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3) 친족조직
  • (4) 양측적 친속의 특성과 기능상태

(4) 양측적 친속의 특성과 기능상태

 고려시대의 친족제도와 관련된 법제 중에는 중국 당·송의 법제를 참고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당·송의 친족제도와 고려의 친족계도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중국의 친족제도와 관련된 법제가 고려에 들어올 때는 근본적인 큰 변개가 가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를 기준으로 성립되는 친속(kindred)은 그에 포함되는 계보관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계보가 성별로 한정되거나 크게 편중되는 單系的 친속(unilineal kindred) 또는 비대칭적 친속(skewed kindred)이라 하는 것으로 중국 당·송의 제도에서 나타나는 친속은 이에 해당한다. 중국의 친속은 부계친족들에 일방적으로 편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송의 친속이 당시에 중국에서 강력한 기능을 하고 있었던 조상을 기준으로 성립되는 친족집단인 부계의 리니지나 씨족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친속의 또 다른 형태는 그 계보가 성별로 한정되지 않는 양측적 친속(bilateral kindred)으로 부변과 모변에 대등한 친속범위들을 갖는 고려의 경우는 이에 해당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조상을 기준으로 한 친족조직인 씨족이나 리니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에 친속의 기능은 친족관계의 전반에 걸치고 있었다.

 당·송과 고려의 친족제도가 이처럼 크게 달랐던 까닭에 중국의 제도들이 고려에 도입될 때 그대로 고려사회에 부합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제도가 고려에 도입될 때 그 제도를 구성하는 원리들 중의 일부만을 수용하거나 제도를 개편하여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니, 그 시행 상태는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성씨(姓貫)제도에서처럼 부분적인 원리만을 수용하여 그 원리를 대체로 유지한 경우이다. 고려의 성씨제도는 그와 결합되어 있는 종법제적 친족원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부계적인 출신 계보의 선대를 표시하는 원리만을 수용한 경우로, 그 부계적인 원리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에 공식적으로 출신 혈연관계를 표시하고 확인하는 방법인 8조호구식·4조호구식·성씨 등이 존재하는 속에서 성씨는 대략의 출신 계보를 가장 간략하게 나타내고 파악하는 수단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혈연적 계보관념만큼은 중국과 근본적으로 달라서 당시에「∼씨의 族」·「∼씨의 宗」으로 지칭되는 것이 같은 성씨의 부계친족만이 아니라, 성별로 한정되지 않는 모든 다양한 계보의 타성 외손들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보관념과 성씨의 부계적 전승원리 사이의 괴리 때문에 성씨의 부계전승에 적지 않은 예외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극히 간략하고 단순한 성씨의 전승원리는 그만큼 변형시키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그 부계적인 원칙이 변경되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때때로 양측적 계보관계에 따른 성씨제도의 예외적인 시행이 정부차원이나 개인적 차원 모두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둘째로는 유교적 예법과 관련된 중국의 제도로서, 이 제도는 고려의 양측적 친속관계에 맞추어 일부 중요한 변형이 되기도 했지만 예제적인 중국식 제도의 골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하였다. 그 좋은 예가 특히 당제를 크게 참고한 五服親制이다. 중국에서도 오복친은「나」를 기준으로 한 친속이었으나 그 구성은 종법적 친족제도가 존재하는 속에 부계에 일방적으로 편중되었다. 고려의 오복친제는 외조부의 正服을 親祖父母의 정복과 같은 등급으로 하는 등 외족복의 등급을 크게 높이고, 역대 중국의 제도에서는 有服親에 들어간 적이 없는 堂舅와 堂姨를 유복친에 넣는 등 외족 유복친 범위까지 확장시켰지만, 전체의 테두리는 당의 유복친 및 袒免親〔단문친〕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셋째는 예법과는 달리 사회생활에 실질적 중요성을 갖는 제도로서, 이러한 경우는 고려의 양측적 친속관계에 맞추어 중국의 제도로부터 근본적으로 개편된 제도를 만들었다. 상피제의 경우 송제를 본보기로 성립되었으나, 송제에서 오복친이 근간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本族은 大功親 이내로 크게 축소시키고 外族은 그와 반대로 無服親까지 확대시켜 대등한 범위로 만들었다. 또한 처족도 처의 대공친 범위까지 대폭 확대시켜 대등한 범위로 설정되었다. 상피제는 情實에 의한 관제 운영상의 비리 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오복제와 대조되는 좋은 보기라 할 것이다.

