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1) 5대와의 관계
  • (1) 태조대의 대중국관계

(1) 태조대의 대중국관계

 태조 왕건으로서는 대내적으로 강력한 왕권의 확립 못지 않게 국제적으로 새로 건국한 국가의 위상을 인정받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태조 재 위 26년 동안 12회에 걸쳐 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였다.515)사절의 파견 횟수는 약간의 차이를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李基白,<高麗初期에 있어서의 五代와의 관계>(≪韓國文化院論叢≫1, 梨花女大, 1959), 76쪽을 참조하였다.

 태조 왕건의 중국에 대한 외교기록은 중국측의 것이 우리측 기록보다 조금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중국측 기록인≪資治通監≫권 270, 後梁紀 均王 貞明 5년(919) 7월조에는 “이 때 佐良尉 金立奇를 吳越에 보내 入貢케 하였다”고 하여 중국과의 통교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바로 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그 이듬해이다. 이처럼 태조는 건국하자 대중국 통교의 상대로 당의 계승 국가임을 자처하는 후량보다 오히려 오월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당시는 아직 후삼국이 다투고 있었고 특히 고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후백제와 오월과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였기 때문에 외교대상국의 우선 순위를 오월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16)金在滿,<五代와 後三國·高麗初期의 關係史>(≪大東文化硏究>17, 成均館大, 1983), 174∼175쪽 참조.

 그런데 바로 태조 2년(919)의≪高麗史≫기사에도 오월과 교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즉≪고려사≫世家 태조 2년 9월조에 “오월국의 문 사 酋彦規가 귀순하였다”는 것인데, 이로써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중국과의 통교에 역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태조 6년 6월에 福府卿 尹質이 5대의 첫 왕조인 후량(907∼923)에 사절로 갔다가 五百羅漢像을 가지고 왔는데517)≪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6년 6월. 바로 같은 해 같은 달에 오월국의 문사 朴巖이 귀순하여 왔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당시 고려로서는 국내의 사정도 후삼국의 혼란기이며 중국 역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월과 후량에 대한 동시외교를 갖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후량의 뒤를 이어 후당(923∼936)이 건국되었다. 후당과의 관계는 고려에 앞서 신라가 국교를 통하고 있었다. 중국측이나 우리측 기록 모두 후당이 건국된 923년에 신라의 사신이 후당에 파견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518)≪■府元龜≫권 972, 外臣部 17, 朝貢 5.
≪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7년 7월.

 이렇게 신라가 빠르게 후당과 통교를 행하자 고려도 후당과의 통교를 서둘렀다. 태조 왕건은 신라가 통교를 시작한 3년 뒤인 태조 9년에 張彬을 후당에 사절로 파견하였으며51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9년. 이듬해인 태조 10년에도 林彦을 후당에 보냈다 그런데 이 두 사실이 중국측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보다 앞선 925년의 기록이 보인다.520)≪舊五代史≫나≪新五代史≫에는 後唐 同光 3년(925) 11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간단하게 보이며≪■府元龜≫권 972, 外臣部 17, 朝貢 5, 同光 3년 10월조에 “高麗國에서 韋伸을 보내 方物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한편≪五代會要≫高麗傳에는 같은 해인 同光 3년 11월 고려에서 正使 韓申一과 副使 朴巖을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한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韋伸과 韓申一이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우리측 기록보다 중국의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1년 앞서 통교가 시작된 것을 전하고 있다.

 여하튼 후당이 건국된 지 얼마되지 않아 고려의 사신이 도착하자 후당 조정에서는 고려사신에 대한 예우와 외교격식 등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5년이 지난 고려 태조 11년(928;후당 明宗 天成 3)에 비로소 종래 신라와 발해에 대한 예에 의거하여 고려에 보내는 외교문에 書體詔樣을 쓰기로 했다.521)≪五代會要≫권 13, 翰林院, 後唐 天成 3년 12월 2일. 이를 계기로 하여 후당과 고려 사이에는 새로운 차원에서 정식국교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522)金在滿, 앞의 글, 183쪽. 태조 11년에 신라의 승려인 洪慶이 후당의 閩府로부터 대장경 1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으로 들어오니, 왕은 친히 그를 영접하고 대장경을 帝釋院에 보관케 하였다.

