체로 당시의 토지 편제 단위인 1足丁·半丁 단위들을 크게 초과하지 않은 것이니, 그 편제단위를 깰 수 없게 한 당시의 토지정책의 원칙에 의하면 1인의 친속에게 상속될 정도의 규모이었다.

 문종 27년의 판문에서 사위는 아들이 없을 경우 다음 순위로 되어 있지만, 친조카·양자·의자보다 앞서고 있다. 양자의 경우는 순위가 사위와 친조카 다음이니, 특히 사위보다도 양자가 중요시되지 않은 것은 역시 부계친족집단 단위의 토지보유와는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공음전의 상속자는 앞에서 본 전정연립의 직계혈족 중심의 상속자 설정과 다른 점이 나타난다. 즉 전정연립에서 볼 수 없었던 친조카·양자·의자 등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주로 6품 이하를 위한 구분전제와 연계되어 공음전이 구분전을 지급하지 않는 5품 이상 고위 관인의 처 등의 생계를 보호한다는 목적도 가진 때문이 아닌가 한다.200)문종 3년의 兩班功蔭田柴法의「品」을 관품이 아닌 공훈의 등급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문종년간의 규정에서 보면 전정 보유자가 연립할 자손이 없는 경우 구분전의 지급은 6품 이하의 처나 퇴역한 군인 본인에게 국한되었다. 구분전 액수의 배 이상이었던 공음전은 일차적으로 직계자손에게도 경제적 기반이 되는 것이겠으나, 5품 이상의 처나 그 가족은 부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직계자손이 없어도 사위나 친조카·양자·의자 등 봉양을 수행할 수 있는 자들에게 공음전을 주게 되어 있었다. 아들도, 사위도 없는 경우는 드물었을 것이나 친조카·양자·의자에까지 범위를 확대시켰으므로 공음전의 상속자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분전의 지급대상에 5품 이상 고위관인의 처가 포함되지 않은 문제가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5품 이상에서도 夫妻가 아들 없이 모두 죽은 경우, 미혼의 딸에게 구분전이 지급된 것은 父의 친조카·양자·의자 등의 부양을 받게 하는 것보다는 본인에게 구분전을 지급하는 것이 낫다고 배려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공음전과 유사한 종목의 토지이나 공신에게 하사되었다는 특별한 동기와 내용을 갖는 공신전의 경우는 공음전과도 달리 균분의 원칙에 따라 자손에게 傳給되는 경우가 있었다.20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功蔭田柴 충숙왕 5년 5월. 공신전은「山川爲表」로 언급될 정도의 대규모도 있었던 만큼 그 규모가 공음전시에 비해 대규모였으니, 균분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전의 경우도 족정·반정의 토지편제 단위를 지키는 한에서만 균급하라는 단서가 있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下敎하기를 ‘功臣의 田으로 ㉮ 자손이 微劣하여 孫外의 사람이 占取한 것은 연한에 관계없이 그 孫에게 환급할 것이며, ㉯ 同宗 중에 1戶가 合執한 것은 그 足丁 및 半丁을 가려 均給하도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功蔭田柴 충렬왕 24년 정월).

 공신전의 상속자로「자손」이나「同宗」이 언급되고 있어, 부계자손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동종」의 의미는 그같은 중국식의 의미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한 선조로부터 계보의 중간에 남녀가 다양하게 개재되는 계보들로 연결되는 직계의 후손들을「宗」으로 지칭하기도 했으며, 공신의「자손」에 대한 음서도 실제로 내외 후손에 대한 음서를 의미한 경우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앞에서 사유지인 민전의 경우 자녀균분상속이 나타나고, 전정의 연립에도 외손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음전의 상속에도 사위가 들어가므로, 공신전의 상속만이 부계후손만에 국한된다고 볼 수도 없다. 따라서 위 충선왕 즉위년에 내린 왕명에서 공신전의 상속도 자녀간의 균분을 원칙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민전을 비롯한 사유재산의 상속은 자녀간의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민전과 달리 수조권을 갖는 전정의 상속은 국가적 제도와 결합된 의무나 규제들이 수반됨으로써 민전 상속과는 달랐으나, 그 기초가 된 친족관계는 공통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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