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1. 10∼12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고려의 북진정책
  • 2) 고려의 북진정책
  • (1) 국초 북진정책과 발해유민 대책

(1) 국초 북진정책과 발해유민 대책

 태조 왕건은 건국 이후 후삼국 통일이란 남방문제와 고구려 고토 회복이란 북방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가 고려를 창업한 직후부터 북진의 대상지역에 있던 여진을 포함한 발해유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당의 멸망(907) 이후 송왕조의 성립(960)까지 50여 년간 5대의 정치적 혼란기가 전개되었다. 한편 10세기초에는 遼河 상류에 흘러들 어가는 시라무렌강 유역 유목민족의 하나인 거란족이 흥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아시아 정세변화에서 주요인물이 된 耶律阿保機는 거란족 통일을 추진하는 한편,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여 만리장성 남쪽지역까지 여러 차례 진출해서 한족 포로를 붙잡아다가 그들의 생산력을 이용하여 경제역량을 키워갔고 마침내 축적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916년에는 거란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天顯 원년(926) 정월에는 渤海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東丹國을 세워 장자 培를 동단국 왕에 봉하고 그의 동생 迭刺로 左大相을, 발해 老相을 右大相으로 삼으며, 그 아래 발해 司徒 大素賢과 耶律羽之를 각각 左右次相으로 삼아 통치하게 하였다.465)≪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天顯 원년 2월 병오.

 이로써 발해는 해체되고 동단국이 거란의 괴뢰로서 발해고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동단국이 겉으로는 거란과 발해 구귀족의 연합으로 성립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거란의 괴뢰국가였다. 그러나 이 때 거란이 차지한 지역은 사실상 발해고토의 서반부지역에 불과했다.466)≪滿州源流考≫권 6, 部族. 그나마 거란 점령 밖에 있던 南海 이하 3府는 이미 천현 원년 3월부터 반란을 일으켜 왔는데, 이 때가 바로 동단국 건립 바로 다음달이다.467)≪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天顯 원년 3월 기사. 그리고 5월에는 다시 남해부와 定理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지역을 포함한 발해 동반부지역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거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사실상은 거란의 간섭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독자적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다수의 발해유민 집단이 할거하게 되었다.

 天寶 4년(925) 야율아보기의 급사로 인하여 대권이 차남 德光에게로 넘어가니 그가 곧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 초부터 동단국왕 배와의 미묘한 관계에서 동단국의 운영에 신경을 써오다가 드디어 천보 3년에는 동단국의 본거지를 忽汗城(옛 발해 상경)으로부터 감시가 편리한 遼陽(遼 東平府)으로 옮기게 하였다.468)≪遼史≫권 38, 志 8, 地理志 2, 東京道. 동단국의 요양으로의 서천은 발해 점령지역에서의 후퇴를 뜻하는 것으로 송화강 유역에서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동북만주에 대한 실질적 통치를 포기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동단국의 서천은 국초부터 북진을 추구하던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힘의 공백기로 남아 있는 동북만주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하지 만 당시 고려는 남쪽의 후백제와의 전쟁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태조 11년(928) 7월의 三年山城에서의 패전에 이어 9월에는 烏於谷城이 후백 제에 함락되어 城兵 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어서 다음해 7월 견훤군의 義城府 공격으로 성주장군 洪術이 전사하였다. 연이은 패전에 홍술까지 잃은 태조는 “내 左右의 팔을 잃었다”46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11월.라고 통분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13년 정월의 古昌 郡 결전은 고려나 후백제 양국 모두에게 永安(安東)·河曲·直明·松生(靑松) 등의 慶北 일대지역을 건 대결전이었다. 다행히 고려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영안·송생 등 30여 군현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이렇듯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던 시기에 군사력을 양분하여 남북으로 적을 갖는다는 것은 고려로서는 승산없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후백 제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고구려 고토 회복의 절호의 기회를 일시 포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건국하기 전인 신라 하대에 이미 발해와 말갈족(후대 女眞)의 남침에 대비한 전략의 일환으로 서북쪽에 浿江鎭을, 동북쪽에 北鎭을 설치한 바 있다. 지금의 황해도 평산지방에 그 본영을 둔 것으로 보여지는 패강진은 대체로 예성강 이북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에 걸치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삼국 초기에 패강진 일대가 궁예에 복속된 것은 이 지방 세력가와의 봉건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편입된 것으로, 패강진 지역이 궁예에 복속되기 이전에 이 지역에는 이미 호족세력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예는 바로 이들과 지배·복속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따라서 왕건세력집단은 일차적으로 송악지방에서 형성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패강진 지역과의 연결 가능성은 크다 하겠다.470)李基東,<新羅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그러므로 왕건이 궁예를 대신하여 왕이 됨으로써 자연히 패강진 지역은 고려의 판도에 들게 되고 북진정책의 추진과 함께 이 지역은 북진의 전초기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의 庾黔弼이나 尹瑄 등은 대여진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독자적으로 여진과의 교섭을 통해 여진에 대한 이해와 기미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이들의 협력 과 조언은 태조의 정책결정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건국 당시 이 지역이 이미 고려의 판도로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이 서북계 북방영토 확장의 기반이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왕이 뭇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평양의 옛 도읍이 황폐한지 이미 오래되어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하니 마땅히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여 蕃屛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黃州·鳳州(鳳山)·海州·白州(白川)·鹽州(延安)의 여러 고을의 人戶를 나누어 평양에 살게하여 大都護를 만들고 堂弟 式廉과 廣評侍郎 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參佐 4, 5명을 두게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9월).