 이로써 태조 8년 이래로 고려의 일방적인 사신파견에 별 호응을 보이지 않던 후당이 태조 11년에 이르러 새로운 태도로 고려를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동안 후당에 대하여 신라가 적극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며 조공을 하였기 때문에 후당에서는 한반도의 정세를 그때까지 신라 중심으로 보아왔으나 이제 한반도의 정세가 고려 중심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게되자 후당의 외교정책이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후당의 변화에 고려에서도 후당과의 외교에 더욱 관심을 보여 이듬해인 태조 12년 8월에는 대규모의 國信使를 파견하였다.523)이 때의 國信使 파견에 대한 고려측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측 기록에 고려로부터 52명의 사절일행과 여러 종류의 많은 朝貢品이 보내진 것이 보인다(≪五代會要≫권 30, 高麗, 後唐 天成 4년 8월). 이러한 양국 외교정책의 변화는 중국과 한반도의 전통적 외교관계를 고려가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후당과의 국교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고려 태조는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北蕃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로 복종과 배반을 기준없이 하므로 그들을 접대할 때는 각 州나 鎭의 성 밖에 여관을 따로 지어 대접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북번은 거란족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가 후당과 원만한 국교를 위해서 후당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거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외교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되어 이후 거란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524)金在滿, 앞의 글, 184쪽.

 하지만 후당에 대한 고려의 확실한 태도 표명은 양국관계를 더욱 밀착시켜 북방민족을 대하는 조서를 내린 이듬해인 태조 15년에는 왕건이 후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기에 이른다.525)≪舊五代史≫권 43, 唐書 明宗紀 9, 長興 3년 7월조에 “… 正衛命使■高麗國王王建”이라 하여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한 사실이 보인다. 이 때 책봉은 그 해 7월에 이루어졌는데, 이에 관한 고려측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舊五代史≫長興 3년(932) 3월 조에 “高麗國 遣使朝貢”이라 하였으며,≪고려사≫세가 태조 15년조 끝부분에 “이 해에 大相 王仲儒를 당에 보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구오대사≫에서의 사신은 곧 왕중유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후에 바로 책봉의 조서가 내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때 당에서 王瓊과 楊昭業을 보내어 책봉하였으며526)중국측 기록과 1년의 차이가 나지만 동일한 사건을 말한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책봉을 하게 된 이유는 고려왕이 군사상 주도권을 잡았으며 본토를 장악하여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으므로 전례에 따라 특권을 준다527)≪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6년 3월.는 것이었다.

 이 이후로 우리측에 보이는 후당과의 관계기사는 후당이 멸망하기 직전인 태조 18년에 禮賓卿 邢順을 파견한 기록이 보인다.528)≪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말미. 그러나 중국측 기록에는 책봉관계 이후 매년 사절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529)≪■府元龜≫권 972, 外臣部 17, 朝貢 5, 廢帝 淸泰 원년 8월·2년 10월·12월. 후당과 고려의 마지막 외교관계는 후당이 멸망하는 淸泰 3년(936) 정월에 이미 입국해 있던 고려사신 王規 등 30여 인을 전례에 따라 성대하게 예우한 경우이다.

 후당이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後晋이 건국되었다(936). 이에 고려에서는 태조 20년(937;후진 天福 2), 후당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왕규와 형순을 후진에 보내어 高祖 石敬瑭의 등극을 축하하였다.530)≪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0년 5월. 이러한 고려使行의 사실이 중국측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이 때의 사행이 있은 다음해인 태조 21년 7월부터 고려에서는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53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1년 7월. 이어서 태조 22년에는 후진에서 國子博士 謝攀을 보내어 왕을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로 책봉하고 기타 관작은 전과 같이 한다고 알려왔으며, 이듬해 12월에는 후진에서 고려의 인질 王仁翟을 돌려보냈다.532)≪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3년 12월.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五代會要≫권 30, 高麗傳에 보면 質子 王仁翟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은 후진 天福 3년(938;고려 태조 21) 8월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후진으로부터 인질의 귀국이 허락되고 나서 실제로 귀환하기까지는 2년이 걸린 셈이다.
다음해에는 고려에서 大相 王申一을 토산물과 함께 후진에 보냈다.533)≪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4년.

