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
  • (1) 당송변혁기 중국의 정치적 동향

가. 당의 멸망과 5대 10국의 분열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던 무렵 중국은 각 지역에 군벌(節度使)이 할거하는 藩鎭割據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잃고 있었던 당나라는 마침내 하남의 宣武節度使 朱全忠에게 멸망되고 後梁(907∼923)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처럼 당제국을 멸망시킨 후량이었지만 그 지배영역은 황하연안의 중원지방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후량은 곧 다른 군벌에 의해 사라졌으며, 이러한 세력 교체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양자강 이남에는 이들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군웅들이 할거하여 10여 개의 독립정권이 난립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당말의 분열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 시기를「5대 10국시대」라 부른다.

 즉 5대는 주전충의 후량을 비롯하여 李存勗의 後唐(923∼936), 石敬瑭의 後晉(936∼946), 劉知遠의 後漢(947∼950), 郭威의 後周(951∼959)가 서로 싸우며 중원의 지배자로 흥망을 거듭했던 시기를 말하며, 그 이남의 10국은 吳·南唐·前蜀·後蜀·南漢·楚·吳越·閩·南平 및 후한에서 갈라져 나온 北漢 등을 칭한다.439)李龍範,<10∼12세기의 國際情勢>(≪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215∼ 217쪽 참조.

 이 5대 10국은 남당을 세운 李昇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 말기의 절도사출신 무사들이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을 무사출신에 의한「무단정치기」라고도 불리 운다. 이렇게 절도사의 힘이 커지게 된 것은 8세기 중엽 현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 때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도망인구, 즉「逃戶」의 급증이었다. 이는 국가재정 수입의 타격과 부병제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변국가 의 성장으로 변경 방위체제(鎭戍制)에 의한 방위만으로는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진수제와는 별도로 수천 명 혹은 그 이상으로 구성되는 軍 鎭을 변경에 배치하니 현종 중기에 이르면 이 군진의 병력은 50만에 달하여 변경방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背軍·逃兵이 늘고 富家들의 병역기피가 만연하여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군진은 통할하는 藩鎭을 설치하고 그 최고 지휘자로 절도사를 두니 天寶 원년(742), 전국 변경에는 10명의 절도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점차 문관들이 절도사 부임을 꺼려하자 전국 번진의 절도사는 모두 무관들로 바뀌고, 계속되는 중앙의 부패와 사치로 각 번진의 군사비조차 내려보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각 번진의 경비는 절도사 개인의 능력에 일임되어 자연 무신절도사의 번진내에서의 영향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755년 平盧節度使 安祿山의 亂은 번진의 전국적인 확대와 절도사 권한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9년 동안이나 지속된 안사의 난을 진압키 위해 국가에서는 종래 변경에만 설치하였던 번진을 경조부와 하남부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하였으며, 지금까지 軍政權만을 장악해온 절도사에게 觀察使와 州刺史의 직책을 겸하게 함으로써 절도사는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이것은 다시 당나라의 지방통치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와 중앙정부와 주 사이에 번진이 설치되어 한 번진이 2∼3개의 주, 혹은 10여 개의 주를 관장하게 되었으며, 절도사 아래에 州院과 使院이라는 별도의 지배기구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써 권력이 강화된 번진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분권적이며 반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번진은 官建(牙軍)과 團練의 이중적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 단련은 지방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농한기에 소집된 병사로 절도사와 주 종관계를 갖지 않는 존재이다. 하지만 관건은「관의 健兒」라는 의미로 관으로부터 모든 생활기반을 제공받는 용병으로 번진병력의 중추였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관인 절도사조차 폐립하고 아군 장교 가운데 새로운 인물을 옹립할 정도로 자신의 생활기반에 매우 민감한 존재였다.440)辛聖坤,<唐宋變革期論>(≪講座 中國史≫2, 지식산업사, 1989), 22∼36쪽.

 따라서 당말 5대의 권력핵심은 절도사가 거느리고 있던 사병집단인 아군 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강력한 아군을 거느리고 있는 절도사는 기존의 왕을 누르고 새 왕조의 군주가 될 수 있었으니 각 절도사들은 아병 양성에 주력하게 되었다. 만약 양성한 아병의 힘으로 그들 상관인 절도사가 황제가 되면 그 아병은 황제의 禁軍이 되는 것이고, 그 아병을 지휘하던 장군은 절도사로 승진하여 지방통치의 새로운 실력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절도사는 다시 자신의 직속 군사력인 아병의 강약에 따라 새왕조의 군주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5대의 난맥상은 계속될 수만은 없었다. 언젠가는 승자에 의해 통일정권을 이루게 되듯 바로 중원에서의 후량과 후진의 전쟁은 통일을 위한 과정이었다. 후량의 주전충은 黃巢집단의 후신으로 통치자로서의 자격은 없었다. 게다가 주전충은 아들 朱友珪에게 피살되고, 우규는 다시 동생 友貞(末帝)에게 피살되는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와 같이 왕실 내부의 혼란상 이외에도 후량의 영내인 하북지방에는 당 이래로 군벌들이 魏州 중심으로 반독립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안록산집단의 잔당이었는데 이 위주군벌들이 후량을 배반하고 후진에 항복하니 결국 후량정권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즉 진왕 이존욱은 위주병을 선두로 삼아 개봉까지 쳐들어가 형제의 모반을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말제를 살해하고 새 왕조를 건국하였다. 이존욱은 자신의 성이 李氏라 하여 大唐의 뒤를 잇는 뜻에서 국호를 唐이라 하고, 수도 역시 낙양으로 정하고 즉위하니, 이가 곧 莊宗이다.

