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2) 거란 및 금과의 통교
  • (1) 거란과의 통교

(1) 거란과의 통교

 고려시대 대외관계에 대한 관점이 주로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항쟁사에 주목되다 보니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 역시 이러한 접근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미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에 대한 전쟁의 경과 및 그 의미에 대하여는 많은 사실이 밝혀져 있다.677)朴宗基,<고려시대의 대외관계>(≪한국사≫권 6, 한길사, 1994), 211∼226쪽. 그러나 전후 100여 년간 지속된 통교의 내용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는 다소 소홀한 면이 없지 않다.

 고려와 거란의 정치적 통교는 성종 13년(994;거란 聖宗 統和 12) 4월 시중朴良柔를 파견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거란의 제1차 고려침입의 결과였다. 이후 고려 성종은 거란의 正朔을 받들고 조공관계를 통한 번국의 예의를 다하고자 하였다.678)≪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4년. 하지만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를 시기별로 初期交涉期(922∼986), 和戰時期(923∼1020) 및 和平時期(1021∼1125)로 대별하고 있듯이679)金渭顯,≪高麗史中中韓關係史料彙編≫(食貨出版社, 1983). 이러한 사신 왕래는 연이은 거란 침입 때문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기간 중에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양국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며, 한편으로는 官民이 일치하여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현종 10년(1019)의 龜州大捷이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고려 관민이 입은 피해가 매우 컸으므로 고려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였다. 마침 당시 蕭遜寧의 거란군은 귀주에서 참패를 당한 후였으므로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음을 시인한 거란 성종은 바로 고려의 청화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현종 11년 李作仁을 보내 “請稱藩納貢”의 뜻을 전하고 포로로 잡아 놓은 거란 인질을 송환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시작된 양국간의 평화적인 통교관계는 인종 3년(1125;遼 天祚帝 保大 5)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唐代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그러하였듯이 고려의 대중국관계도 중국(중원의 한족)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사대관계였다. 그러나 고려전기에 있어서 고려는 송이 아니라 대륙의 강자인 거란에 대하여 정치적 사대관계를 가졌음을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후 고려와 송의 정치적 관계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의 대거란 사대외교는 전쟁을 막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높은 것이었고 송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문화적 욕구로 인하여 송과의 관계는 문종 때 다시 회복되었다. 따라서 당시고려의 대외정책의 성격은「이중의 등거리외교」였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여기서는 10∼11세기 고려와 거란의 통교에 한하여 당시 양국간에 나타난 현안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신들의 종류 및 그에 따른 경제·문화적 교류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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