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3) 친족조직
  • (3) 촌수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

(3) 촌수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

 고려시대 친족제도의 중요한 특성의 또 하나는 寸數제도에서 나타난다. 촌수제도는 우리 나라에 특유한 고유의 제도로서 중국이나 일본 등에도 없는 제 도이다.219)金斗憲, 앞의 책 (1949), 214∼216쪽.
仁井田陞,<高麗の親等制と中國法>(≪中國法制史硏究≫, 1959).
고려시대의 촌수제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憲司請禁 外家四寸通婚”(≪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奸非 충렬왕 34년 윤 11월).
「촌수」란「나」를 기준으로「나」와 어떤 친속 사이의 친족관계의 친소 정도를 나타내는 방식이고, 또한 계보의 중간에 형제자매관계가 들어가 갈리어진 방계의 친속간에는「촌수」가 친족호칭에 쓰이기도 한다. 촌수는 계 보관계에서 부모와 자녀관계의 계보를 1촌의 단위로 삼아 그러한 단위의 수 를 누산하여 3촌·4촌 등과 같이「∼촌」이라 하게 되며, 방계혈족과의 촌수 는「나」와 그 친속의 선대의 직계 계보가 만나는 데까지의 촌수를 합하여 얻는다. 이러한 촌수제도는「나」를 기준으로「나」와 여러 친속들과의 친족관계의 원근을 정확히 생물학적 혈통관계의 원근에 따라 파악하고 분류하는 제도이다.

 「나」를 기준으로 성립되는 친족관계(ego oriented kinship)는「親屬(kindred)」이라 불리는 친족관계이다. 이「나」를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는 조상을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ancestor oriented kinship)와 구성이나 기능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조상을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는 씨족이나 리니지 등과 같이 어느 한 조상을 기준으로 일정한 규칙에 의해 정해지는 그 후손의 집단을 토대로 한다. 이에서는 개인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며, 그 성원 개인들이 속하는 친족집단은 한 성원으로서의「나」의 존재여부에 관계없이 일정한 범주를 가지며 지속적으로 집단적 기능을 한다.

 한편 親屬으로도 불리우는「나」를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는「나」와 일정한 계보관계에 있는 개인과의 개인적 관계를 토대로 한다.「나」와 그러한 개인 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쌍방관계로서의 권리·의무가 존재하며,「나」와 그러한 관계를 갖는 개인들의 범주는 각 개인마다 달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주들은「나」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되며, 지속적인 집단적 기능을 갖기가 어렵다.

 <그림 1>·<그림 2>에서는 한 개인의 직계선조들을 나타내는 계보들을 볼 수 있고,<그림 3>에서는 한 개인의 후손들을 나타내는 계보들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한 개인「나」의 직계선조들과 후손들로 인지되는 계보 형태들을 동시에 나타내는 계보도를 작성하면,<그림 4>와 같이 상하로 퍼져나가는 방사선 형태가 된다. 그 계보들은 촌수 와 함께 고려하면「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들이 그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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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양측적 친속의 직계계보와 촌수
<그림 4>양측적 친속의 직계계보와 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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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부터 멀리 확대된 동심원의 범위일수록「나」와의 관계는 멀어진다. 이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직계의 혈족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여기에 표시된 남·여 선조들의 일정 범위의 형제·자매와 그의 후손들도 그 개인과 방계의 혈연관계를 갖는다.

 고려시대의 계보관계를 나타낸<그림 4>의 계보형태는 그 자체가「나」를 기준으로 성립되고 있는 친족관계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친족관계는 각 개인을 기준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그 친족관계의 범주들은 개인마다 달라진다. 이를테면<그림 4>에서「나」와 가장 가까운 부나 모의 친속이라 하더라도「나」의 친속들과 다르게 된다.

