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1) 거란 및 여진과의 전쟁
  • (2) 여진정벌과 9성

가. 고려의 대여진 기미정책의 성공

 고려의 대여진관계는 항상 북진정책과 직결되었다. 그런데 고려가 건국한 이래 북진정책을 수행하기에 용이했던 지역은 서북방면보다는 동북방면이었다. 서북방면의 경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압록강 하류유역까지밖에 진척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遼·金·元 등의 북방 강대세력이 부상되면 곧바로 맞부딪치는 곳이었으므로 이러한 세력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적극적인 진출을 삼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동북지역은 비교적 거란의 중심부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의 간섭이 약했고, 더불어 충돌의 위험도 적었기 때문에 요와의 전쟁이 종식되면서 고려는 이 방면에 대한 진출과 개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동북방면에 거주하던 여진, 즉 동번으로 지칭되던 부족들은 거란의 호적에 들지 않은 生女眞계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고려와 여진족문제 해결이 더욱 용이하였다.648)≪金史≫권 1, 本紀 1, 世紀.

 그런데 이들 생여진의 거주지는 함경도 일원은 물론 두만강유역이나 그 이북의 綏芬河·黑龍江·松花江유역에까지도 미치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이들 지역에 대한 척경을 함경도지역에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두만강유역이나 그 이북지역까지도 관심을 갖고 추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경험하는 동안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것은 북방의 변경지역 전체를 효과적으로 방위하기 위한 長城의 축조였다. 고려 초기부터 거란과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쪽의 군사적 요충지에 여러 차례 城塞를 구축해 나오다가 거란과의 투쟁을 겪고 나서는 이들 주요 성채들을 연결하는 장성의 축조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성축조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덕종대의 일이었다. 현종대에 서북지역의 축성을 맡은 경험이 있었던 평장사 柳韶를 시켜서 천여 리에 달하는 北邊長城 축조를 감독케 하였다. 이 장성은 정종 10년(1088)에 이르기까지 12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이 때 완공된 것이 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 등 14성을 거져 和州에 연결되는 것으로 높이와 폭이 각 25척인 석성이었다.

 그러나 정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에 東北路兵馬使 金令器에게 명하여 長州와 定州 및 元興鎭에도 축성케 했다. 정주와 장주는 오늘날의 定平일대이고 원흥진은 金津口이고 보면 동북면의 장성은 金津川을 거쳐 정평까지 연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뒤에 동북여진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되자 문종 9년(1055)에는 宣德鎭에 축성함으로써 이 장성이 마침내 오늘날의 廣浦인 都連浦까지 연장되어 장성축조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649)≪高麗史≫82, 志 36, 兵 2, 城堡.

 그런데 화주는 고려가 현종 이래 동번의 여진족들과 교섭을 벌였던 최일선 거점이었다. 현종 원년(1010) 5월에 있었던 和州館 사건650)和州館事件은 女眞人 95명이 고려에 來朝하려고 화주관내에 이르렀는데, 화주방어낭중 柳宗이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림으로써 고려와 여진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사건을 말한다(≪高麗史節要≫권 3, 현종 원년 5월),이나, 현종 3년 윤 10월에 여진의 毛逸羅·鉏乙頭 등이 三山村(北靑)지방에 거주하는 30성 주민들을 이끌고 화주에 나와서 맹약하기를 청한 사건651)≪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3년 윤 10월. 등을 종합해 보면 동북여진들이 일차적으로 고려 관헌과 교섭하기 위해 들어왔던 지점이 화주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종 10년에 와서는 고려의 영토가 북상함에 따라서 화주로부터 더욱 북상한 지점인 전주가 대여진교섭의 창구로 바뀌게 되었다.652)≪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정종 10년. 정주지방이 동번지역 여진족과 교섭하는 전방기지의 역할을 했던 것을 다음의 기사로도 알 수 있다.

동여진 正甫 馬波 등이 남녀 48명을 이끌고 정주 관외에 들어와 編戶되기를 청하므로 전택을 내려주고 내지에 살게 하였다(≪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6년 정월).