 위 사료를 통해 태조는 즉위 직후 여진인의 활동지역으로 변한 평양을 개척하여 새로운 북진의 전진기지로 건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대한 徙民 관계 기사는≪고려사≫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즉 “이 해에 大丞 質榮과 行波 등의 부형 자제 및 여러 군현의 양가 자제들로 서경을 채웠다”47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라고 한 것인데, 이로써 관리 자제와 양가 자제도 사민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西京開拓과 鎭戍의 목적의 하나가 바로 여진족의 진출에 대비하 고자 한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주·봉산 등의 민호를 사민할 때, 양가 자제는 물론 고관을 지낸 인물들의 부형 자제들도 함께 사민한 것으로 고려정부의 서경 개척과 진수에 대한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태조의 이러한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한 결연한 태도도 남방의 강적인 후백제와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추진을 유보한 상태로 있다가 고려가 삼국간의 쟁패에서 능동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 태조 10년(927) 이후에야 본격적인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태조 11년 2월에는 淸川江岸의 요새지인 지금의 安州 땅에 大相 廉相 등을 보내 성을 쌓고, 元尹 朴權으로 鎭頭를 삼아 開定軍 700명을 거느려 지키게 한 데 뒤이어 通德鎭(현 肅川)을 축설하였다. 다시 같은 해 9월 安水鎭(현 价川)이 설치됨으로써, 마침내 고려의 서북방 경계가 청천강까지 닿을 수 있게 되었다.472)≪高麗史節要≫권 1, 태조 11년 2월.

 고려의 영토가 청천강까지 넓혀진 이후의 서북계 경략의 주요정책은 계속 해서 북상을 기도했다기 보다는 기왕에 확보한 지역에 대한 개척과 거란 및 여진의 침입에 대한 방어에 주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태조의 동북지방 경영은 태조 원년 8월에 朔方 鶻巖城師 윤선이 고려에 來歸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윤선은 패강진 세력과 관련있는 염주인으로 궁예 말기에 궁예의 박해를 피하여 염주 일대에서 자기 세력을 키워온 자이다. 그러던 중 골암성 지역으로 옮겨가서 흑수 등 여진인과 통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왔다.