 씨족이나 리니지같은 조상을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와「나」를 기준으로 한 친족관계인 친속은 한 사회내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며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가까운 예로 중국과 같은 경우의 친속은 부계의 성씨별 씨족 내지는 리니지조직과 공존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계의 계보관념에 의한 친족조직과 공존한 중국의 친속체계는 양측적 계보관념이 존재한 고려에서의 친속체계와 대단히 큰 차이를 가졌다.

 중국의 친속은 우선 부계 위주의 편향성이 대단히 컸다. 또한 친속을 구분하는 체계도 조상을 기준으로 방계별로 구분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어「從-」·「再從-」·「三從-」등의 접두어를 형제·자매·질 등의 기본 친족호칭에 붙여 구분하였다. 이는 중국의 친속이「나」를 기준으로 하면서도 성씨집단과 같은 부계의 조상을 기준으로 한 친족체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려에서는 친속관계가 부변·모변의 양측적 계보들에 대등한 비중으로 존재하였다. 고려 고유의 제도인「촌수」는 철저히「나」를 기준으로 원근관계가 정해지는 친속관계였다.「宗」·「族」·「孫」·「姪」등 중국에서는 부계의 친족들에게만 쓰이는 한자어 친족용어들이 고려시대에 작성된 문장에서는 종종 외족 등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 양측적 계보의 친속들에 그대로 쓰이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이는 양측적 계보관념에 따라 성별로 계보를 한정하지 않은 당시의 고유어 친족용어들을 우리말이 아닌 한문으로 기록할 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친속이 이처럼 양측적 계보에 입각하여 철저히「나」를 기준으로 성립됨으로써 중국의 친속과 현저히 달랐던 것은 정치·사회적 제반 중국제도가 고려에 도입되면서 철저히 재구성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에 「나」를 기준으로 성립되는 친속관계의 작용상태를 실례를 통해서 보면, 한자식 친족 호칭을 사용한 제도에서도 중국과 달리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 계보에 촌수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로써 우선≪고려사≫의 凡蔭敍條에서 보면 전·현직 고관인「나」를 중심으로「나」에 의해 음서를 받게 되는 承蔭親屬들이 열거되고 있다. 이 승음친속관계를 기초로「나」에게 음서를 받게 해 줄 수 있는 托蔭친속을 파악해 볼 수도 있는데, 이들 두 범위를 나타내 보면 다음의<그림 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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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고려 전·현직 고관 托蔭·承蔭 친속의 범위
<그림 5> 고려 전·현직 고관 托蔭·承蔭 친속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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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음서조의 자료들에서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 계보에 촌수의 원리가 작용하는 면은, 우선 가장 일차적인 음서의 대상이 子(直子)였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의 음서 대상은-친족호칭으로서의 1촌, 2촌 등의 표현은 쓰지 않으나-촌수의 계산에서 1촌간에 해당하는 子를 최우선으로 출발하여 확대될 경우 대체적인 경향은 2촌간에 해당하는 內孫과 外孫, 3촌간인 질과 甥의 순으로 확대되고 있었다.220)위의 범음서조에서 弟는 현종 5년 敎에서만 포함되었고, 그 후의 자료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壻와 收養子도 들어가 있었으나 이들은 촌수로 나타낼 대상은 아니다. 또한 양자제는 고려에서는 실제로는 극히 적게 행해진 것이어서 敎令이나 判文에 수양자가 음서의 대상으로 들어가 있다 해도 그 실제성은 적다.

 단 친족관계를 성립시키는 계보관계가 성별로 한정되지 않는 양측적인 것이었다는 사실과 그 사회의 성별 사회적 역할의 문제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자와 여는 자녀 균분상속제에 의해 재산상속에서는 대등하게 일차적인 상속자가 되는「나」의 가장 가까운 친속이지만, 女는 관직을 가질 수 없으므로 음서의 대상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다음의 2촌간에 해당하는 계보에서도 마찬가지로 내외손녀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내·외손이 함께 들어가있다. 妹가 해당되지 않고 弟가 들어간 경우도 그렇다. 3촌간에서도 내외의 친속들을 아우르는 범위가 되며, 단지 음서 대상이 아닌 여성들만이 빠진다. 여기서 여성이 관직의 대상이 아니라는 당시의 성별 사회적 역할을 고려하면, 계보관계는 성별이 한정되지 않았음이 잘 나타나며, 또한 동시에 촌수의 원리가 작용하는 면도 잘 드러난다.