 이로써 문종 6년경에는 여진인들이 정주관에 이르러서 고려의 관리와 교섭을 벌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북여진이 집단적으로 고려에 투화해 와서 편호로 삼아 주기를 자청하자 고려정부는 그것을 허락해 주고 그들을 내지로 사민하여 정착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고려가 그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영토확장과 함께 여진족에 대한 기미정책이 성공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종대에 이르면, 위에 소개한 사례와 같이 동번여진의 일부가 고지를 떠나 집단으로 고려에 이주하여 고려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경우와 함께 장성 밖의 원근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촌락들이 자진하여 고려에 稱臣하고 고려의 州郡으로 편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났다. 이에 고려정부는 지속적인 축성사업과 함께 귀부해 오는 여진의 거주지에 高麗式 州郡을 설치하는「覊縻州」확대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기미주란 고려에 귀순한 여진촌락을 구분하여 각기 州名을 내려주고 여진추장을 都領에 임명하여 도맡아 다스리게하는 귀순 여진인의 자치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정부가 문종대로부터 예종대에 이르기까지 행했던 千里長城너머로의 영토확장은 이 기미주의 바탕 위에서 온건적이고 점진적으로 추구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고려에 복속하여 귀화한 여진의 땅을「化內」라고 하는데 화내의 지역에서는 거주를 인정하고 그 생존권을 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인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당시 고려가 化內覊縻州女眞을 지배한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653)金九鎭,<公嶮鎭과 先春嶺碑>(≪白山學報>21, 1976. 12), 65∼67쪽 참조.

첫째, 화내 제지역에 州號를 설정하고 朱記(告身狀)를 하사하여 화내의 여진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둘째, 화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진 제부족간의 투쟁이나 약탈을 금지하였다. 그래서 화내의 여진은 고려의 허락이나 묵인을 얻어야만 부족간의 싸움이 가능하였다. 셋째, 화내의 땅에 고려의 關防이나 성을 구축하였다. 고려에서는 封疆을 정하면 반드시 관방을 제지역에 설치하였고 또 군사상 필요한 곳에는 산성이나 장성을 쌓았다. 이리하여 기미주내의 公嶮城이 축조되었으며 여진 거주지 해변 700리에 장성을 구축하였다. 넷째, 고려의 화내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비교적 강력하여 기미주 안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거란과도 통교할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이 기미주 안에 살고있던 여진족들의 종류와 그들과 고려조정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고려사≫세가에 “東蕃黑水人은 그 종족이 30종이나 되어 ‘三十徒’라고도 불리운다”고 하였듯이 동번흑수인의 종족은 30종이나 되었다.654)≪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5월 정미.

 당시 대다수의 여진족들은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고려에 향화한 화내의 부족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던 부족들이 살던 지역은 대체로 함경도 해안지역과 두만강유역 일대로서 이들 지역은 이미 발해시대부터 농경생활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살던 여진족들은 뒷날 오랑캐(Orangkai)라고 부르는 종족으로서 동번의 30성은 대개 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655)金九鎭, 앞의 글, 68쪽.

 그리고 동번의 여진족 중에서 어로생활에 비중을 두고 생활하던 부족이 주로 살던 지역은 두만강 하류를 중심으로 연해주 일대에 걸친 지역이었으나, 그 세력권은 북쪽으로 흑룡강(黑水)까지, 남쪽으로 吉州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이 여진을 ‘骨看(Korgan)’이라 하는데. 물가에서 주로 생활하기 때문에 일명 ‘水우디케 (Udike)’라고도 하였다.≪고려사≫의 기록에서는 이 종족을 우디케의 일종으로 보아 北蕃으로 쓰기도 하고, 또 30성의 일부로 보아 동번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 종족은 특히 해상생활을 활발히 전개하여 고려의 해안을 약탈하는가 하면, 멀리 일본의 북구주지역까지 침구하였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이들을 ‘刀伊(되)’의 賊이라고 불렀다 고려에서도 이 여진의 해구를 막기 위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戰艦을 만들었는데, 예종 때 공험진 일대의 정벌에 투입된 군대는 이 배를 이용하여 북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려는 滿洲 內地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을 北蕃이라고 불렀는데, 숲(Weji)에서 생활하므로 이를 ‘Udike(兀狄唅, 兀惹)’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유목과 수렵생활을 하므로 한군데 정착하지 않고 부단히 이동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려의 보호하에 정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고려나 요에 귀속하지 않고 부족단위로 수초를 따라 이주하며 생활하였다. 이들 가운데 고려와 관계를 가졌던 부족들은 흑룡강·송화강 이남의 여러 지역에 산거한 족속들로서, 오늘날 골드(Gold)族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위의 여러 지역은 모두 고려의 동북면에 위치하여서 그 개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고려의 세력이 미쳤기 때문에 동번흑수인이 입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흑수는 두말할 나위없이 흑룡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여진인은 만주 내지의 여러 강들이 흑수(Kara;Hara)에 합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만주 내지의 여러 강에 海蘭(Hairan)河·海浪(Hairan)河 등의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강유역에 사는 사람을 黑水人이라 하였으며, 哈羅(Haran)라는 지명이나 曷懶(Karran)甸이라는 관부 명칭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고려사≫에서 흑수인과 동번을 혼용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따라서 흑수인이라는 명칭이 과거 일본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어떤 부족이 타부족의 이름을 가칭한 것도 아니며, 또 실제 흑수인들이 고려 접경지역에까지 이주하였던 것도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656)金九鎭, 위의 글, 70∼71쪽.