 처음에 그는 신라나 泰封(뒤에는 고려)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된 세력으로 독자노선을 유지하다가 고려의 건국으로 궁예로부터의 위험이 사라지자 태조의 회유에 응하여 고려에 내투한 듯하다.473)≪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尹瑄. 골암성은 지금의 安邊 부근지역으로 고려에 예속된 후에 유금필이 개정군 3천을 이끌고 나가 진주하여 인근 여진을 위압으로 복속시키기 이전까지는 여진의 침략이 빈번했던 동북방의 최북단 지역이었다.474)≪高麗史≫권 92, 列傳 5, 庾黔弼. 태조 5년(922) 7월에는 溟州將軍 順式이 내부해 오자 태조는 순식의 세력권인 북진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國姓을 하사하고 大匡을 拜하는 등 그를 우대했다.475)≪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北鎭에 관해서≪三國史記≫新羅本紀에 “왕은 河瑟羅 지역이 靺鞨과 접해 있어 사람들이 편안할 수가 없으니 京을 파해 州로 삼고 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悉直으로서 北鎭을 삼았다”476)≪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5년 3월라고 한 기록으로 그 설치의 일단을 살필 수가 있다. 그 설치시기는 고구려 멸망보다 9년 앞선 659년으로 고구려 말기에 말갈이 서서히 고구려의 기미를 벗어나면서 신라 북변을 침범해 오기 시작하자 신라는 그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北小京을 파하여 何瑟羅州로 삼고 새로이 북진을 설치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하슬라주(江陵)가 말갈의 거주지와 접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신라의 영토가 삼국통일의 결과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선으로 북상함에 따라 말갈 住地의 상당한 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던 말갈족의 행방을 新羅 九誓幢 중 말갈인으로 구성된 黑衿誓幢의 존재와 관련지워 추적해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말갈족은 신라에 복속된 뒤 신라에 편입되었거나 혹은 원산만 이북지역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한편 고려 건국 초기에는 신라 하대 이래로 동북면 일대에 존재했던 여러 독립적 지방세력들이 고려에 대항하다가 대세에 따라 고려에 내투해 왔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은 앞에서 언급한 윤선·순식 등의 세력이었는데 그들의 내부는 고려 태조의 북방경영과 대후백제 투쟁에 큰 힘이 되었다.477)≪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특히 골암성과 명주 세력의 고려 귀속은 고려와 동여진의 관계개선 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윤선같은 인물은 일찍부터 여 진 인접지역에서 여진과의 교섭을 통해 세력을 키운 경험이 있어 태조의 대여진정책에 좋은 조언자 구실을 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태조 4년 2월에 흑수 추장 高子羅가 그 무리 170여 명을 거느리고 내투한 것이라던가, 같은 해 4월에 黑水人 阿於閒이 그 무리 200여 명을 거느리고 내투한 이면에는 유 금필이나 윤선 등의 작용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478)≪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4년 2월·4월.

 그러나 고려 태조대의 동북면 拓境은 통일신라시대의 경계에서 크게 북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거란과의 대립과 투쟁에 있어 보다 주요한 전략적 지역은 서북면이었고 따라서 국경개척과 이민정책도 서북면 지역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양에서 永興을 경계로 그 이남은 고려 건국 당시 이미 확보한 지역이었으므로 각 읍마다 土姓이 있는 반면, 그 이북지역에는 토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진족이 살고 있던 지역을 고려가 차지하여 그들을 축출하고 남부 주민을 이주시켰던 지역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479)李樹健,<高麗時代 北方移民에 대하여>(≪徐廷德敎授華甲記念學術論叢≫,1970).

 태조의 여진에 대한 회유와 기미책은≪고려사≫ 등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몇몇의 소략한 기사 내용만 보아도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여진의 전투력을 후백제정벌에 이용한 것은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즉 태조 19년(936) 후백제와의 최후 일전을 벌인 一利川 會戰에서 유금필 등이 黑水·達姑·鐵勒 등 諸蕃의 騎兵 9천 5백을 이끌고 참 전한 기록이 그것이다.48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9년 9월. 9천 5백이란 방대한 규모의 여진인 기병을 동원하 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구성원들 모두가 내투한 자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만한 규모의 여진출신 기병을 동원한 것만 가지고도 태조대에 있어서 대여진정책의 성공을 감지할 수 있다.

