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2. 가족제도
  • 4)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
  • (2) 계급내혼에 의한 구성

(2) 계급내혼에 의한 구성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이 양측적 친속관계의 다양한 계보관계들로 얽혀져 있었지만, 그 내부는 階級內婚에 의해 계층별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향촌사회의 계층구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사항으로 시대별 또는 지역별 차이도 있을 것이나, 문종년간을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은 향리층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문종 5년 10월에 判하기를 諸州縣吏들은 ⓐ 初職에 後壇史, 2轉에 兵倉史, 3轉에 州府郡縣史, 4轉에 副兵倉正, 5轉에 副戶正, 6轉에 戶正, 7轉에 兵倉正, 8轉에 副戶長, 9轉에 戶長이 된다. ⓑ 그 公須·食祿의 正은 戶正에 준하고, 그의 副正은 副兵倉正에 준한다. 客舍·藥店司·獄의 正은 副戶正에 준하고, 그의 副正은 州府郡縣史에 준하는데, 가풍이 戶正·副兵倉正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 차출한다. ⓒ 累世에 가풍이 있는 자식이면 兵倉史를 初授한다. ⓓ 그 다음은 後壇史를 初授한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鄕職).

 고려시대의 향리를 조선시대의 향리처럼 하나의 신분층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위의 자료만 보아도 고려시대의 향리를 단순히 하나의 계층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249)盧明鎬, 앞의 글(1986). 위 문종 5년의 판문에서는 향촌사회의 향리들이 상하의 3계층으로 나뉘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그 최고의 계층은 ⓒ에 보이는「누세에 가풍이 있는」계층이다. 이 계층 출신들은 ⓐ에 보이는 9단계의 승진과정 가운데 제2단계부터 출발하는 특권이 부여되고 있다. 이들은 제술업과 명경업의 응시자격 부여에 대한 문종 2년 판문에서 가장 큰 기회가 주어진 최고의 향리층인 호장이나 부호장을 배출하고 있었던 부류들이다.250)“문종 2년 10월에 判하기를 ⓐ 각 州縣의 副戶長 이상의 孫과 副戶正 이상의 子로 製述業과 明經業에 응시하려는 자는 (중략) ⓑ 醫業의 경우에는 모름지기 널리 익힌 것을 요할 것이요, 戶正 이상의 子에 한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庶人이라도 樂工·雜類에 관계되지 않으면 함께 응시하도록 한다.”(≪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나말여초에 대두한 지방호족세력들의 상층의 직제가 고려초부터 성종대를 거치며 堂大等·大等으로 되고 다시 戶長·副戶長으로 전환되는데, 이들 최상층 향리직을 역임하는「누세의 가풍이 있는」층은 나말여초에 대두한 지방호족들의 후예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나말여초 호족세력 예하의 부류들에 연결되는 하위의 향리층과 동일한 계층적 존재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이「누세의 가풍」을 갖는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 계급내혼적 단위를 이루면서 세습적으로 고위의 향리직인 호장·부호장을 역임한 것을 지칭한 것이었다.≪고려사≫에서는 溟州의 상층 향리인 金遷의 부모에서 戶長 집안간의 결혼 사례를 볼 수도 있다.251)≪高麗史≫권 121, 列傳 34, 孝友 金遷. 이러한 사례는 보다 많이 찾을 수 있는데, 특히 고려대의 호적자료에서는 이들의 강한 계급내혼 경향이 확인된다.252)고려시대의 호적자료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는 許興植, 앞의 책 (1981) 참조. 호적 자료들의 戶主나 戶主妻의 선대 계보들에서는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기 전에는 대부분 같은 군현 또는 인근 군현의 본관을 갖는 호장층 출신간에 혼인이 이루어진 사례들이 나타난다.253)호장층의 계급내혼 사례는≪慶州府戶長先生案≫에서도 다수 나타난다. 