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2) 사회시설
  • (2) 상평창

(2) 상평창

 常平倉은 곡가가 떨어지면 국가에서 시가보다 비싸게 미곡을 구입하여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어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싸게 방출함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설치한 물가조절 기구였다. 이것은 漢宣帝 五鳳 4년(B.C. 54) 大司農 中丞 耿壽昌의 건의에 의해 처음 실시된 것이었다.313)≪漢書≫권 8, 紀 8, 五鳳 4년 춘정월. 이 제도는 중국의 경우 농촌경제의 원활한 유통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으나 운영방법에 각종 폐해가 발생하여 실시한 지 10년 후에는 폐지되고 말았다.314)徐吉洙,<高麗時代 常平倉에 관한 硏究>(≪論文集≫6, 淑明女大 韓國政治經濟硏究所, 1977), 154쪽.

 이러한 상평창 제도가 고려시대에 처음 실시된 것은 성종 12년(993) 2월에 개경과 서경 및 12목에 倉을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제도 역시 중국 한나라의 상평창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풍년에 백성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하고, 흉년에는 농민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한 진휼책이었다.315)≪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성종은 상평창을 설치하면서 여기에 米 6만 4천 석을 주어 그 중 5천 석 은 개경의 상평창에, 나머지 5만 9천 석은 서경과 12목 등 모두 15개의 상 평창에 분급하였다.316)위와 같음.
이 때 보급한 米穀의 양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즉 첫째, 千金에 해당하는 布 64만필 중 반은 米穀 6만 4천석으로 바꾸어 의창에 주고, 나머지 布 32만 필은 상평창에 주어 운영케 하였다는 것이며 (朝鮮總督府 中樞院 編,≪社還米制度≫, 1933, 69쪽), 둘째는 천금을 포로 바꾸면 64만필이 되고 米로 바꾸면 12만 8천석이 되기 때문에, 반은 포 32만필로, 나머지 반은 미 6만 4천석으로 하여 각지의 상평창에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村上四男,<高麗時代の常平倉),≪學藝硏究≫Ⅱ, 和歌山大學, 1951, 207∼118쪽 및 徐吉洙, 앞의 글, 156∼159쪽), 셋 째는 당시 실정으로 보아 千金額에 상당한 穀布를 염출하기 어려워 우선 그 반인 6만 4천석을 내어 자본으로 하였다는 것인데(李丙燾,≪韓國史≫中世篇, 震檀學會, 1961, 166쪽), 이 글에서는 셋째의 의견을 취하였다.
상평창의 관리는 개경의 경우, 市■을 관리·감독하던 京市署로 하여금 穀·布의 가격 변동에 따라 이를 관리·조절하게 하는 한편, 大府寺와 司憲臺가 출납을 공동 관리하게 하였으며, 서경은 分司司憲臺에 위임하였다. 한편 기타 州郡倉은 당해 지역의 관원이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양경의 사헌대에서 이를 관리하게 한 것은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막아 보려는 데 그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상평창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 실태를 알려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인종 원년(1123) 고려에 다녀간 송의 徐兢이 편찬한≪高麗圖經≫에 의해 상평창이 존속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317)徐兢,≪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그러나 이보다 먼저 현종 3년(1012)에 서경이 지난해의 수재와 한재로 인하여 곡가가 등귀하여 백성들이 곤란하게 되었다며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창고를 열어 진휼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는데,318)≪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水旱疫癘賑貸之制 현종 3년 5월. 이 때의 소관 관청이 상평창이었는지 또는 의창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곡가가 등귀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상평창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평창이 처음에는 물가조절 기구로 출발하였지만 뒤에는 진대의 역할도 담당하였기319)李丙燾, 앞의 책, 167쪽. 때문이다.

 또 현종 5년 6월에는 풍년이 들어 쌀값이 떨어져 거친베(麤布) 1필이 쌀 12말이나 되므로 그 값을 조절하도록 삼사에서 건의하므로 이에 따랐다고 한 것으로 보아,32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市估 현종 5년 6월. 상평창이 물가조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삼사에서 이를 건의한 것은, 삼사가 중외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던 기구였으므로 경제의 안정과 농민의 손해를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상평창은 그 실재가 확인된 인종 때까지는 그 기능을 유지하였으나, 그 이후 발생한 내우외환으로 국가적 혼란기를 맞아 의창과 같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보여진다. 상평창이 다시 설치된 것은 충선왕 즉위 년(1308)이었다.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던 충선왕은 여러 도의 務農使 李厚·陸希贄·崔伯倫 등을 불러 “典農司를 설치한 것은 常平倉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糶糴을 실시, 그 급한 것을 구하는 데에 있다”321)≪高麗史≫권 32, 世家 32, 충선왕 즉위년 10월 경자.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때 상평창이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선왕은 얼마 후 아들인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로 갔고, 그 뒤 계속된 원의 수탈과 權門世族의 횡포, 충정왕 이후 창궐한 왜구의 침입은 이러한 제도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상평창은 그 기능이 다시 정지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復置되었으나,32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공민왕 20년 12월. 전국적으로 다시 설치된 것은 공양왕 원년(1339) 대사헌 趙浚 등의 건의에 의해서였다.32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공양왕 원년 12월.

 이와 같이 상평창은 고려 전기에는 그 기능을 유지하면서 존속하였으나, 후기에는 치폐를 거듭하였기 때문에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상평창은 본래 물가조절이 목적이었지만, 고려 475년간 수재와 한재가 평균 2년에 한번씩 일어났기 때문에324)徐吉洙, 앞의 글, 164∼165쪽 참조. 물가조절과 함께 의창과 같이 진대의 기능도 가졌던 것이다. 상평창이 물가조절을 위한 좋은 제도였음에는 틀림없지만, 고려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문제점들이 이러한 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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