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1) 사절의 내왕

(1) 사절의 내왕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국내정세의 안정이었으며 이를 위한 방편의 하나가 인접국가와의 평화유지를 위한 외교관계의 설정이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건국 초부터 이미 문화수입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인적교류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고,777)≪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2년 9월. 태조 10년(927)에는 중국의 5대의 한 나라인 吳越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기도 하였다.778)≪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0년 12월.

 중국과의 교류는 일찍부터 선진문물의 수입과 무역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정치적 문제에 더 관심을 둔 접근이었다. 다시 말하면 새로 건국한 고려왕조가 국내의 불안정한 정세를 안정시키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던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군사적인 위협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외교관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아래 고려가 일본에 첫번째 사신을 파견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한 이듬해인 태조 20년이었다. 이 때의 기록으로는 “좌우 대신 이하를 불러모아 고려의 國牒 등을 살펴보았다”는 간단한 기사만 남아 있다.779)고려 태조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우리측 자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일본측의 기록만 간단하게 전한다(≪日本紀略≫後篇 6, 承平 7년 8월). 이 기사만으로는 사신의 파견 목적을 전혀 알 수 없다. 대신 후대의 기록인 고려 문종 34년(1080;일본 承曆 4)의 기사로 미루어 보면 당시 국첩의 내용은 修好를 희망한 것으로 파악된다.780)≪帥記≫, 承曆 4년 윤 8월. 고려의 요청에 대해 일본정부는 신중히 검토하여 수교요청을 거절하기로 하고, 939년 2월에 攝政太政大臣 藤原忠平은 고려에서 온 첩장을 大江朝綱에게 주어서 고려에 보낼 회신을 작성토록 하였다.781)≪貞信公記抄≫, 天慶 2년 2월. 이 때 작성된 反牒은 다음달인 3월 고려 사신을 통하여 大宰府로부터 고려의 廣評省에 보내졌다.

 당시 외국의 국서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는 대략 세 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첫째는 외국의 국서가 왔을 때 아예 묵살하고 전혀 회답하지 않는 경우이고, 두번째는 중앙정부에서 회답하는 경우이며, 세번째는 중앙정부에서 대재부에 명하여 간접적으로 회답하는 경우이다. 일본이 당시 고려에 보낸 반첩은 세번째의 경우로 문장의 작성은 대재부에서 고려의 광평성 앞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경우는 중앙정부에서 문장을 작성한 것이다.782)森克己,<日麗交涉と刀伊賊の來寇>(≪朝鮮學報≫37·38, 1966), 100∼101쪽.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문제는 이 반첩이 왜 1년 8개월이나 지난 후에 작성되었는가 하는 점과, 반첩의 작성을 등원충평이 대강조강에게 의뢰한 점, 그리고 중앙정부가 회답을 취하지 않고 왜 대재부로 하여금 회답토록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반첩에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은 당시 일본조정의 논의가 대체적으로 더디게 진행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견당사 폐지 이후 외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첩의 작성을 대강조강에게 의뢰한 것은 그가 大江善人의 손자로 父祖의 업을 이어받아 박학하고 명문장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회신을 일본 정부에서 하지 않고 대재부가 회답한 까닭은 고려와의 정치적 통교를 거부하는 일본정부의 완곡한 표시였다고 보기도 한다.783)森克已, 위의 글, 101쪽.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은 국풍문화에 취해 있어서 외국의 요구에 냉담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784)井上秀雄·上田正昭 編,≪日本と朝鮮の二千年≫1(太平出版社, 1970), 145쪽.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9세기 전반에 걸쳐 신라로부터 무역압력 등으로 시달려 온 일본으로서는 신라를 병합하고 통일을 이룬 고려, 특히 해상세력을 쥐고 있는 왕건의 요구에 이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을 기하여 명문장가까지 찾아 회답서를 쓰게 되었다는 견해가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다 강한 설득력을 갖게 한다.785)9세기의 100여 년간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는 신라의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한 신라 우위의 일방적 진출 시기였으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한 데 대하여 일본으로서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고려 건국 직전까지 한반도(신라)의 해상세력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羅鍾宇,<高麗前期의 對外關係史硏究>,≪國史館論叢≫29, 國史編纂委員會, 1991, 161∼163쪽).

 태조가 일본에 보낸 두번째의 국서는 일본정부의 반첩이 고려에 도착한 이듬해인 태조 23년(940) 이었다. 이 국서는 그 해 6월에 대재부에 의해 중앙정부에 보고되었다. 일본정부는 이 국서를 대강조강자 同維時 등의 학자에게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후의 사정으로 미루어 전과 같이 수호를 요구한 것 같으며, 일본정부는 이것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 30여 년 동안 양국의 공적인 통교에 관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다가 광종 23년(972)에 고려의 南京府使가 대마도에 도착했는데, 이를 대재부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했다는 것과,786)≪日本紀略≫後篇 6, 天祿 3년 9월. 2년 후인 광종 25년에 일본藏人所의 출납인 國雅가 交易使로서 고려로부터 교역화물을 가지고 일본에 귀국했다는 사실이 보인다.787)≪日本紀略≫後篇 6, 天延 2년 윤 10월. 하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양국의 교류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문종 10년(1056)에 일본의 正上位權隷朝臣 藤原賴忠 등 30인이 國使로서는 처음으로 金州(金海)에 건너온 일이 있을 뿐이다.788)≪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10월 기유.