 음서제의 경우도 송의 법제에서는 부계적인 친족인 본족 유복친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고려에서 승음친속 범위는 가까운 친속으로부터 광범한 내외후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들이 나타나지만 모두 양측적 친속이 토대가 되었다.223)慮明鎬, 앞의 글(1983).

 금혼범위도 당·송의 법제에서는 동성혼 특히 同姓有服親婚이 엄금되고 외족의 경우 4촌간의 혼인도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던 반면, 고려에서는 동성유복친혼도 문제되지 않는 속에 내외의 친속과 대등하게 근친을 대상으로 혼인이 금지되었고, 양측적 친속을 대상으로 하는 그러한 금혼 범위는 후대로 올수록 점차 6촌·8촌 범위까지 확대되었다.224)盧明鎬, 앞의 글(1981).

 중국식 제도의 수용을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곧 중국식 친족제도의 수용 또는 그의 성립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다. 중국의 법제를 수용하는 데 나타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제반 현상들은 고려사회의 친족제도에 맞추기 위한 불가피한 조정들이었다.

 고려의 친족제도는 법제의 비교에서도 나타나는 바처럼 그 구성이 중국의 친족제도와 근본적으로 달랐으니, 그러한 고려 친족제도의 구성상의 특징은 부계만이 아닌 부변·모변의 모든 계보를 포괄하는 계보에서 우선 중요한 특성을 가졌다. 즉 그것은 부계나 모계만으로 구성되는 단계적 혈족구성과도 판이하게 다른 것이고, 부모의 혈족의 어느 한쪽에 선택적으로 구성되는 선계적(ambilineal) 혈족구성과도 다른 것이다. 또한 이는 계보상에 남녀가 혼재되어 있는 계보(<그림 2>에서 보면 ①∼⑮)의 혈족관계와 같은 모든 계보(<그림 2>의 ⓛ∼(16))가 포함됨으로써, 부계(<그림 2>의 ①)만의 혈족과 모계(<그림 2>의 (16))만의 혈족, 두 가지에 개인이 동시에 귀속되는 二重出系(double descent)의 친족조직과도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이중출계와 양측적 친속의 차이를 나타내면<그림 2>와 같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친족제도에서 본족과 외족을 아버지쪽·어머니쪽 각각의 부계친족집단으로 이해하는 것은<그림 2>에서 본다면 본족의 경우 ①의 계보, 외족의 경우 ⑨와 같은 계보범위에만 한정하여 이해하는 것이 되고, 나머지 계보의 친속들과의 관계를 누락시키는 것이 된다.

