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2) 송과의 관계
  • (1) 정치적 관계

(1) 정치적 관계

 고려와 송과의 통교는 광종 13년(962) 11월에 열리기 시작하여555)≪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3년.
≪宋史≫권 1, 本紀 1, 太祖 建隆 3년 11월 병자.
양국은 명종 3년(1174;송 孝宗 乾道 9)까지 비교적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556)중앙집권적 전제정치하에서는 중농정책이 준수되는 것이 원칙이나 당시 송은 전쟁비용과 비상지출 목적으로 중상주의를 채택하고 이에 따라 상인의 상업활동을 보호·장려하였다. 그 대가로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商稅의 규례가 태조 때부터 정해지고 역대 왕들은 이를 지켰다(≪文獻通考≫권 14, 征榷考). 이처럼 약 200여년 동안 양국이 친선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면에는 양국이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국은 모두 요·금같이 새로이 강성해지고 있는 북방 침략세력의 압력 아래 놓여 있었으며, 서로 직접적으로 경계를 맞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양국은 친선관계를 맺음으로써 양국 사이에 있는 거란과 여진을 억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짙게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송은 국초 이래로 문치주의를 채택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고려는 이러한 송의 정치적·군사적인 욕구보다 경제·문화적 욕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송에 접근하였다. 이처럼 양국은 외교적 접근 속셈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당시의 북방민족 등이 개재된 복잡한 분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양국의 통교초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後晋이 나라를 세울 때에 거란의 도움을 받은 대가로 북부중국의 燕雲 16州를 떼어준 일이 있었는데 송은 건국초부터 그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송 태종은 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太平興國 4년(979;고려 경종 4) 거란을 습격하다가 크게 패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 계속해서 실지회복을 위해 기회를 엿보던 송은 거란에 나이어린 聖宗이 즉위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바로 1년 전인 985년에 송은 고려에 사신 韓國華를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던 바,557)≪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4년 5월. 고려는 이 청을 마지못해 응하는 척하였으나 실제로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 뒤로 거란이 진출함에 따라 고려와 송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즉 성종 12년(993) 고려에 대한 거란의 1차 침입이 있자 이듬해 고려는 元郁을 송에 보내어 거란의 침입을 알리는 동시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은 이제 북방국경이 겨우 편안하여졌으니 경솔하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다 하고 다만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으며 이 때부터 송과의 관계가 끊어졌다.558)≪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3년 6월.

 북방 거란의 압박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송과의 국교는 문종 때에 와서 재개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이에 양국간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목종년간에는 여러 차례 송에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으며, 특히 목종6년(1003)에는 호부낭중 李宣古를 보내어 송으로 하여금 송의 국경에 군대를주둔시켜 거란의 침구를 배후에서 억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559)≪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그리고 현종 때부터는 민간교역이 시작되어 문종 22년까지 56년간 동안 50회에 걸친 宋商의 來航이 있었다.560)金庠基,≪高麗時代業史≫(東國文化社, 1961), 189∼190쪽 宋商人來航表 참조. 이러한 사실은, 고려와 송 양국이 거란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식 국교는 중단되었을지라도 양국간의 통교의 필요성은 같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통교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정치적 접촉은 없고 민간교역만이 행하여졌던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의 미묘한 국제관계에서 송이 정치적으로 麗·遼의 문제에 개입을 극력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뒷날 송이 금의 신흥세력을 끌어들여 요를 협격하려고 할 때에 고려 또한 개입을 회피하고 중립을 지킨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561)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378쪽.

 문종은 즉위하면서 친송책을 쓰고 송과 통교를 하고자 하였다. 왕은 탐라와 영암에서 나무를 베어 큰 배를 만들어 송나라와 관계를 갖고자 하였다. 이에 內史門下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송과의 통교를 반대하였다.

이미 北朝(거란)와 우호관계를 맺어 변방에 위급한 일이 없게 되어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되어 있으니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지난 경술년에 보내왔던 거란의 問罪書에 말하기를 ‘동으로 여진과 결탁하고 서로는 송나라에 왕래하니 이것이 무슨 꾀를 쓰고자 함인가’라고 하였으며, 또한 尙書 柳參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東京留守가 南朝(송)에 사신을 보낸 일을 물을 만큼 시기하는 듯하오니 만약 이런 인이 누설되면 반드시 틈이 생길 것이요 … 더구나 우리나라는 文物禮樂이 흥왕한 지가 이미 오래며 商船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배가 들어오고 있사오니 중국에서는 실로 도움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만일 거란과 국교를 영원히 끊지 않으려면 송나라와 사절을 교환해서는 안됩니다(≪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8월).

 이 기사에서 볼 때 당시 내사문하성에서 송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송과 통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거란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송과 정식적인 통교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민간무역이 성행하여 아쉬울 것이 없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문종은 대신들의 반대로 통교를 보류하였지만 송과의 국교재개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종은 교역보다는 송의 선진문화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 송에서는 신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와 서로 국교를 맺어 북방의 요를 견제하고자 하는 聯麗對遼策이 다시 대두되어 상인 黃愼을 두 번이나 고려에 보내어 양국간의 통교를 요구하여 왔다.562)≪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22년 7월·24년 8월.
≪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이러한 송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서는 문종 25년(1071) 民官侍郎 金悌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국교는 다시 열리게 되었다.563)≪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25년 3월.

