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 (1) 거란의 침입과 그 항쟁

가. 제1차 침입

 936년 후삼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한민족의 재통합을 이룩한 고려 태조는 이어 고구려 고토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북진정책은 곧 발해유민에 대한 포용정책을 표함으로써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과의 마찰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거란은 고려와의 通交를 통해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동족국가로 인식하고 있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고려의 입장은 강경하였으므로 두 나라는 오랫동안 정치적인 교류가 단절되었다.

 그 사이 고려는 꾸준한 북진정책의 결과 성종대에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을 넘어 博川·寧邊·雲山·泰川 등지와 압록강 하류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11세기 초 자체내의 왕위계승분쟁을 수습한 거란은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고려에 침입해 옴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오랜 전쟁이 시작되었다. 거란은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濱海女眞과 定安國을 치고 마침내는 압록강변의 요지에 3柵(威寇·振化·來遠)을 세워 여진과 송의 통교를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여진문제 해결에 일단락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聖宗 統和 9년(991)경 송이 감행했던 對遼전쟁에서 송을 대패시켰다. 이로써 송·여진 모두로부터 後顧의 염려가 없게 된 거란은 마침내 고려문제에 전념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거란 성종은 먼저 고려에 대한 탐색작전의 일환으로 厥烈을 고려에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고려의 반응이 없자 고려원정을 단행하는 쪽으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성종 12년(993;성종 통화 11) 5월에 고려와 통하고 있던 서북계의 여진은 이러한 거란의 침략계획을 미리 탐지하고 고려조정에 이 사실을 통보하여 왔다.

 하지만 고려조정은 여진의 보고를 듣고도 의심하여 방어책은 세우지 않다가 8월에 거란병의 진격사실을 알려온 여진의 보고를 재차 받고서야 사태가 심각한 것을 깨닫고 시급히 대비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성종은 각 지방에 兵馬齊正使를 보내어 군사를 징집하게 한 다음, 10월 侍中 朴良柔를 上軍使로, 內史侍郎 徐熙를 中軍使로, 門下侍郎 崔亮을 下軍使로 임명하여 北界로 나가 거란을 막도록 하고 성종 자신도 서경으로 나갔다가 다시 安北府로 옮겨 정세를 관망하였다.

 한편 거란 성종은 10월에 東京(遼陽)留守 蕭遜寧(이름은 恒德)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호칭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 침략을 단행하였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蓬山郡을 쳐 고려의 선봉군인 尹庶顔을 사로잡은 뒤에 사신을 통해 글을 보내어 고려 군신의 항복을 요구하였다.608)≪高麗史節要≫권 2, 성종 12년 10월.

 이 때 거란이 고려를 침범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송과 중국내륙을 놓고 결전을 함에 앞서 고려와 송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한걸음 나아가 고려를 거란에 복속시킴으로써 송 정벌에 전념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고구려의 계승권을 가진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고려가 개척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하류 동쪽지역인 평안도 일대의 땅을 장악해서 고려의 도전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安戎鎭전투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자,609)성종 12년 10월 蕭遜寧은 安戎鎭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中郎將 大道秀·郎將 庾方 등에 의해 패하였다(위와 같음). 전략을 바꾸어 싸우지 아니하고 항복을 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에 앞서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조정은 강·온 양론으로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거란의 항복요구에 응하여 서경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절령(岊嶺)으로 경계를 삼자는 割地降服論이 강했으나, 중군사 서희와 前民官御事 李知白의 강력한 반대로 할지론은 봉쇄되었다.

 그 사이 고려측의 답변을 기다리던 거란이 재차 남하하여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中郎將 大道秀의 요격으로 실패하여 남진을 멈추었다. 이에 중군사 서희는 소손녕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거듭 항복요구만 해오는 태도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안융진 승리를 계기로 和解使로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겠다고 성종에게 자원하였다. 그리고 그가 협상을 성공리에 마치자 양국은 협정을 맺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이 협정의 결과 고려는 ① 거란의 正朔을 받들며 ② 고려의 고구려계승권을 거란으로부터 승인받고 ③ 강동 6주, 즉 압록강 동쪽 280리에 있는 興化鎭(義州)·龍州(龍川)·鐵州(鐵山)·通州(宣川)·郭州(郭山)·龜州(龜城) 등을 영유하게 되었다.

 한편 거란은 ① 형식적이나마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② 고려와 송과의 외교단절에 성공하고 ③ 거란과 송이 결전을 할 경우 배후에서 고려가 기습할 걱정을 덜게 되었다. 따라서 거란은 제1차 침략의 목적 중에서 첫째 목적인 고려의 事大 및 麗·宋同盟의 파괴라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둘째 목적인 고구려계승의 명분을 빙자한 고구려 옛 영토의 점유에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여·요전쟁의 결과로 고려는 실리를 얻었고 거란은 명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徐·蕭협정 후 고려는 성종 13년(994) 4월에 박양유를 奉表使로 삼아서 거란에 파견하여 거란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거란에 끌려간 고려인 포로를 석방해 주기를 요청하였다.610)≪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3년 4월.