 단<그림 1>에 나타낸 8조호구식에서 ①의 부계만의 계보가 다른 ②∼⑩의 세계추심보다 1∼2세대 많은 것과,<그림 3>에서 내손들(<그림 3>의 ①)이 외손들(<그림 3>의 ②∼(63))보다 한 세대 더 큰 범위까지 음직수혜의 대상이 되고,<그림 3>의 (64)가 ②∼(63)보다 계보상에 개재되는 여가 1명 더 많아 제외되는 것 같이 남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약간의 혈연적 계보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간의 혈연적 강조의 편중은 양측적 친속형태의 혈연관계에서 흔히 있는 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 친족제도인 양측적 친속의 또 다른 특성은 지속적인 단위집단으로서의 기능을 갖기 어렵고, 씨족이나 리니지처럼 집단의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인 친속과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양측적 친속의 그러한 특성은 친속범위들의 심한 중첩성, 친속간에도 서로 다른 친속범위, 개인별로 규정되는 친속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친속범위들의 중첩성이란「나」의 친속범위들이 또한 동시에 다른 다수의 개인들을「나」로 하는 친속들과 중복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씨족이나 리니지 등과 달리 양측적 친속이 그 자체만으로서는 단위집단으로 지속적인 기능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를 앞에서 본 계보에서 살펴보면,<그림 3>에는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된 남과 여 모두를 통한 후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계보범위는 스톡 (stock)이라 불린다. 양측적 친속에서「나」는 이러한 스톡형태의 계보범위들 에 중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면, 앞에서 본「∼씨의 족」등으로 지 칭된 계보기록이 그러한 스톡형태의 계보범위였음을 언급하였는데,<해주오 씨족도>·≪안동권씨성화보≫·≪문화유씨가정보≫ 등에는 한 개인이 셋 중의 둘 이상에 중복해 기록되고 있는 경우들이 다수 나타난다. 이것은 제한된 계보기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이러한 계보기록과는 별도로 그러한 계보의식이 존재하는 속에서 한 개인은 자신의 선대와 관련된 여러 스톡형태의 계보범위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도형화한 것에서 살펴보면,<그림 6>의 ②는 4세대 범위에서「나」를 포함하고 있는 스톡범위들을 (1)∼(8)의「∧」표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는 친속범위들 중「나」로부터 소급되는 직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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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이중출계와 양측적 친속의 차이
<그림 6>이중출계와 양측적 친속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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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만을 표시해 놓은 것으로 실은 이들 계보상의 인물들 모두로부터의 남과 여 모두를 통한 후예들의 표시를 생략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범위는 나와의 촌수가 멀어질수록 나와의 관계도 줄어들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친속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안는 친속들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중첩성 때문에「∼씨의 족」등으로 지칭된 스톡형태의 범위는 그 성원들만의 독자적인 단위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발달한 문중조직이 그 전대에는 외족으로 관계를 갖던 계보들의 다른 성씨들을 배제시키며 동성동본만의 부계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기능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태이다. 스톡범위의 중첩성을 개인 차원에서 보면,「나」는 동시에「∼씨의 족」으로 지칭되는 여러 스톡범위들에 속하여, 어떠한 특정 범위만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스톡범위들이 독자적인 단위집단을 이루어 기능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문중 조직과 같은 것이 없었음은 물론, 時祭(時享)와 같은 공동의 조상에 대한 친족 집단 단위의 정기적 제사도 없었고, 선산과 같은 친족집단 공동의 묘역도 없었다.225)崔在錫,<高麗時代의 喪·祭>(≪鄭在覺古稀記念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金龍善,<高麗 支配層의 埋葬地에 대한 고찰>(≪東亞硏究≫ 17, 1989).