 태조의 북방정책을 규명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발해유민의 성격과 來附遺民의 처리에 대한 이해이다.≪고려사≫ 태조 세가에 발해인의 내부 기사가 산견되는데, 고려가 실제로 무제한이라 할만큼 많은 渤海遺民을 받아들인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먼저 대거란정책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조가<訓要十條>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라고 강조한 것과 태조 25년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치고 和好를 청하자 사신을 孤島로 流配시키고 交聘을 끊은 것으로도 충분히 대거란 강경책의 정도를 알 수가 있다.48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5년 10월.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태조의 거란에 대한 적대감에서 취해진 것만이 아닌 북방정책에 있어서의 원대한 포석의 하나로 취해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발해의 지배층은 高句麗系이었다. 그리고 발해 의 지리적 위치가 거란의 연운 16주에로의 진출로 인해 後唐 등 5대 왕조와 는 연결이 어렵게 된 반면, 고려와는 남계를 접하거나 근거리에 있었으므로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그 유민들은 자연히 고려쪽으로 내투를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의 이민족에 대한 소극적인 來投許容政策은 태조대로부터 1세기 정도 경과한 후에 나타난 기록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즉 문종때 이미 옛 제도에 따라 본국 변방민으로 蕃賊에게 납치되었다가 고국을 생각하여 스스로 돌아온 자와 宋人으로 재예가 있는 자, 이외에 黑水女眞과 같은 자는 모두 입주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482)≪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5년 8월 기미. 국초부터 이민족 내투를 억제하고 있었다. 반면 발해유민의 경우는 이와 달리 태조 8년의 장군 申德의 내투를 허락한 이래로 고려로 내투해 오는 발해유민 일체를 제한없이 계속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같은 달에 발해 禮部卿 大和鈞과 均老司政 大元鈞, 工部 卿 大福■, 左右衛將軍 大審理 등이 民戶를 이끌고 내부해 온 데 이어 동왕10년에도 발해 工部卿 吳興 등 50인과 僧侶 載雄 등 60인이 내투해 왔다.48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8년 9월 병신·경자 및 태조 10년 3월 갑인. 그 후에도 내투는 계속되어 태조 21년까지 내투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484)≪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1년. 그런데 이 내부한 인물들이 장군·예부경·사정·공부경 등 고급관리나 학자·군부 및 사회의 지도급 인물이었던 점이 주목된다.

 처음 내투하기 시작한 태조 8년(925)은 발해 멸망 직전으로, 이 때 내투한 사람은 거란과의 전투에서 고립되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인물들이 내투한 경우이다. 그러나 태조 8년 이후의 내투는 발해국권의 상실과 함께 거란의 지배를 피해서 고려로 온 자들이었다.

 그러면 태조 8년부터 21년까지 10여 년 동안 고려에 합류한 발해 유민수는 대략 어느 정도였을까. 그에 관해서는 일찍이 柳得恭의≪渤海考≫에서 산출된 숫자로는 10여 만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유민의 합류는 고려인의 상당한 증가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는 후백제와의 대결이 치열했을 때이므로 발해로부터 내투한 고급인력을 대후백제 투쟁에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가을 7월에 발해국의 태자 大光顯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내투하거늘 성명을 王繼라 하고 宗籍에 附籍하여 특히 元甫를 제수하고 白州를 지키게 하여 그 祭祀를 받들게 하였다. 僚佐에게는 작위를 주고 軍士에게는 田宅을 차등있게 주었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7년 7월).

 발해국 세자 대광현이 내투한 시기는 태조 17년(934)으로 후백제 멸망에 2 년 앞선 해이며, 발해 홀한성이 함락된 지 7년이 경과된 해였다. 이 때에 발 해국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내투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사실상 발해 동반부의 諸州들은 그 부흥을 위해서 거란에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했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려에 내부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는 대광현 등의 내투를 상당히 중요시했던 듯하다. 왜냐하면 이 때 내 부한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줌과 동시에 고려왕족에 편입시켰을 뿐 만 아니라 그 막료와 군사에 이르기까지 전택을 하사하는 특전을 내린 뒤에 서북면 전략상 요지인 白州(白川)를 지키게 하는 등 특별히 신경을 쓴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주는 태조 15년(932) 9월에 후백제의 一吉粲 相貴가 수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전선을 불태우고 軍馬를 약탈한 적이 있던 곳으로 예성강을 끼고 수륙으로 통할 수 있는 서부의 전략상 요충지였다.48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9월. 그러므로 대광현으로 하여금 그가 이끌고 온 수만의 무리 가운데 상당수를 직접 거느리고 백주를 수비하게 한 것은 발해유민을 우대하고 그들의 능력을 이용한 좋은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광현의 예와 같이 수만의 무리가 함께 내투하여 전략상 요충을 담당하여 임무를 수행한 기록은 더 이상 살필 수 없다. 다시 말해 태조 8년으로부터 21년에 이르기까지≪고려사≫에 기록된 내투 인원만도 상당한 숫자에 달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투 후의 고려에서 활약한 기록을 자세히 남기지 않고 있어 그 활약상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에 고려가 처해 있던 제반여건이나 내투한 발해유민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의 대후백제 투쟁이나 왕건의 세력기반 확충에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태조 왕건은 중국 동북지역의 정세변화와 여진을 포함한 발해유민의 대거란투쟁을 잘 이용하여 청천강의 자연적 경계선까지 영토를 북상시킬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진의 기병과 내투한 고구려계 발해유민의 고급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후백제와의 투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나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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