이는 하나의 군현 또는 몇 개의 군현을 단위로 하는 지역범위내에서의 계급내혼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지역범위는 당시의 지역적 생활권, 즉 향촌사회의 단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되거니와, 호장층 아래의 계급들에서도 대체로 생활권을 이루는 그러한 지역범위내에서 계급내혼을 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호장층은 과거나 군공 등을 통해 중앙의 품관으로 진출하는 지방의 주된 官人 공급원이었으며, 하층의 품관 배출층과의 빈번한 통혼사례들이 나타난다. 적어도 고려 전기에는 호장층과 하위의 품관 배출층과의 사이에는 통혼 상의 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보다 확대된 지역적 범위에서의 계급내혼적 단위를 검토한다면, 이들 호장층과 하위의 품관배출층을 포괄하는 계급내혼적 단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제2의 계층은 위의 문종 5년 판문의 ⓑ에서 둘로 나누어 언급된 자들 중 상층의 부류들로, 이들은 제1계층의 호장층과도 구분되는, 4轉하여 도달하는 副兵倉正∼6轉의 戶正을 역임하는「가풍」을 갖는 자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문종 2년의 과거시험 응시 자격에 대한 판문에서 보면 호장층에 주어지는 기회보다 축소된 것이나, 이 계층의 출신에게도 제술업과 명경업의 응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 계층의 출신은 원칙적으로 위 문종 5년 판문의 ⓑ에 열거된 藥店司나 獄의 正·副正 등의 직에 차출되지 않고, 邑司의 중심을 이루는 ⓐ에 열거된 직을 대체로 戶正∼副兵倉正의 등급까지 역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계층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적은데, 吳闡猷의 묘지명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254)李奎報,≪東國李相國集≫後集 권 12, 吳闡猷墓誌銘. 오천유는 사망시의 연령이 71세로 기록되고 있어, 묘지명에 밝힌 그의 부나 외조의 향리직은 최종으로 역임한 직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이 副戶正으로 보이는 副司戶나 權(?)戶正으로 보이는255)司戶는 戶正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密陽 朴氏 壬子年 准戶口>에서 ‘權知戶長’이라는 직명이 나타남을 보면(李基白, 앞의 책, 1987), 권사호는 權知戶正에 해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權 司戶에 불과했음을 보면, 이들이 호장·부호장을 역임하는 家風을 못 가진, 호정∼부병창정의 직에 그치는 제2계층 출신들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호장층 출신도 비록 특혜가 있지만 밑에서 두번째인 병·창사에서부터 향리직을 시작하여 승진해 가는 것이므로, 부호장 이상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천유 부모의 혼인은 그 당사자들이 한쪽만이 아니라 양가 모두가 副司戶나 權司戶로 되어 있어, 이들의「가풍」이 제2신분층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누대에 호정∼부병창정을 배출하는 이 제2신분층으로서는 상위의 호장층과의 통혼을 희망할 수 있겠고 그것이 명문의 법제로 금지된 바는 아니었으나, 호장층내의 계급내혼 경향이 강하므로 격이 떨어지는 그러한 통혼은 호장층으로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회피될 혼인이었다. 제1의 신분층인 호장층과 제2의 신분층 사이에 계급내혼적인 분리가 형성되는 것은 그러한 면에서 명문화된 법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실제이고 관습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다음 제3의 계층은 문종 5년 판문의 ⓑ 에 언급된「가풍」이 호정∼부병창정에 미치지 못하는 부류들이다. 그 판문에 의하면, 이들 출신은「가풍」의 제약으로 격이 가장 낮은 藥店司나 獄의 正·副正 등의 직에 차출되고, ⓐ 의 직들 중에서는 史의 등급까지만 역임할 수 있었다.

