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3. 북방민족과의 관계
  • 2) 거란 및 금과의 통교
  • (2) 금과의 통교

(2) 금과의 통교

 금 건국 이후 여금관계사 연구는 건국 이전의 여진과의 관계사에 비하여 매우 미진하다. 또 전무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12세기 고려의 주요 외교대상국이었던 금에 대한 연구는 비슷한 시기의 송 및 거란에 비하여 현저하게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로 우선 금 왕조가 갖는 문화적 한계성을 들 수 있다. 비록 12세기 100여 년 동안 제일의 강국이었던 金帝國이었지만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1234년 몽고에 의해 멸망된 이후 여진사회는 더 이상 국제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또 거란이나 몽고처럼 수십 년간의 항쟁의 결과로 이룩된 교섭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금에 대한 통교는 그 시작부터 달리 취급되었다. 인종초 문벌귀족, 특히 李資謙의 난을 통해 실권을 쥔 이자겸과 拓俊京 등이 보다 항구적인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취한 안일한 사대외교정책이었다는717)김상기,<고려와 금(金)·송(宋)과의 관계>(≪국사상의 제문제≫5, 국사편찬위원회, 1959), 43쪽. 지적을 받은 것이 그 예이다.

 물론 여금관계는 송이나 거란의 관계처럼 유교나 불교를 통하여 문화·사상적으로 고려에 영향을 끼쳤다거나 또는 활발한 경제교류를 이룩한 관계도 아닌, 다분히 정치적·의례적 측면이 강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고려의 대금사대외교 역시 고려가 국초부터 일관되게 추진해 온 실리외교의 일환이었다는 점과, 국초 대중국 관계에 있어서 보이기 시작한 다양한 외교사행들의 명칭이 정리, 정착되어간 시기였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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