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2. 5대 및 송과의 관계
  • 2) 송과의 관계
  • (2) 문화적 관계

(2) 문화적 관계

 고려가 송과 통교를 행한 데에는 정치적·경제적 목적 이외에 선진문물을 수입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문종이 송과 통교하려 할 때 내사문하성에서 나라의 문물예악이 흥왕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중국으로부터 별 도움을 받을 것이 없다고 하며 송과의 정치적 교류를 반대한 것에서도 통교목적이 단순한 문물수입에 있을 뿐임은 알 수 있다. 또한 송 말기의 사람인 馬端臨도 고려가 중국과 관계를 맺는 것은 華風을 흠모하고 歲賜의 이득을 얻고자 하는 데 있다고571)≪文獻通考≫권 325, 四裔考 2, 高句麗. 비난한 사실에서도 양국관계에 있어서 고려의 입장은 문화적 욕구충족을 위한 문물교류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양국의 문화적 관계는 그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고려에서 송의 國子監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과, 송의 귀화인 가운데 고려에서 관리로 임용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먼저≪고려사≫에 나타난 유학생 파견에 대한 기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종 원년(976) 이 해에 金行成을 宋에 보내 國子監에 입학케 하였다(≪高麗史≫권 2, 世家 2, 경종 원년).

② 경종 5년(980) 崔罕·王琳을 宋에 보내 입학케 하였다. 동왕 11년에 罕과 琳등이 賓貢科에 합격하여 秘書郎에 제수되었다(≪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③ 목종 원년(998) 金成積이 宋에 가 登第하였다(위와 같음).

④ 숙종 4년(1099) 宋에서 詔하여 (고려인의) 資貢科 응시를 허락하였다(위와 같음).

⑤ 예종 10년(1115) 7월에 金端·甄惟底·趙奭·康就正·權迪등이 宋의 大學에 들어갔다가 (동왕) 12년 迪·奭·端은 上舍572)上舍는 宋代 官吏시험의 3學舍(外舍·內舍·上舍)의 하나로 제일 어려운 시험이었다. 及第하였다(위와 같음).

 이상에서 살펴볼 때 고려에서 송에 유학한 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유학생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에서는 당시 양국의 정치적 관계를 생각하여 그들을 매우 정중히 접대했으며,≪補閑集≫에는 學士 권적이 송에 유학할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명주 定州縣에 도착했을 때에는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여행길의 수고로움을 묻고 州府의 秀才를 가려 동행하게 했다. 대궐에 들어서니 전에 없는 은총을 내리어 詔書로서 辟廱(天子의 大學)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했다. 7년 동안 공부하면서 여러번 考藝科에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황제가 임석하여 策試할 때도 甲科 제1등에 뽑히었다(崔滋,≪補閑集≫권 상, 權學士適奉國表).

 권적과 같은 고려 유학생들의 지적 수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높은 漢學 수준을 송에서도 알고 고려에 보내는 國書를 작성할 때에는 詞臣을 선택하여 문장을 짓도록 하여 잘된 문장을 가려서 보냈다고 한다.573)≪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한편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직을 가졌던 예는 문물을 크게 일으켰던 문종 때에 많이 보이고 있다. 문종 6년(1052) 6월에 송의 進士 張廷이 고려에 오니 왕은 秘書省校書郎의 관직을 수여하고, 敎書 1통과 의복·비단·白銀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574)≪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6년 6월 무인. 문종 11년 7월에는 송의 귀화인 張琬에게 그가 공부한 遁甲三奇法과 六手占法을 시험하고 太史監候의 벼슬을 내렸다.575)≪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1년 7월 임진. 또 문종 14년 9월에는 송 진사 盧寅有가 문필에 재능이 있다고 하여 비서성교서랑으로 임명하고, 이듬해 6월에도 송의 진사 陳渭를 비서성교서랑으로, 蕭鼎·蕭■을 閤門承旨로, 葉盛을 殿前承旨로 각각 임명하였는데, 이는 진위는 문예에 재능이 있고, 소절 등 세 사람은 音律에 밝았기 때문이다.576)≪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4년 9월 계묘 및 15년 6월 정사. 이후에도 예종대에 송 진사 林完이, 명종대에 송 진사 王逢辰이 각각 그들의 능력으로 특별히 乙科에 及第하였다.577)≪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예종 9년 4월·명종 14년 9월.

 이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송의 진사로서 來投한 자는 임용하였고,또한 보통사람으로 投化한 자 가운데는 所業에 따라 시험을 치뤄서 임용하였으며 특기자도 임용했다는 사실이다. 고려에서는 유학이 발달했고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私學의 발달이 유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의 이런 상황이 유학생으로 송에 건너가게도 했고, 또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내투한 자 가운데 임용도 하게 했으리라고 본다.

 문화적 관계의 둘째 내용으로는 의술 및 약재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의학 전문기관이 생긴 것은 신라 효소왕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578)≪三國史記≫권 39, 志 8, 職官 中. 고려시대에는 이 분야가 더욱 발전하여 太醫監(후에 典醫寺)이라는 전문기관에서 의약과 치료의 일을 관장하였다.