 위의 문종 5년 판문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향리의 세 계층이 모든 주·군·현들에서 동일하게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 5년 판문이 국가적 규정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에 언급되고 있는 계층은 적어도 대부분의 주·군·현들의 실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256)향촌사회의 계층구성 속에서 鄕吏의 위치가 고려 문종대와는 크게 달라졌으므로 조선시대의 향리층과 직접적인 비교는 하기 어려우나,≪安東鄕孫錄≫·≪晋陽志≫·≪完山志≫에서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향리층이 3등급으로 나뉘어져 승진이나 通婚이 규제되었던 점을 고려시대 향리층의 구성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樹健, 앞의 책, 1984, 416∼417쪽).

 이상의 세 계층은 향리로서 수조지인 전정을 국가로부터 받아 보유하고, 전 정연립에 의해 그를 세습해 나가는 부류들이었다. 전정을 보유하는 또다른 류로는 군반에 속한 군인 등의 직역자들도 있었으나, 위의 세 계층 밑에 있는 대부분의 지방민들은 전정을 보유하지 못한 백정 신분인 자들이고257)≪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이들은 조세부담과 함께 요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응시자격에 대한 문종 2년 판문에서는 庶人에 해당하는 부류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보다 아래의 최하의 계층으로는 노비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반 군현민과 노비층의 사이에는 향·부곡 등의 특수구역민층이 존재하였는데, 이들 특수구역이 법제대로 통제되는 상황하에서는 향촌 사회의 친족관계망의 구성에서 이들은 지역단위로 분리되는 경향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와 관련된 법제로 앞 절에서 본 군현인과 진·역·부곡인의 交嫁所生에 대한 규정이 주목된다. 이러한 법제가 적용되는 속에서는 특수구역민들의 소생은 같은 특수구역민 사이의 혼인에 의한 소생이든 군현민과의 혼인에 의한 소생이든 모두 특수구역내의 주민이 되도록 제한받게 된다. 또한 특정의 役과 관련된 이러한 특수구역민들이 지는 국가로부터의 제부담은 일반 군현민에 비해 가혹하리만큼 컸기 때문에,258)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 出版部, 1990), 142∼161쪽. 이같은 불리한 조건은 군현민과의 통혼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 군현민들이 때로는 외부의 특수구역민과 혼인을 할 수 있었음을 보면 그같은 불리한 규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인근 군현민과의 혼인은 보다 많았을 것이다. 인근 군현민 사이의 혼인은 지역적 생활권이 主屬縣 단위와 같은 복수의 군현들을 포괄하는 경우에 보다 활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수구역민에 대한 법제가 시행되는 속에서는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은 일반 군현민과 특수구역민 사이에서 지역적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인 백정층인 일반 군현민들도 계급내혼적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앞에서 본 水州지역의 104세 老軀의 5∼6세손 범위 전체가 요역 징발의 대상이 된 것은 그 후손에서 양인 군현민 간의 계급내혼적인 혼인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金州民인 大文의 양측적 친속들로 보이는「族黨」백 명이 모두 압량위천의 대 상이 되었음은 이들이 모두 동일한 계층적 상태에 있었던 자들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것은 이들 역시 양인 군현민간의 계급내혼적 혼인을 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일반 군현민인 양인의 혈연관계망은 노비층과는 보다 현격히 구분되고 있었다. 양천간의 교혼은 다음 예와 같이 그 소생 모두가 노비로 되었다.259)一賤則賤에 대해서는 洪承基, 앞의 책(1983), 21∼23쪽 참조.

우리 나라의 법은 그 8世戶籍이 賤類에 간여하지 않아야 벼슬을 할 수 있다. 무릇 천류가 됨에는 부모 중 하나만 賤이어도 천이 되는 것이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렬왕 26년 10월).

 이러한 불리한 규제는 양인층이 노비와의 혼인을 가능한 한 회피하게 하는 큰 압력이 되었다.

 향촌사회내의 계급내혼이 법제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그것은 법제적인 것이 아니라 하층과의 혼인을 회피하는 사회적 경향이었고, 따라서 소수이나마 때로는 상하의 계층간에도 혼인이 있었다. 그러나 상하 계층간의 혼인은 계층적 편제질서에서 당사자들의 상승이나 하락을 유발할 수도 있는 것이니, 향촌사회의 계층적 질서에 큰 변동이 없는 한 억제됨으로써 계급 내혼적인 혼인이 향촌사회의 구성에 기초가 되고 있었다. 앞에서 본 계층간에「누세의 가풍」의 차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은 양측적 친속관계로 얽혀 있었지만 계급내혼 경향에 의해 상하의 계급간에는 거의 연결되지 않고 별도의 혈연적 群으로 나뉘어 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金州의 雜族人이 무리를 이루어 변란을 모의하고 豪族人을 죽였다. 호족이 도망하여 성 밖으로 피하니, 무기를 들고 副使衙를 포위하였다. 부사 李迪儒가 지붕위에 올라가 首謀者를 쏘니, 활시위 소리에 따라 쓰러졌다. 그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서 돌아와 고하기를 ‘우리들은 강포하고 탐오한 자를 제거하여 우리 邑을 깨끗하게 하려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를 쏘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적유는 거짓으로 놀란 체하며 이르기를 ‘나는 그런 줄 모르고 外敵인줄 알았오’라 하고, 몰래 성 밖의 호족에게 연락하여 협격하여 모두 죽였다(≪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3년 8월).

 위에서는 금주의 호족인과 잡족인의 싸움이 언급되었는데 호족인과 잡족인이 앞에서 본 여러 계층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지칭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호족인은 금주지방의 토착세력 중에서「강폭하고 탐오한 자들」이라고 지탄을 받고 있음을 보면 향촌사회의 최고 세력인 호장층이 아닐까 생각되고, 제2계층도 그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잡족인은 그 아래의 어떤 계층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러한 계층적 구분이「族」·「雜族」이라 하였듯이 출신 혈통별로도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각 계층들이 계급내혼에 의해 혈통상으로도 서로 구분되는 경향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향촌사회의 친족관계망이 이처럼 계층별로 나뉘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계급내혼 단위별로 대체로 그에 포함되는 성씨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성씨들로서는 일종의 신분 내지는 계층의 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데, 다음은 그러한 예이다.

(鎭州)토성은 三韓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넷이니, 河·鄭·蘇·姜이요, 立州之後에 또 세 성이 있으니 柳·康·任이다. 기타 雜姓은 庶人이다(≪晋陽志≫권 3, 姓氏).