 고려가 동북면 여진의 개척에 가장 힘을 기울인 시기는 현종 이후부터 문종대까지로 볼 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와 요가 대립한 것은 실제로 동북여진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종 원년(1010)에 거란이 침구하였을 때 고려군은 여진군과 합병하여 거란군을 대패시킨 적이 있었다. 이렇듯 고려에서는 대여진관계에 있어서 실효를 거두는 융통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려 숙종·예종시대 이전까지 고려의 대여진정책은 온건론에 입각한 회유와 복속에 주력하였다. 이는 단순한 기미주나 귀순주에 그치지 않았고,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여진을 동화하여 편호로 만들고 종국에는 그 땅을 州郡으로 편입하는 데 있었다.

 고려가 여진을 초무·복속시키기 위한 방법은 제 1단계로 여진을 회유하여 將軍·大將軍 등의 관작을 주고, 입조를 하면 경제적 이익을 베풀어 주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정종 3년(948)에 이미 鄕職을 가진 동여진인이 나타나게 되었고, 현종년간에는 수직한 동여진이 더욱 많이 나타났다. 그들에게 내린 작위는 懷化將軍·歸德將軍·奉國將軍·柔遠將軍·平遠將軍 등의 武散階와 大相·正朝·元尹·中尹 들의 향직 명칭들이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에 여진군이 동원된 것을 보면 이는 단순한 虛職이 아니라 실제 변경 방비에 군사적 역할을 담당한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동여진은 입조할 때 양마(俊馬)나 毛皮類를 주로 조공하였는데, 고려에서는 이에 대한 回賜를 통하여 경제적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이러한 조공무역은 여진의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당시 동여진이 가져간 물품은 직물이나 식량 및 철제 농기구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농경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이 농경생활과 문화생활을 지향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이리하여 태조 때부터 예종 때까지 일시 중단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번·서번·북번이 빈번히 고려에 입조하였고, 입조하는 규모도 수십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큰 것이었다. 태조 때부터 꾸준히 추진한 기미정책은 마침내 문종 때에 가서 그 성과를 나타냈던 것이다.

 그리고 문종대를 고비로 하여 고려의 북방경략은 城鎭의 축조정책에서 한걸음 나아가 徙民實邊을 주축으로 하는 촌락창설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측의 민호로 구성된 장성 안의 북방 제성들은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여진촌락들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통제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책이 문종대에 정형화되어 갔다.

 문종 27년(1073) 2월에는 동북면의 귀순주 도령 古刀化 등 15주 추장들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종래의 기미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의 주군으로 아주 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정부는 이들을 고려의 주군으로 정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그들에게 다만 성명과 물품을 주어 위로하고 우대하는 데에 그쳤다. 이는 장차 원근 제부락들의 좀더 많은 내부를 기다려 그때 가서 고려의 주군으로 재편할 방침을 세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침내 동번 15주 밖의 여진인들 조차 스스로 자신의 땅을 들어 고려의 영토로 편입해 주기를 자원하기까지 했는데657)≪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4월 병자. 이는 태조 이래로 꾸준히 추진된 동번기미주에 대한 지배정책이 성공했음을 뜻한다.