 특히 문종은 일찍부터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의학에 관한 책을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동왕 12년(1058) 9월에는 忠州牧에서 새로 인각한<黃帝八十一難經>·<川玉集>·<傷寒論>·<本草括要>·<小兒巢氏病源>등 99판을 바치니 왕이 조서를 내려 이것을 秘書閣에 보관하게 하였다.579)≪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9월 기사. 또한 문종은 風痺症(中風)을 앓고 있어서 여러 나라에 양의와 양약을 널리 구하였는데 특히 송나라와의 의술교류는 매우 활발하였다.≪高麗圖經≫에서도 문종의 적극적인 의술 도입에 대한 사실을 적고 있듯이580)徐兢,≪高麗圖經≫권 16, 官府 藥局. 문종 때부터 양국의 의술교류는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581)≪高麗史≫기록 가운데 문종 때 송에서 파견한 醫官을 찾아보면 江朝東(문종 13년 8월), 王愉·徐先 등 2명(문종 26년 6월), 邢慥·朱道能·沈紳·邵化及 등 88명(문종 33년 7월)이다. 특히 풍질을 앓고 있던 문종의 질병 치료를 위해 송 神宗은 문종 33년 7월에 閤門通事舍人 王舜封, 醫官 邢慥·朱道能·沈紳·邵化及 등 88명과 瓊州의 沈香과 廣州의 木香 등 약품 100종을 보내오기도 하였다.582)≪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3년 7월 신미.

 문종 이후에는 고려에서 송의 의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어 의학서적을 가져오고 의관을 연수시키기 위하여 송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숙종 5년(1100)에는 송의 哲宗이 죽자 吊慰使로 갔던 任懿가≪神醫補救方≫을 가져왔으며, 동왕 8년 6월에는 고려의 요청으로 송에서 의관 牟介·黑昞·陳爾猷·范之才 등 4명을 보내기도 하였다.583)≪高麗史≫권 12, 世家 12, 숙종 8년 6월.

 세번째는 서적의 교류를 들 수 있다. 송에서 들어오는 물품 가운데는 고려의 문인들이 갈망하는 서적이 많이 있었다. 특히≪宋朝大藏經≫을 비롯하여≪文苑英華集≫·≪■府元龜≫·≪資治通鑑≫·≪太平御覽≫·≪신의보구방≫등 송대에 이루어진 방대한 출판물을 포함하여 경서·제자서·사서·의서·역서·불서·음양서·형법서 등 다양하였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예를≪고려사≫세가에서 찾아보면, 성종 2년 5월에 박사 任老成이 송으로부터 돌아와≪大廟堂圖≫1폭,≪大廟堂記≫1권,≪社稷堂圖≫1폭,≪社稷堂記≫1권,≪文宣王廟圖≫1폭,≪祭器圖≫1권,≪七十二賢■記≫1권을 바쳤고, 현종(1027) 18년 8월에는 송 江南 사람 李文通 등이 와서 597권의 서책을 바쳤다. 선종 7년(1090) 12월에는 송에서≪문원영화집≫을 보내왔으며, 숙종 3년(1098) 12월에는 禮部에 송의≪開寶正禮≫1부를 내린 일이 있다.

 서적 가운데 특히 불경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고 따라서 불서의 수입이 어떤 전적의 수입보다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문종 37년(1083) 3월에 왕이 태자에게 명령하여 송의 대장경을 맞이하여 開國寺에 보관하도록 하고 도량을 베푼 일이 있다.584)≪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7년 3월 기축. 또한 선종 3년 5월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송에서 귀국하면서≪華嚴大不思議論等諸宗敎藏≫3,000여 권을 가지고 왔으며, 이듬해에는 송의 상인 徐戩 등 20명이 와서 왕에게≪新註華嚴經板≫을 바쳤다. 송으로부터 수입한 불경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현종 10년에 崔元信이 가져온 金字藏經 등과 더불어≪開寶勅板≫(송 태종 太平興國 8;983)을 들 수 있다. 이 개보판은 480질 5,048권에 달하는 것으로 현종 때부터 문종년간에 완성된≪古板高麗大藏經≫의 주축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585)李丙燾, 앞의 책, 395쪽.

 한편 송에서도 고려에 있는 서적은 좋은 판본이 많다는 말을 듣고 사신접대담당 관원인 館伴에게 지시하여 필요한 서적 목록을 써주면서 비록 권수가 부족되는 것이 있더라도 꼭 베껴서 보내라는 말을 전할 정도였다. 그 때 요구한 목록은 그 종류가 113종 5,006권에 이르고 있다.586)≪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8년 6월 병오. 그 밖에 의천이 고려에서 智儼이 저술한<孔目章>·<華嚴搜玄記>·<起信論義記>등과 賢首의<華嚴探玄記疏>·<法界無差別論疏>·<十二門論疏> 등과 淸凉의<貞元新譯華嚴經疏>등을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써 논의하였던 까닭에 송에서 많은 학자가 모여 들었는데 이로써 귀중한 章疏가 송에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서적 교류 가운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송은 거란에 대하여 좀처럼 나누어 주기를 꺼린 서적을 당시 거란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던 고려에 대해서는 고려가 요청한 목록대로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이다.587)徐炳國,<高麗·宋·遼의 三角貿易攷>(≪白山學報≫15, 1973),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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