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1) 사회정책
  • (2) 의료정책

(2) 의료정책

 의학 또는 의술은 그것이 인간의 생명과 관계가 깊은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정책적으로 의학을 장려하고, 의원을 양성하여 민중의 질병을 퇴치하고자 노력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의료기구가 모두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나, 고구려의 경우는 병자에게 賑給하였다는 기록280)≪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2년 2월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의료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藥部를 설치하여 民疾을 치료함은 물론 의학을 교육하였고, 의료관계자를 일본에까지 파견하여 일본의 고대의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보이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신라의 제도는 통일 이전은 알 수 없지만, 법흥왕 때를 전후하여 藥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81)孫弘烈,≪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修書院, 1988), 55쪽. 통일 후 여기에는 의사가 속해 있으면서 궁중에서 치료를 담당하고 의료정책의 입안·실시에 간여했을 것이다. 그 후 효소왕 6년(692) 의학을 설치, 博士 2명으로 하여금 의학교육을 실시하게 하였다.282)≪三國史記≫권 39, 志 8, 職官 中, 醫學. 이렇듯 신라는 법흥왕 이후 점차 중국식 의료제도를 도입하여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특히 통일 후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함으로써 전통적 의료제도에서 탈피, 새로운 제도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진휼정책은 고려에까지 이어져 고려시대 의료제도의 체계를 수립하고, 의료정책을 수행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의료정책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초부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의료기구의 설치나 의전의 양성은 黑倉의 설치보다 더 필요하였다. 더욱이 신라의 직제 중에는 藥典·醫博士·供奉醫師 등 의학교육과 치료에 종사하던 관직과 기관의 명칭이 보이고 있으며, 또 태조 때에는 신라의 제도를 많이 답습하였다고 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치료와 교육을 전담하던 기구가 이미 태조 때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 때 어떠한 기구가 수도인 개경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대신 태조 13년(930) 西京에 醫學院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283)≪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개경에는 이보다 먼저 이러한 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이 개국과 동시에 의료기구를 설치한 것은 의료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었다. 광종 9년(958) 과거제도 실시 이후 의업 급제자가 광종과 성종 때에 배출되고 있는 것은284)≪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태조 때의 의료정책에 의해 의원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광종 14년 濟危寶(鋪)를 설치하여 貧民·行旅의 구호와 질병의 치료를 맡아보게 한 것도,285)≪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濟危寶. 이러한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고려의 중앙의료기구는 성종 2년(983)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할 때 그 하나로 설치되었 다.286)≪高麗史≫에는 尙藥局·太醫監 등의 醫療機構가 목종 때에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성종 8년 2월에 의관 즉 侍御醫·直長·醫正 등을 파견해 병든 관리를 치료했다고 되어 있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2월 경진). 따라서 그 이전에 이미 尙藥局과 太醫監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설치한 기구는 궁중의 御藥 및 왕실의 치료를 관장하던 尙藥局과 의료정책의 수립과 관리의 치료를 맡아보던 太醫監이었다.

 태의감에서는 양반관료와 전염성 질환에 대한 치료·약품제조·土産藥品의 채취 및 의학교육과 의원에 대한 과거 등을 관장하였다.287)孫弘烈, 앞의 책, 93∼94쪽 참조. 또한 태의감 소속의 의관 중에는 醫學博士·助敎·呪噤博士 등 교육에 종사하는 의관이 있어서 의생에 대한 교육도 실시함으로써, 국가 전반에 대한 의료업무를 주관하였다. 이외에도 왕실 소속의 의관으로 東宮醫官과 翰林院醫官·茶房醫官이 있고, 軍醫와 獸醫가 있었다.

 동궁의관은 태자의 의료를 전담하는 의관으로, 藥藏郎과 藥藏丞이 있었으며, 한림원의관은 상약국 의관을 겸직시켜 어약을 관장하게 하고, 衆疾의 치료와 의생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다방은 송나라의 都茶房의 명칭을 모방한 것이었지만 직제나 운영은 독자적인 것이었다.288)孫弘烈, 위의 책, 89∼92쪽 참조. 즉 송의 도다방에는 환관이 직무를 맡았지만, 고려에서는 의관이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藥方文을 가지고 있었다. 崔宗峻이 편찬한≪新集御醫撮要方≫2권도 다방에서 수집한 藥方이 그 토대가 되어 완성된 것이다.289)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1, 說序 新集御醫撮要方序.

 고려시대에는 군의도 있었다. 이는 문종 29년(1075) 변방의 군인이 병이 나 면 그곳 의원의 치료를 받도록 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29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또 인종 23년(1145)에는 각 군의 軍侯가 사용할 수 있는「藥員」을 5명으로 정하였는데,291)위와 같음. 이것이 군의였다.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獸醫의 존재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는 농업국이므로 農牛의 관리와 사육 및 질병치료를 위해 수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말의 이용은 더욱 다양하여 驛馬·乘用·賞賜用·擊球用으로 사용되었고, 그 수도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의의 양성도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료정책은 국가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지방에까지 확대 실시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서경에는 이미 태조 때 의학원이 설치되었고, 약점이 설치되어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이어 동경과 남경에도 의사가 배치되었다. 문종 때부터는 大都護府와 大都督府에는 醫師를, 防禦鎭에는 醫學을 파견하여 치료를 맡게 하는 등292)≪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전국의 군현에 의사를 배치,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였다.29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癘賑貸之制 공민왕 20년 12월.

 이처럼 중앙에 의료기구를 설치하고 지방에까지 의원을 파견하였으나, 이러한 시설만으로는 백성의 병을 모두 치료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서경을 비롯하여 주·부·군·현에 약점을, 개경에 제위보·東西大悲院·惠民局 등을 설치하여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렇듯 중앙과 지방에 의료기관을 설치하였으므로 이에 필요한 의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초부터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의학교육은 삼국시대부터 실시한 것이지만, 고려는 태조 때부터 서경에 의학원을 설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으니, 개경에서는 이보다 먼저 실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까지 확대 실시된 것은 성종 6년(987)에 이르러서였다.

 성종이 의학교육을 정책적으로 실시하게 된 것은, “신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병 치료를 우선해야 할 것”이며, 또 “백성들의 難危를 막기 위해서는 완전한 의술을 널리 보급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294)≪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6년 6월.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종 2년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한 이후 향리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 올라와 習業케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295)≪高麗史節要≫권 2, 성종 5년 7월. 이에 經學博士와 醫學博士 각 1명씩을 12목에 파견, 지방자제를 교육시킴으로써 의학교육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의료정책은 백성을 질병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위민정책이 소산이었다. 광종 때 과거를 실시하면서 의업을 함께 실시한 것도 이러한 정책적 배려에서였다. 의과는 잡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응시자격은 상당히 개방되어 있었으나,296)孫弘烈, 앞의 책, 122∼126쪽 참조. 시험이 어려워 급제자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성종초부터 지방관이 의술에 밝은 자를 천거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게 하였다.297)≪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6년 8월.

 고려시대에는 중앙에 여러 의료기구를 설치하고, 지방에 의원과 약점을 설치하여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힘썼으며, 이를 위해 경향 각 지에서 의학교육을 실시하는 등 의료정책은 국가의 항구적인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고려시대 사회정책으로서의 진휼정책과 의료정책은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고, 백성의 재난과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실시된 정책이었으나, 이를 뒷받침해야 할 국가의 재정 부족과 잦은 전란으로 말미암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지 못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