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2) 사회시설
  • (5) 혜민국·기타 기구

(5) 혜민국·기타 기구

 惠民局은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고, 약을 제조·판매하기 위하여 설치한 官 藥局으로서 예종 7년(1118)에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판관 4명을 두었는데, 本業(醫官)과 散官 중에서 서로 差任하도록 하되, 乙科權務로서 하였다.33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惠民局. 고 려는 문종대 이래 예종대까지 특히 대송관계에 있어서 의원·약품·의서 등의 교류가 빈번하여 고려 의학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혜민국의 설치는 이와 같은 의학의 발달과 위정자의 관심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고려도경≫에 보면, “普濟寺 동쪽에 藥局이 있었다”고 했는데,334)徐兢,≪高麗圖經≫권 16, 官府 藥局. 이것이 바로 혜민국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太醫·醫學·局生 등이 있어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는데, 이는 의관으로 임명된 판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다른 물건은 모두 물물교환이었으나, 약은 간혹 錢寶로 교역했다는 것으로 보아, 국내외의 약재와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약을 조제하여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쉽게 의원과 약품을 접할 수 없었던 당시에 혜민국의 신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후에 고종이 예종의 혜민국 설치를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여긴 것만 보더라도,335)≪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2년 10월 을미. 이것이 당시에 얼마나 큰 역할을 담당했는지 알 수 있다.

 혜민국 역시 이후로는 다른 구료기관과 마찬가지로 제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 뒤에 충선왕은 이를 司醫署의 관할 아래 두고 활용했으나, 충숙왕 12년(1325)에 이것도 동서대비원 등과 같이 수리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그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혜민국은 공민왕 3년(1354) 惠民典藥局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시대에는 惠民署로 되었다가 고종 때 폐치될 때까지 민질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이외에 기민과 병자를 구제하기 위해 전술한 기구와는 별도로 설치한 것도 있었다. 즉 救濟都監은 예종 4년(1109) 5월 개경에 역질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많이 생기고 심지어는 시체를 거리에 버리는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어 설치한 것이다.336)≪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癘賑貸之制 예종 4년 5월. 그러므로 이 역시 병자의 치료와 빈민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유행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제도감은 상설기구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것으로서 충목왕 4년(1348) 3월에는 같은 목적으로 賑濟都監이, 공민왕 3년 6월에는 賑濟色이 설치되어 기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예종 원년에는 東西濟危都監이 있어서 빈민과 병자를 구휼하기도 하였다.337)≪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3월. 이것은 이미 동·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빈민과 병자의 치료를 담당하는 기구였고, 예종 때에만 있었던 임 시기구로 보인다.

 위의 여러 기관은 때로는 설치 목적대로 운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나, 그 것이 본래 기민의 구휼과 민질의 치료가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역대의 국왕과 뜻있는 관원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 고려 전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예종은 애민정책의 실현자로서 상설기구인 혜민국을, 또 때에 따라서는 구제도감·동서제위도감 등을 설치하여 빈민과 병자를 구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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