 이러한 스톡범위의 중첩되는 혈연관계는 부모가 같은 형제간이 아니면 개 인마다 달라지게 된다. 2세대를 소급하는 범위에 한하여 4촌간에서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의<그림 7>과 같다. 여기서 보면 A는 스톡 1·2, B는 스톡 2·3에 포함되어 각각 포함되는 스톡들이 반만 같고 반은 다르게 된다. 이를 다시 6촌형제간에서 보면 1/4만이 같고 3/4은 다르게 된다. 또한 사료 A 등에서도 처족의 비중을 볼 수 있으니, 率壻婚이나 女壻相續 등 당시의 사위 와 처족과의 강한 혈연적 유대는 형제간에도 각기 다른 혈연관계망을 갖게 하였다. 이처럼 각 개인마다 서로 다른 친족관계망을 갖는 것은 원초적으로 앞에서 살펴본「나」를 기준으로 한 개인 대 개인의 친족관계라는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양측적 계보관계에 의해 더욱 현저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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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개인별 친속범위의 차이
<그림 7> 개인별 친속범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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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양측적 친속은 그 범위가 중첩되고 친속간에도 서로 다른 친속범위를 갖기 때문에 친족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양측적 친속의 작용 형태는「촌수」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촌수제도로 나타낼 수 있는 계보상의 원근에 따른 친소정도의 차이는 친속 관계의 실제 작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개인의 친속들이라도 친소 정도의 차이에 따라「나」와 그들 각각의 친속으로서의 유대가 각기 달랐고, 나와 그들 친속들과의 친속 관계가 사회생활에 작용하는 빈도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본 사심관제에서 연고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각 친 속들과의 관계는 그 좋은 보기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음직이 일차적으로 근친들에게 수여되고 점차 원친에까지 확대되는 것도 친소관계의 차이에 따라 각 친속들과의 유대정도의 차이나 그들 각각과의 관계가「나」의 사회생활에 작용하는 빈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촌수로 표시되는 것처럼「나」를 기준으로 파악되는 계보상의 원근에 의거한 양측적 친속의 친소의 등급별 범위는 각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 형태로 구별되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甲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진 원의 안에 있는 다른 각 개인들(갑의 친속들)에게는 각자마다 그를 중심으로 설정되는 또 다른 동심원들(갑의 친속인 乙, 丙, 丁 등 각 개인의 친속범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들은 서로 일부가 겹쳐지며 계속 연결되어 나가는 양상을 이루게 된다. 이는 개인이 포함되는 스톡범위들이 여럿이 중복되며, 근친간에도 각 개인마다 그렇게 중첩되는 스톡범위들이 다른 데서 오는 현상이다.

 개인별로 서로 다른 양측적 친속범위들을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한 개인 의 친속들이라 해도 그 개인「나」에 대한 친소의 정도가「나」를 기준으로 한 계보관계의 원근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양측적 친속은 하나의 단위 집단으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웠고 자연히 개인간의 개별적 관계로 작용하였다. 간혹 한 개인의 일로 그의 양측적 친속들이 결집된 집단적 행동을 하는 수도 있지만, 그 결속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결속의 계기가 된 상황이 종료되면 해체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지속성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결속의 기본구조나 토대도 리니지나 씨족 등과는 달랐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집단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일지라도, 리니지나 씨족에서의 집단행동은 동일집단 성원으로서의 관계를 토대로 한 것임에 비해,「나」의 친속들 사이에는 서로 친척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니 모두「나」와의 개인적 유대관계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양측적 친속관계가 주로 개인간의 개별적 관계로 작용되지만,「나」의 일로 집단적 결속을 하더라도 지속성을 갖기 어려웠던 것은 그러한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나말여초 이후에는 그처럼「나」를 기준으로 성립되어 개인간의 개별적 관계로 작용하는 친족관계인 양측적 친속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조상을 기준으로 성립되는 집단적인 친족관계인 씨족이나 리니지같은 친족집단들이 분해·소멸되고 있었기 때문에,226)盧明鎬, 앞의 글(1988a). 여말의 각 개인들은 친족집단의 배타성과 폐쇄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개인적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예컨대 그러한 친족제도와 관련된 사회적 상황은 정치세력의 결집 양태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구려의 桂婁部 왕족과 絶奴部 왕비족의 결속이나 신라의 김씨왕족과 박씨왕비족의 결속 등에서 보듯이 앞 시대에서는 단일 친족집단이나 그 몇몇의 제휴로 정치세력이 결성되고 있었고, 이러한 친족단위의 집단적 행동에서 벗어난 개인들의 개별적 행동은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정치세력의 구성에 本族·外族·妻族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 친속 관계가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었으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古代의 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본족·외족·처족이 父의 부계친족집단·母의 부계친족집단·妻의 부계친족집단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부측·모측·처측 친속으로서 개인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선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정치적 세력집단은 종래의 이해처럼 성씨별 부계의 친족집단이 단위가 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개 한 명 또는 소수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유력자와의 개인적 관계에 의해 결성되고 있었다. 각 개인은 친속관계가 없는 자와 이해관계나 입장의 합치만으로 결속될 수도 있었고, 양측적 친속들도 친속관계 그 자체만으로 정치세력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입장이나 이해관계가 합치된 자들만이 동일세력으로 결속되고 있었던 것이다.≪고려사≫등의 기록에서는 후자를「族黨」(때로는「親黨」)이라 하고, 전자를「黨與」라 함으로써, 한 정치세력의 구성부분을 두 부류로 구분하여 서술한 경우가 많다.227)고려시대의 정치세력의 결집에 친속관계가 작용한 양태에 대해서는 盧明鎬,<李資謙一派와 韓安仁一派의 族黨勢力-高麗 中期 親屬들의 政治勢力化 樣態->(≪韓國史論≫17, 서울大 國史學科, 1987) 참고.