 이들은 대개 고려의 경계에 가까운 지역에 있던 동번인으로 보여지며, 따라서 대체로 이 지역은 두만강 이남의 여러 지역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가운데 三山지역 일대가 고려의 주군으로 가장 늦게 편입된 듯한데, 그것은 문종 27년 5월에 서여진추장과 화내 30도추장이 협공하여 由戰村·海邊山頭·羅竭村의 三山城을 항복시킨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삼산촌은 산세가 험하고 고려에 향화한 東蕃과 西蕃의 교통을 중간에서 저해하였다고 하므로, 아마 磨天嶺 일대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658)金九鎭, 앞의 글 참조. 반면 東北面 15州 지역을 咸興平野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庠基,≪高麗時代史≫, 서울大 出版部, 1985).

 동여진인 스스로가 자진하여 고려의 군현이 되기를 청원해 왔을 무렵 서여진인들도 점차 고려에 대해 주군을 분치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특히 서여진의 추장 曼豆弗 등은 고려의 국력신장과 성공적인 여진기미책의 추진에 힘입어, 지금까지 자신이 臣服해 왔던 거란을 버리고 고려에 내투하여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고려의 군을 설치해 주기를 청원하기까지 하였다.659)≪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5월 정미. 이에 고려에서는 投化女眞村落에 기미주를 설치하여 그들을 포용하였다.

輸林院에서 아뢰기를 ‘東女眞의 大蘭 등 11村의 귀화인들이 그들의 거주지가 濱·利·福·恒·舒·濕·閩·戴·敬·付·宛의 11州에 편입되기를 바라니 청컨대 각기 朱記를 내려 인하여 歸順州에 예속시키소서’하니 이를 聽從하였다(≪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9월 갑진).

 이것은 국왕의 재가문서를 작성하는 한림원의 건의에 따라서 새로 투화하여온 11개의 여진촌락을 11개주로 제정하여 주마다 자격을 인정하는 朱記를 내려주고 이미 투화한 여진촌락인 귀순주의 속주로 삼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는 투화여진촌락에 대하여 왜 州라는 칭호를 베풀어 주었을까. 여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이처럼 격이 높은 주라는 칭호를 주었던 이유를 고려가여진촌락을 지배영역 안에 편입시킴에 있어 어디까지나 촌락단위로 흡수하고자 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즉 하나하나의 투화촌락에 대하여 주라는 파격적인 칭호를 서슴지 않고 베풀어 주었던 이면에는 투화여진촌락을 여러 촌락의 집합체인 지방단위로 맞이하는 대신 촌락단위로 흡수해서 접수하려는 정책적 배려가 깃들여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660)高承濟,<高麗封建制度의 形成過程과 邊疆地帶의 村落創設政策>(≪白山學報≫20, 1976. 6), 327∼329쪽.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종 27년경에 이르러 고려에 투항한 동번은 삼산촌뿐만 아니라 大蘭·支■ 등 9촌과 그 밖에 번장이 거느린 1,238호가 고려의 민적에 편입되었으며,661)≪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6월 무인. 이어서 東蕃 大齊者·古河舍 등 12촌의 1,970호가 내부해 옴으로써662)≪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6월 을미. 총 3,208호가 고려에 附籍되었다. 조선시대 세종 때 동북면에 사민한 규모가 2,800호(실제로는 3,200호)였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그 지역이 얼마나 넓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663)金九鎭, 앞의 글, 73쪽 참조.

 고려에서는 이 지역에 해변을 따라 장성을 700리 가량 쌓고664)≪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6월 무인. 내부한 지역에다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의 11주를 설치하여 귀순주에 예속시켰다. 이리하여 문종대 이후로는 여러 귀순주의 대소 추장을 도령체제로 편제하여, 국경수비에 있어서 고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다.665)江原正昭,<高麗の州郡縣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28, 1963).

 그러나 문종 때 이러한 여진의 주·군·현 편입은 비록 자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로 동여진내의 부족간의 투쟁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로부터 불과 30년 뒤에 阿城(白城)에서 完顔部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 동여진 30성 여진의 내분은 완안부 烏雅束(康宗;우야소)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완안부의 군대가 동번의 고려 기미주를 석권하고 정주 관외에까지 진출하게 되자, 고려에서는 완안부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그 때까지 대여진정책으로 추진하여 왔던 온건정책을 버리고 무력에 의한 강경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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