 위의 진주의 성씨에 대한 지리지의 기록에서는 土姓·立州之後姓을 雜姓과 구분하고, 잡성은 庶人이라 하였다. 여기서 잡성이 서인의 성씨라 함은 토성이나 입주후성은 非庶人의 성씨, 즉 官人 또는 그에 준하는 신분의 성씨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역, 즉 본관에 따라서도 성씨의 격이 내세워질 수 있는 면도 있으나, 위에서 구분되고 있는 것은 그와는 달리 동일지역 내에서 성씨의 계급적 출신을 나타내는 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직접적으로 성씨의 계급적 관련성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토성 또는 人吏性과 구분하여 次吏姓·次姓·百姓姓 등으로 지칭되고 있는 姓種들도 토성이 속한 계급보다 아래 계급의 성씨들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60)土姓·人吏姓·次吏姓·百姓姓 등 姓種의 개념은 그에 대한 현재 기록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조선 전기의 地理志類에서도 분명하지 못하고 일부 혼동되고 있는 부분들이 나타난다. 土姓의 경우≪世宗實錄地理志≫에서 보면, 南原府에서는 토성이 인리성과 백성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기록되는 한편, 平海郡에서는 토성과 백성성이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다. 위에서의 ‘土姓’은 평해군 성씨와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백성성의 경우는 村姓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李樹健, 앞의 책, 1984, 52쪽). 고려사회에서 성씨는 그를 지역적으로 구분하는 본관의 격에 따라 성씨 자체의 격도 규정되는 면이 있었고, 邑治內의 성씨를 갖는 자들과 달리 村姓을 갖는 세력이 대개 人吏層이 되지 못하고 백성성이 됨으로써 촌성이 백성성과 연결되는 면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용어 본래의 의미로는 村姓이 성의 소속 지역을 밝히는 용어임에 대하여, 백성성은 의성 소속 계층을 밝히는 용어로서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토성 등의 성씨는 고려초 내지 고려 전기에는 邑司를 구성한 부류들의 성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261)토성 등의 姓種이 고려 이래의 邑司 구성에 참여한 부류들의 성이라는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참고된다.
武田幸男,<高麗時代의 百姓>(≪朝鮮學報≫28, 1963).
―――,<新羅の滅亡と高麗の展開>(≪岩波講座 世界歷史≫9, 岩波書店, 1970).
李樹健, 위의 책, 7∼8쪽.
金東洙, 앞의 글.
앞에서 향리가 세 계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자료를 보았는데 이들 성종의 구분은 향리직 내부의 계층적 구분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성종에 대한 이해를 확대함에 문제가 되는 것은 지리지 등에서 차리성·차성·백성성 등이 기록되고 있는 군현들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애초부터 이러한 성종의 구분이 없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구분은 같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인≪世宗實錄地理志≫나≪慶尙道地理志≫·≪東國輿地勝覽≫등에서도 구분되지 않고 토성으로 합쳐지거나 누락되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262)李樹健, 위의 책, 52쪽.
金東洙, 위의 글.
이를 보면, 고려초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의 사회적 변동을 거치는 동안 그러한 성종의 구분이 이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차로 토성 등에 통합되거나 기록에서 누락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지리지에서는 그 흔적만을 겨우 남기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설사 이러한 보다 세분된 성종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진양지≫의 기록은 토성이 향촌사회의 지배적 계급의 성씨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토성을 읍사의 구성원들의 성씨와 연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기존 해석과도 부합된다.

 물론 이러한 성씨에 의해 나타내지는 출신계급은 개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고려초에서 조신시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변동과정에서 각 계층들의 분화적 변화도 적지 않았던 만큼 개연적이나마 성씨에 의해 출신 계급이 파악되는 면은 후대에 올수록 오차가 커지고, 때로는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姓貫이 생성되고 있었던 초기에는 향촌사회 내에서 계급내혼이 행해지는 속에 어떤 성관을 갖는 자들이 동일 계층에 속할 확률이 컸고, 그 때문에 토성 또는 인리성·잡성·차리성 또는 차성·백성 등 동일 향촌사회내에서의 계층적 격에 따라 성을 분류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씨에 의해 개연적이나마 이처럼 출신 신분 또는 계층이 파악될 수 있었던 것은 계급내혼의 경향 속에서 향촌사회 내의 친족관계망이 계층간에 분리되고 있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향촌사회의 각 계층들 내에서 폐쇄적인 혼인이 거듭될 때, 그것은 같은 계층에 속한 자들의 성씨들, 즉 일정 성씨들간에서만 양측적 친속관계에 의한 친족관계망을 형성시키게 된다. 따라서 동일 성관을 갖는 자들은 대체로 동일 계층에 속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盧明鎬>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