 태조년간의 중국과의 사행교류에 관한 기록은 우리측 문헌과 중국측 문헌 사이에 횟수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그것과 관계없이 몇 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태조대에 고려에서 중국으로 파견한 횟수를 보면 대략 12회에 걸쳐서 사절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중국으로부터 사신이 온 것은 2회이고 개인으로는 文士가 2회, 승려가 2회로 총 4회였다. 또한 고려초 독자적으로 쓰던 연호 天援는 태조 16년(933) 후당 에서 왕경과 양소업이 와서 왕을 책봉함과 동시에 후당의 연호로 대체되었고, 후당이 망하고 후진이 들어선 이후로는 후진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고려의 사절이 중국에 보내진 것 은 빈번한데 중국으로부터는 겨우 2회의 사절만이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후 당과 후진이 고려왕의 책봉을 위해 최소한도의 필요에 응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양국간의 통교에 있어서 그 요구가 간절했던 것은 고려측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34)李基白, 앞의 글, 76쪽.

 이 시대에 고려가 적극적으로 후당이나 후진에 사절을 파견하고 가까이 하려고 한 이유는 국내적으로 볼 때 후삼국의 정립상태에서 모든 정세가 고려에 유리하게 되어 갔다 할지라도 삼국 모두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고, 자기 세력권 안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고 삼국간의 갈등 속에서 적어도 중국 등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후백제의 경우 후당 淸泰 3년(936) 정월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는데535)≪舊五代史≫권 48, 後唐 淸泰 3년 춘 정월. 이 해는 후백제가 멸망한 해로 여러 가지 사정이 최악의 상태인데도 사절을 파견했다. 이것은 아마도 후당이 고려왕을 책봉하고 또한 고려국왕 책명에 보낸 조서에 “… 군사를 정예하게 하여 견훤의 세력을 무찔렀고 …”라는 귀절이 있듯이 후당의 후백제에 대한 태도를 의식한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536)金在滿, 앞의 글, 188쪽. 이러한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운 외교였으나 삼국정립의 숨가쁜 소용돌이 속에서 후백제의 위기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 고려는 당시 동아의 정세가 전부터 그래왔듯이 중국을 축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북방의 거란족이 강해지고 있고, 또한 그 세력의 위협을 당할 것에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다음 기록은 고려의 대거란 강경정책을 여실히 보여준다.

거란에서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내왔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어기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 한 나라로서 친선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고 하여 드디어 국교를 단절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 두었더니 다 굶어죽었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5년 10월).

 이러한 사실의 표면적인 이유는 거란이 발해와 맺은 국제적 의리를 배반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바로 그 전 해인 태조 24년에 후진으로부터 고려국왕에 책봉된 태조는 후진과 거란과의 미묘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후진의 입장과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란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보낸 것은 거란에 대한 단호한 국교단절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537)金在滿, 위의 글, 191쪽.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태조 때의 외교정책은 국내문제나 국제문제에 있어 친중국정책으로 대응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친중국적인 외교정책을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태조 18년을 전후하여 수년간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數年一遣」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훗날 崔承老의 비난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같이 사행이 빈번하던 시기가 바로 통일전후였다는 점이다. 이것으로써 당시의 국가적인 대중국 통교는 외교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외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적인 동맹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정치적 지원을 얻자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538)李基白, 앞의 글, 77쪽.

 외교정책에 따른 사신의 파견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사절의 교환에 따른 경제적인 욕구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공은 일종의 공무역을 의미했으며 이러한 성격은 그 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539)≪■府元龜≫권 999, 外臣部 44, 互市. 중국측 기록에는 2차에 걸쳐 고려인이 와서 교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태조 17년 한 해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고려측의 무역에 대한 욕구가 컸고 따라서 사행의 方物朝貢은 무역의 의도를 내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40)李基白, 앞의 글,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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