 그러한 촌수의 원리가 작용하는 면은 위와 같은 3촌 이내의 범위보다 확대된 경우에도 나타난다.≪고려사≫의 凡敍功臣子孫條와 凡敍祖宗苗裔條의 보다 확대된 범위의 음서가 그 예이다. 이에서도 계보를 성별로 한정하지 않는 내외의 후손들을 음서의 대상으로 하되, 가까운 후손을 우선으로 하고 음서범위가 확대될 경우 보다 먼 후손에까지 음서가 시행되었다. 앞에서 본 고종 40년(1253) 공신자손음서에서도 代代配享功臣, 三韓後壁上功臣, 祖代六功臣과 삼한공신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그 음서대상 내외자손들을 한 세대씩 확대시키고 있다. 음서제도의 바탕에 존재하는「나」를 기준으로「나」와의 친족관계상의 친소의 등급이 정해지는 촌수제도의 원리는 친속으로서의 양태를 잘 보여 준다.

 「나」를 기준으로 성립되는 친속으로서의 친족관계는 다른 여러 제도들에서도 나타난다. 인종 12년(1134)의 사심관제도에서는22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事審官. 그 임명 연고지가 관직의 고하에 따라 보다 다양한 계보의 확대된 연고지를 대상으로 사심관을 맡도록 하되, 그 확대는 사심관인「나」를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친속관계를 1차적 대상으로 하고 점차 다음 등급의 가까운 친속관계로 확대되고 있다. 즉 선택의 범위가 가장 적은 參外員에서는 내·외향 중 1향을, 4품 이하 참상 이상은 내·외향·祖妻鄕 중 1향을, 상장군 이하 3품 이상은 내·외향·조처향·증조처향 중 2향을, 재추는 내·외향·조처향·증조처향·처향 중 3향을 선정하여 사심관을 맡도록 하였다.

 이 사심관제도에서는「나」에게 가장 가까운 내향(부의 향)과 외향(모의 향)이 일차적인 연고지로 열거되고, 그 다음은 조처향(조모의 향), 증조처향(증조모의 향), 처향의 순으로 가까운 연고지가 열거되었다. 이러한 내·외향 등의 향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서「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으로서의 양해를 잘 보여준다.

 무신집권기의 관제운영에서조차 준수되고 있었던 상피제의 경우도「나」를 기준으로 한 양측적 친속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222)盧明鎬, 앞의 글(1981).
金東洙,<高麗時代의 相避制>(≪歷史學報≫102, 1984).
고려의 상피제는 당·송 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었으나, 부계친족에 일방적으로 편중된 중국의 제도로 부터 대대적인 변화를 가하여 부변과 모변의 친속에 대등한 범위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또한 처변의 친속도 확대되어 대등한 범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피제의 대상 친속범위도 각 개인들마다 달라지는 것이어서 역시「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의 전형적인 것이며, 부변과 모변에 대등한 범위가 되고 있는 것을 양측적 친속적인 양태를 반영해 준다.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은 사심관제나 상피제에서도 보이는 고려시대의 처족과의 관계이다. 음서제·전정연립·공음전 상속에서도 壻가 들어가 있는데, 처족과의 관계도 부변과 모변의 친속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자녀균분상속제나 딸에 의한 노부모봉양에서 볼 수 있듯이 딸이 아들과 대등한 친 속으로서의 비중을 가졌던 만큼, 姻親으로서의 壻와 처족 사이는 긴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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