 그리고 역대의 숙원이었던 압록강 이동의 고구려 옛땅을 회복할 수 있게 되자, 성종은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 6주지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長興(泰川 동쪽) 및 歸化의 두 진과 곽주와 귀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서희로 하여금 여진을 공격하게 해서 安義鎭(安州)·興化鎭(義州 동쪽)과 通州(宣川 동북쪽)·孟州(孟山의 동쪽) 등지에 성을 쌓았다.611)≪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및 권 58, 志 12, 地理 3. 이렇게 압록강변의 요지에 각각 성을 쌓은 다음 鴨江渡勾當使를 두어 거란의 來遠 城과 마주보며 渡江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처럼 거란에 대한 서희의 외교적 성공과 민활한 영토개척 노력의 결과로 고려는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교통의 요지인 압록강 하류유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아 군략상 또는 외교상 자주국가로서 떳떳하게 대항함으로써 강동 6주를 얻게 된 고려는 송을 버리고 거란과 친밀한 외교(사대의 예)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래로 야만족으로 낮추어 보아 왔던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성종은 거란에 봉표사를 보낸 두 달 뒤인 6월에 元郁을 송에 밀파하여 전년의 거란의 침범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구원병을 청하여 여·송이 단합해서 거란을 공격해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 태종은 송의 대거란전쟁이 소강상태에 있는 데다가 여·요투쟁에 개입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지난 성종 4년(985;송 태종 雍熙 2) 5월에 송 태종이 장차 거란에 빼앗긴 燕雲 16州를 회수하기 위한 전쟁을 계획하고 韓國華를 고려에 밀파하여 출병할 때 협공을 청했다가 고려의 회피로 무산되었던 것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성종은 송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거란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나갔다.612)≪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3년 6월.

 송의 원병거부 회신을 받은 고려 성종은 李周楨과 이지백을 거란에 파견하여 특산물을 바쳐 양국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소년 10명을 선발하여 거란에 유학시켜 거란의 말과 글을 배우게 하였다. 이 유학은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거란에 대한 효율적인 대비수단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성종은 또 趙之遴을 거란에 파견하여 혼인을 통한 유대강화를 제안하니, 거란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거란의 부마이며 동경유수로 있던 蕭恒德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켰다.613)≪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4년.

 성종에 이어 즉위한 목종은 곧 閤門使 王同■을 거란에 파견하여 즉위사실을 알리었고, 한편 거란도 千牛衛大將軍 耶律迪烈을 고려에 파견하여 전왕인 성종의 생일(千秋節)을 축하하였다. 또 그 이듬해 10월에 거란은 우상시 劉績 을 고려에 파견하여 목종에게 상서령을 더하여 책봉하기도 하였다.614)≪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즉위년 11월·12월 임인 및 2년 10월.
≪高麗史節要≫권 2, 성종 16년 11월·12월 및 목종 2년 10월.
이후 목종 재위 12년간도 고려와 거란은 활발한 교류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여진다.

 徐·蕭협정의 결과, 고려가 비록 거란에 대해 정삭과 예를 취하고 적대적 태도를 삼가했지만, 이것은 북진정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실리추구를 위한 전략 변화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고려측은 압록강 동쪽의 280리 고토를 회복하게 되어 영토확장과 서여진 진압 및 고려와 거란 사이의 완충지대를 갖는 실익을 거두게 되었다.

 사실 이 때 고려가 대륙국가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한 것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행해졌던 일반적인 외교방식의 하나로 약소국가가 강대국가에 대하여 적의없는 존경의 표시로 행하던 하나의 외교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때로 상대국을 바꾸어 사대의 대상을 삼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그때까지 오랑캐의 나라로서 대해 오던 거란인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된 것도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615)김상기,<단구와의 항쟁>(≪국사상의 제문제≫2, 국사편찬위원회, 1959), 128쪽.

 반면 고려가 강동 6주를 차지하게 된 것은 거란과의 투쟁에 있어서 대단히 큰 수확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려가 강동 6주에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여 서북면의 여진을 기미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여진과 거란의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여진 회유와 기미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대거란 방어와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사건은 고려와 거란의 保州(義州) 榷場의 개설인데, 각장은 互市 일종으로서 상호 특산물을 교환·구매하는 장소였다. 고려와 거란간에는 조공무역이 이루어져 朝貢品과 賜與品 형식으로 거래가 된 것은 물론이고 사신의 공적 행위 이외에 사적인 행위와 사신 수행원들의 부대무역이행해졌다.

 이 각장은 여·요간에 밀월외교가 이루어지고 있던 목종 8년(1005)부터 거란이 고려를 재차 침범하던 현종 즉위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각장은 보주 이외에도 振武軍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이들 지역은 고려·거란·여진의 세력이 교차되는 곳이기도 하여 매우 번성하였다.616)李龍範,≪韓滿交流史硏究≫(同和出版公社, 1989), 241∼243쪽 참조.
≪遼史≫권 14, 本紀 14, 聖宗 統和 23년 2월 병술.
方東仁,≪高麗時代의 北界劃政에 관한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83),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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