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3. 사회정책과 사회시설
  • 2) 사회시설
  • (6) 지방의 의료기구

(6) 지방의 의료기구

 지방에도 민질과 군인·관리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개경 이외의 지역에 의료기구가 처음 설치된 곳은 서경이었다. 즉 태조 13년(930) 서경에 醫學院을 설치하였는데, 의학원의 교수는 생도의 교육뿐만 아니라 관리나 백성의 치료도 담당하였다. 또한 성종 때 설치한 동경과 문종 때 설치한 남경에도 의사가 배치되어 지방의 의료업무를 담당하였다.

 서경의 의학원은 예종 11년(1116) 分司太醫監으로 그 관호가 개칭되었는데, 관원으로는 判監과 知監을 두되 정원은 정하지 않고 본직의 고하로 이를 겸임케 하였으며 8품과 9품의 參外를 각 1명씩 두었다. 그후 명종 8년(1178) 관제를 개정할 때, 서경의 약점에는 부사·판사와 의사 1명, 기사 2명, 의생 5명을 두었다.338)≪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西京沿革. 이 분사태의감의 의관, 약점의 의사·의생 등은 치료와 교육을 병행하였을 것이다.

 서경 이외의 지역에 언제부터 의관을 파견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성종 6년(987) 經學博士와 醫學博士를 12목에 파견해 쓸만한 자를 골라 가르치게 하였고, 또 州縣官으로 하여금 의관 후보자를 천거하도록 한 바 있다.33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6년 8월. 이 때 파견된 의사 역시 의학교육과 함께 치료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지방의 의료시설은 성종 6년 의학박사의 파견을 계기로 확충되기 시작하였고 현종과 문종을 거치는 동안 더욱 확대되었다고 하겠다.

 즉 문종 때부터는 동경과 남경은 물론 大都護府와 大都督府에는 의사 1명 씩을, 防禦鎭에는 醫學 1명씩을 파견해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또한 국 초부터 각 군현에는 의사가 배치되어 민질의 치료를 담당하였다.340)≪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癘賑貸之制 공민왕 20년 12월. 그러나 인구에 비해 의사의 수가 적어 귀하게 되니 거만해져 이들 악덕 의관에 대해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가 있을 정도였다. 이에 고려 말기에 이르면 가난한 자는 치료도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니 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즉 의관은 관아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환자의 집에서 요청하면 즉시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富豪가 아니면 불응하는 사례까지 있었던 것이다.341)≪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공민왕 4년 3월 憲司上疏. 따라서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었던 당시에 있어서 의료의 혜택은 고루 미치지 못하였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노비와 같은 천민은 치료도 받아 보지 못하고 죽어 길에 내다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이러한 지방의 의관과는 별도로 경향 각지에 설치된 것으로 藥店이 있었는데, 이것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이었다. 주·부·군·현에 설치되어 있던 약점의 기능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개경의 혜민국과 같은 업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약점의 설치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지방에는 현종 때에, 서 경에는 문종 때에, 그리고 개경에는 예종 때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342)孫弘烈, 앞의 책, 115쪽 참조. 이와 같이 지방에 먼저 약점이 설치된 이유는 개경과 서경에는 이미 대비원·제위보 등의 의료기관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의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므로 이곳부터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경의 약점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부사·판관·의사·기사·의생 등이 있었고, 기타 지방의 약점에는 인구에 비례하여 藥店司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약점사는 鄕吏職 중의 의직으로서 현종 9년(1018) 주·부·군·현의 이직을 개정할 때 새로 설치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1,000정 이상의 지역에는 4명씩, 500정과 300정 이상의 지역에는 2명씩, 그리고 100정 이하의 지역에 는 1명씩 배치하였고, 동·서의 諸防禦使와 鎭將 및 縣令官의 관할 지역에는 1,000정 이상에서 100정 이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2명씩 배치하였다.343)≪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鄕職 현종 9년.

 문종 때에 이르면 약점사의 상위직으로 藥店正과 藥店副正이 나타나는데, 약점정은 副戶正에 준하고, 副正은 州府郡縣史에 준하는 것으로서, 약점사와 함께 지방의료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약점의 정·부정·사 등은 같은 鄕職이라 하더라도 호장·부호장·병정 등의 행정직과는 다른 특수직이었다. 그것은 약점사가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점사는 의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의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 중에서 선발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이 지방의료의 일부를 담당하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약점에는 공해전을 두어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게 하였는데, 서경의 약점에 7결을 지급한 것으로 보아,3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公廨田 명종 8년. 개경의 혜민국을 비롯한 각지의 약점에도 공해전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전국에 설치되었던 약점이 국민 보건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중의 질병치료와 더불어 藥材의 채취와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약점의 향리와 지방 의관과의 관계도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다 같이 지방 의료에 간여한 것은 사실이므로 서로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에 審藥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향리직 중에 이러한 의직이 있었던 때는 고려시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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