 직접적인 사절파견과는 조금 다르지만 문종 34년에 고려 禮賓省에서 문종의 중풍 치료를 위해 倭商 王則貞에게 첩을 주어 일본에 의사파견을 의뢰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의뢰를 받은 일본정부는 의사의 파견 여부를 조정의 의론에 붙여 검토하였으나 의견이 대립되었다. 權中納言 源經信은 고려가 지금으로서는 일본을 침략할 의사가 보이지 않으므로 파견하자고 주장하여 한때는 丹波忠康이나 同後通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參議 源俊實은 “보내는 것도 좋지만 치료의 효과가 없다면 일본에 욕되는 일이니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반대의견을 제시하니 참의 源俊明도 이에 동의하여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보내지 않으려면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고, 그 답으로 의사가 너무 늙어서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에 보내는 반첩에 기재하기로 하였다.789)≪水左記≫, 承曆 4년 윤 8월.

 여기에서 당시에 일본정부가 고려의 요구에 매우 신중하고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한편으로 일본측의 기록에는 고려 성종 16년(997;일본 長德 3)에 고려인이 九州를 침략하게 되어 일본측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더욱 경화되었다는 사실이 보인다.790)≪百練抄≫, 長德 3년 10월. 그런데 같은 해 6월에 고려는 대재부를 통해<日本國宛>·<對馬島司宛>·<對馬島宛>등 3통의 첩장을 일본정부에 전달하였다. 이 때 보낸 첩장의 내용은 일본으로 하여금 고려와 수호관계를 맺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었다. 고려의 첩장을 접한 일본정부는 첩장의 말투가 전과는 달리 대단히「非禮」하다며 고려 침입에 대비한 방위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즉 九州 各國司로 하여금 무기·무구를 수리·보수하고, 대재부 관내의 여러 神位를 승급시키고, 香椎廟에 封戶 25호를 늘렸다. 또 對馬守 高橋仲堪이 문무와 지략이 부족하다고 보고 大宰大監 平中方으로 교체시켜 섬의 경비를 강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였다. 이외에도 北陸·山陰에 太政官符를 보내어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이 고려에 대하여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은 그 해 가을에 일어난 奄美島人의 대재부 관내 諸國亂入事件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그 해 10월 초하루, 조정의 南殿에서 천황과 좌우내대신 이하의 조신이 참석하여 의식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될 때 左近陣官이 큰 소리를 지르며, “고려국인이 對馬·壹岐를 침략하여 肥前國에 도착하였고 여기도 침략하려고 한다”고 하자, 이 때 상하가 모두 놀래고 세 대신도 선례도 잊은 채 정신없이 동쪽계단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791)森克己, 앞의 글, 102∼103쪽. 이것은 사실 고려가 일본을 침략하려 한다는 일종의 유언비어였던 것이다. 이렇듯 당시의 일본은 고려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고려의 요구에 응하기보다 거절의 방법을 택하고 수비에 급급하였으므로 얼마가지 않아서 고려는 무력으로 시위를 하였고, 일본은 그 사실을 고려인이 九州를 침략하였다고 오인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의 고려의 군사력이 매우 막강하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고려의 국력이 일격에 알려지게 되자 일본인 가운데서는 항상 불안하게 생활하기보다 고리에 親附하려는 자들도 나타났다. 목종 2년(999)에 道要彌刀 등 20호가 來投한 사실이 있고,792)≪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2년 10월. 앞에 언급한 왜상인 왕측정은 고려의 國姓을 따라 성을 王氏로 하였다.793)金庠基,≪東方史論叢≫(서울大 出版部, 1974), 457쪽.

 이렇듯 고려에 대하여 두려움과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포로의 송환이 이루어지는 현종 10년(1020) 이후부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활발한 사절의 입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절의 입국도 대개 사절이라고는 하지만 상인활동으로 나타나는 交易使的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高麗史≫世家의 기록으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문종 27년(1073) 7월 日本國人 王則貞·松永年 등 42인이 와서 螺鈿·鞍橋·刀·鏡匣·硯箱·■書案·畫屛·香爐·弓箭·螺甲 등의 물건을 바치기를 청하고, 壹岐島勾當官이 藤井安國 등 33인을 보내어 또 방물을 바치기를 청하니 東宮 및 諸令公府에서 制하여 海道를 통해 서울에 이를 것을 허락하였다.

② 동 28년(1074) 2월 일본국 船頭 重利 등 39인이 와서 토물를 바쳤다.

③ 동 29년(1075) 윤 4월 일본 상인 大江 등 1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④ 동 29년 6월 일본인 朝元·時經 등 12인이 와서 토물을 바첬다.

⑤ 동 29년 가을 7월 일본 상인 55인이 왔다.

⑥ 동 34년(1080) 윤 9월 일본국 薩摩州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⑦ 동 36년(1082) 11월 일본국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⑧ 선종 원년(1084) 6월 筑前의 상인 信通 등이 水銀 250근을 바쳤다.

⑨ 동 2년(1085) 봄 2월 대마도 勾當官이 사신을 보내 柑橘을 바쳤다.

⑩ 동 3년(1086) 3일 대마도 구당관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⑪ 동 4년(1087) 3월 일본 상인 重元·親宗 등 3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⑫ 동 4년(1087) 가을 7월 일본국 대마도에서 元平 등 40인이 와서 眞珠·水銀·寶刀·牛馬를 바쳤다.

⑬ 동 6년 가을 8월 일본국 大宰府의 상인이 와서 水銀·眞珠·弓箭·刀劒를 바쳤다.

 위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고려가 침략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을 씻은 뒤로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으며, 특히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어 예로부터 우리 나라를 통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였던 만큼, 항상 사절을 보내어 進貢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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