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1) 일본과의 관계
  • (2) 표류민의 송환

(2) 표류민의 송환

 고려시대의 대일관계는 정치적으로 볼 때 매우 소원하여 진공무역 정도가그 창구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진공무역 정도라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표류민의 송환과 앞에 기술한 사절의 내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민의 송환에 관한 기사로 10세기 이후 처음 보이는 것은 태조 12년(929)의 일이다. 일본측의 기록을 보면 신라인이 탐라에서 海藻를 교역하다 표류하여 태조 12년 정월에 대마도의 下縣郡에 표착하였는데, 이 때 島守 坂上經國은 표류민을 보호하고 식량을 주어서 擬通事 長岑望通과 檢非偉使 秦滋景을 파견하여 서장을 가지고 金州에 보냈다는 것이다.794)中村榮孝,≪日鮮關係の硏究≫(上)(吉川弘文館, 1965), 131쪽. 물론 이 때 이 지역의 관할권은 견훤에게 있었기 때문에 사신들은 견훤에게 보내진 것이다.

 표류민의 송환으로 기록상 가장 많은 수이며, 고려왕조로서는 처음인 것은 현종 10년(1019)의 일이다. 당시 고려의 鎭溟船兵部部署 張渭男 등은 해적선(여진) 8척을 잡아 취조한 결과 해적선 안에 일본인 남녀 259명의 포로가 있음을 알고 아뢰니, 고려 정부에서는 供驛令 鄭子良을 시켜 그들을 본토에 송환하였다.795)≪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0년 4월 병진. 이 사실이 일본측의 사료에는 보다 자세히 적혀 있다. 즉 현종 10년 4월에 여진적이 대마·일기와 박다까지 육박하였는데, 퇴각할 때 많은 포로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 여진적은 고려를 습격한 후 일본에 갔던 것으로, 고려에서는 이들의 귀로를 기다려 천여 척의 병선으로 격멸시키고, 이들이 다섯 군데로 나누어 수용한 일본인 포로 중 3개소의 300여 명을 탈회하여 먼저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도 모두 송환키로 하고, 6월에 정자량으로 하여금 259명을 송환케 했다는 것이다.796)≪小右記≫, 寬仁 3년 8월.
森克己, 앞의 글, 105쪽 참조.
이 때의 포로송환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매우 고마워하고 정자량에게 祿과 일본의 位階를 수여할 것 등의 우대방법을 논의하고, 실제로 그가 귀국할 때에 감사의 반첩과 더불어 예물을 주었다.

 이 현종 10년의 포로송환 이후로 양국관계는 상당히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현종 20년에는 탐라민 貞一 등이 왔고,797)이에 대하여 森克己는 일본의 大宰府에서 표류민을 송환한 것으로 보았는데,≪高麗史≫권 5, 현종 20년 7월조에는 貞一 등 21명이 항해 중에 바람에 밀리어 極遠島에 표착하여 7개월 동안 억류 당하다가 정일 등 7인만이 몰래 小船을 타고 那沙府(長崎)를 거쳐 생환하였다고 하여 탈출할 것으로 기록하였다. 덕종 3년(1034)에는 對馬島主가 일본 大隅지방에 표류한 고려인을 송환하였으며,798)≪日本紀略≫後篇 14, 長元 7년 3월. 정종 2년(1036) 7월에도 일본에서 고려의 표류인 謙俊 등 11인을 돌려보냈다. 그 뒤 문종 3년(1049) 11월에는 일본 對馬島官이 首領·明任 등을 통해서 고려의 飄風人 金孝 등 20인을 금주에 돌려보내 왔다. 이 때 국가에서는 東南海船兵都部署司를 통해 명임 등에게 예물을 주었다.

 표류인의 송환과는 조금 다르지만 당시에 일본과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문종 5년 7월에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어 被罪逃人 良漢 등 3인을 압송한 사실이다. 그 후 문종 14년 7월에는 동남해선병도부에서 “(대마도에서) 우리의 표풍인 예성강 백성 位孝男을 보내왔다”고 보고하니, 그 사신에게 후한 예물을 주었고, 문종 32년 9월에는 일본에서 탐라의 표풍민 高礪 등 18인을 송환하였으며, 또 이듬해 9월에도 일본에서 고려의 표풍 상인 安光 등 44인을 돌려 보낸 일이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표류민 송환이 대체로 7월에서 9월 사이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태풍이 많이 발생하는 계절적 요인으로 그 시기에 표류민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류민의 송환은 경색되었던 양국의 관계를 부드러운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작용하여 현종대 이후 進貢무역이나마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만 종래에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진 것처럼 시종일관 고려가 일본에 대해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을 취해 온 것이 아니라, 사절의 내왕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적어도 문종대 이전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고려가 적극적으로 일본에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이 당시의 국내의 정치적 불안정과 고려에 대한 군사적 두려움 때문에 문호개방과 수호에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