 「당여」로 지칭되고 있는 인물들은 유력자와의 친속적인 유대관계가 없이 이해관계나 입장의 합치에 의해 개별적으로 유력자를 추종하거나 그와 결탁하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대에 결집된 정치세력의 구성부분으로 일반화된「당여」적인 존재는 유력자와의 개별적인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합치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친족집단별 사회편제가 해체된 단계에서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성씨별 부계의 친족집단이 여말 이래의 호족세력이나 여대의 정치적 세력들에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기존 이해에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정치세력 일파를 구성한 자들 중에서「당여」들에 비해「족당」으로 지칭되고 있는 부류들은 정치세력 일파의 핵심적인 위치를 이루고 있었던 부류들이다. 이들은 중심적 인물의 본족·외족·인족 등 양측적 친속관계의 다양한 계보들에 대등하게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 촌수가 가까운 쪽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까운 근친일수록 동일 족당세력으로 결집되는 경향이 컸지만, 근친 이라도 반드시 동일세력으로 결집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3촌 내지 4촌간은 물론 형제간에도 동일세력을 이루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양측적 친속들 중에 서 족당세력으로 결집된 자들은 이해관계나 입장이 합치된 자들이었다.

 당시 양측적 친속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 가지 작용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친속으로서의 개인적 유대관계였다. 이러한 개인적 유대로 작용하는 양측적 친속은 집단적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관계나 입장의 합치라는 부가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족당세력이 결집될 수 있었다. 이렇게 결성된 족당세력은 집단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 토대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각자는 그의 양측적 친속들 중에서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입장이 합치되는 자와 결속될 수도 있었고, 또한 입장이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그 결속에서 이탈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의 친족조직이 양측적 친속의 형태였음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종래에 고려시대의 친족조직으로 간주되던 부계친족집단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후자가 남성으로만 연결되는 부계적인 계보만으로 성립됨에 비해, 전자는 남성과 여성이 다양한 형태로 개재되는 모든 계보들을 포괄하였다. 또한 후자가 조상을 기준으로 성립되고 집단으로 기능함에 비해, 전자는「나」를 기준으로 성립되어 친속 개인간의 개인적인 관계로 기능하였다.

 단 고려시대의 법제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에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전형적인 양측적 친속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들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중국 당·송의 제도 내지는 유교적 禮制의 영향을 받은 것 중에서 일부 실제의 사회생활과 관련이 적은 경우들에 국한되어 나타난다.

 고려시대 친속제도의 기능 양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해 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양측적 친속조직이 계급내혼과 결합되어 사회 속에서의 친족관계망을 이루고 기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왕경의 지배층으로부터 향촌 사회의 주민에 이르기까지 고려사회에는 계급내혼적 단위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계급내혼적 단위는 고려시대의 전·중·후기 별로 특징을 가지며 점차 변하였지만, 계급내혼적 계층들 사이에는 서로 친족관계망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회의 편성에 기 초적인 요소로서도 작용하였으며, 당시의 많은 사회 현상들의 토대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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