 문종 이후에도 양국관계는 매우 긴밀하게 유지되었으며 예종 때에 이르러서는 고려에 대한 송의 친선태도가 더욱 깊어졌다. 특히 송 휘종은 고려의 사신의 격을 國信使로 높이고 사신접대에 있어서도 西夏 위에 두고 요 사신과 마찬가지로 樞密院에서 맡아 접대하게 하였으며, 고려사신을 접대하는 관리의 명칭도 引拌官·押作官에서 接館伴·送館伴으로 고치는 등 예우를 각별히 하였다.564)≪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하지만 한동안 계속되던 송과의 친선관계는 북방의 정세변동에 따라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의 주인공이 요에서 금으로 바뀌고, 새로 강성해진 금은 송을 요보다 더욱 강하게 압박하였다. 송은 여진족이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하자 금과 손을 잡고 눈앞의 숙적인 요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려에 그 중재를 맡아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여진(금)은 이리나 범과 같아 사귈 만하지 못하다고 만류하였다.

 고려에서 이처럼 송에 대하여 금과 맺지 못하도록 권고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웃한 금이 요까지 합하게 되면 너무 커져서 동방의 세력균형이 깨질 우려가 있으며 그렇게 될 때 고려의 존립에 불안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는 여진족과 오랫동안 접촉하고 있어서 여진족의 야만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송이 여진의 금과 맺어서 요를 멸한다는 것이 결국 금의 세력만을 키워서 송은 앞문의 이리를 쫓기 위하여 뒷문으로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격이 된다는 것이다.565)김상기,<고려와 금(金)·송(宋)과의 관계>(≪국사상의 제문제≫5, 국사편찬위원회, 1959), 45∼47쪽. 이 말을 증명하듯 금은 요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서 송의 수도 抃京까지 쳐내려가게 되었다. 이에 송은 고려와 연합하여 금을 협공하고자 고려 인종 4년(1126;송 欽宗 靖康 원년) 7월에 사신 侯章 등 60여 인을 고려에 보내어 송에서 흠종이 양위를 받은 사실과 금나라 군사가 수도에까지 쳐들어온 것을 알리고 송과 고려가 합하여 공동전선을 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이미 금에 대한 외교를 결정한 이후였으므로 국내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들며 송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이러한 사이 금은 송의 수도를 함락하고 송의 휘종과 흠종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포로로 데려가는 이른바「靖康의 變」(1127)을 일으키니 北宋은 망하고 남은 일족은 강남으로 피신하였다.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해진 당시의 동아시아정세 속에서 麗·宋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송이 고려에 요구해 온 假道問題였다.

 강남으로 피신한 자들 가운데 휘종의 아홉째 아들 構가 송을 다시 일으키니 이가 곧 南宋의 高宗이다. 그는 제위에 오르게 되자「정강의 변」때 잡혀간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데려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런 상황아래 고려 인종 6년(1128) 3월에 송 상인 蔡世章이 고종 즉위의 국서를 가지고 옴으로써 고려와 남송과의 교섭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해 6월에 송 국신사 楊應誠의 파견은 다시 양국관계를 미묘하게 만들었다. 당시 양응성이 가지고 온 국서의 내용이나 또 양응성 자신이 고려조정에 올린 글의 내용은 금에 잡혀간 휘종과 흠종을 구출하기 위하여 금에 가서 교섭할 수 있도록 고려측이 길을 빌려주고 또한 금의 국경까지 안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송의 가도문제에 대하여도 완곡히 거절하였다. 그 이유로 여진족들은 싸움을 좋아하여 전부터 고려가 송과 가까운 것을 미워하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국경지역에 城壘를 수리하고 군사를 집결시켜 고려를 넘보고 있는데 송에 길을 빌려주어 사절이 그 땅에 들어간 것을 알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에서 송에 報聘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의 길을 빌리자고 하면 무슨 말로 거절할 것이며, 또한 그들이 만일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알게 된다면 우리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며 송의 淮南·兩浙의 연해지방까지 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566)≪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6년 6월 결국 고려의 입장에서는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이미 쇠약해 가는 남송과 합작함으로써 새롭게 강성해지는 금의 미움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중립적 태도로 인하여 여송관계는 점차 멀어지게 되었으며, 송에서도 금과의 잦은 싸움으로 국내사정이 어수선하니 당분간은 사절을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해왔다.56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8년 4월

 결국 가도문제는 고려와 송 양국간의 사이를 매우 서먹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으며, 송은 고려에 대하여 금과 밀착되었다고 생각하여 고려의 사절조차도 금의 간첩으로 오해하기까지 하였다.568)≪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하여튼 양국의 공적 관계는 매우 소원해져 그 뒤로 공적인 통교로서 고려에서 송에 보낸 마지막 사신은 의종 18년(1164)의 일이며,569)≪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18년 2월 임인.
의종 18년에 고려에서 송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지마는 실제로는 인종 14년(1136)에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측 자료에도 인종 14년 고려의 金稚規 등이 다녀간 뒤 使命이 끊어졌다고 하였다(≪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송에서 파견된 마지막 사신은 명종 3년(1173)을 끝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570)≪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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