 후당의 성립으로 일단 하북의 3대 군벌은 통합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세를 몰아 陝西省 부근의 岐(924)와 甘肅省 일대의 前蜀(925)을 멸망시켜 최대 강국을 이루니, 이것은 곧 혼란했던 중원에 통일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 통일은 장종에 의해 주도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장종의 秕政(失政)으로 즉위 3년만에 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배우로서 연기까지 할 정도로 악극을 좋아하여 주위의 배우나 내시와 같은 측근들의 정치개입을 묵인하였다. 또 재상에 등용된 孔謙은 온갖 착취를 일삼았으며, 환관을 監軍으로 삼아 여러 절도사를 감시하게 하니 정치는 더욱 부패해지고 정권다툼을 둘러싼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441)≪資治通鑑≫권 273, 後唐 莊宗 同光 2년 정월. 이러한 실정으로 장종은 유력한 아군을 소유한 양아들 李嗣源(明宗)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명종은 재위 8년 동안 개혁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였지만 그를 이은 閔帝 역시 李從珂(廢帝;명종의 양아들)에게 폐위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중앙정권이 어수선할 무렵 河東節度使 石敬瑭(高祖)은 거란의 협조를 얻어 4대 14년 만에 후당을 멸망시키고 後晉을 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후진의 건국이 종전처럼 아병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북방민족 거란족의 도움으로 세워졌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중원의 분열을 이용하여 후진에 군사력을 제공한 거란은 그 대가로 후진의 臣禮를 받고, 금백 30만 필의 세폐와 지금의 북경지방에서 산서성의 북부에 걸쳐있는 소위「연운 16주」를 양도받았다.442)≪資治通鑑≫권 280, 後晉 高祖 天福 원년 9∼11월. 특히 이 연운 16주의 소유는 중원지방에 遼라는 거란의 정복국가가 들어설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한 것이다.

 석경당은 무분별한 할지약속으로 후진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재위 7년 만에 석경당이 죽고 그의 후임으로 石重貴(出帝)가 즉위하였는데, 출제가 즉위할 당시 조정에서는 민족적 국수론이 일어나 거란과의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며 세폐를 중단하였다. 그리고 고조 석경당의 죽음을 알리는 告哀使를 거란에 파견하면서도 稱臣을 거부하였다. 이에 거란 태종은 상국의 허가없이 신왕이 즉위한 사실에 분노하며 책망하는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후진은 오히려 군사력에 자신감이 넘쳐있어 거란의 침입을 유도하였다.443)≪資治通鑑≫권 283, 後晉 高祖 天福 7년 12월.
≪舊五代史≫권 88, 列傳 3, 景延廣.
이에 거란 태종은 군대를 이끌고 후진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漢人의 군대를 물리친 거란은 이듬해(947) 2월 나라이름을「大遼」라 하여 중국식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제도의 개편을 단행하며 帝國수립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후진이 멸망하는 혼란을 틈타 터어키계로서 唐代에 용맹을 떨친 바 있던 사부타 출신의 하동절도사 劉知遠은 後漢을 건국하였다(947). 하지만 유지원의 후한은 아들 隱帝 즉위 3년 만에 아군에 의해 옹립된 禁軍部長 郭威에 의해 멸망하고 後周가 세워짐으로써 역대 중국왕조 가운데 가장 단명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유지원은 이미 석경당의 부하로 있을 때 석의 할지정책이 중원에 끼칠 후환을 걱정하며 이를 반대한 자이며, 후한 건국 후 재위 1년간 보여준 거란에 대한 자주적인 자세는 주목할 만하다. 즉 대요를 세운 거란 태종은 연운 16주를 발판으로 삼아 남진정책을 계속하였는데 거란의 학정에 시달린 한인들은 유지원을 중심으로 거란에 대한 항쟁의식을 키워 갔다. 뿐만 아니라 많은 지방의 무장들과 군벌들조차 거란진영을 떠나 후한군에 투항해 하나로 뭉쳤기 때문에 거란 태종은 중국지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당·후진·후한 등 3대로 계속된 이민족의 왕조에서 다시 한족의 왕조를 되찾은 후주의 곽위는 하급군인에서부터 출발한 자로 전란에 시달려 온 인민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란의 침입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내정 개혁에 착수하는 등으로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특히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아들 世宗은 5대 분열기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군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또한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광종에 의해 중용된 귀화인 雙冀가 바로 후주인이며, 당시 고려가 취한 과거제 실시, 백관의 복식개정 등은 후주 세종의 개혁정치와 밀접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세종은 곽위(高祖)의 정책을 계승하여 조세를 삭감하고 황하의 치수에 힘쓰는 한편 황폐된 토지를 개간하며,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던 불교계를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폐단이 많았던 아군에 대하여도 제재를 가하여 5대의 분열을 마감하며 통일로 나아가는 기운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통일의 숙원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고 근위대장 趙匡胤이 황제위에 오르니 이로써 통일의 대업은 宋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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