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는 당시 大食이라 불리웠는데 이 大食國人은 唐代 이래로 南中國의 廣州(廣東)를 중심으로 무역을 해왔으며 송대에 이르러 송의 해외무역 장려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당시 남중국 연안에 출입하면서 宋商의 고려무역에 자극되어 마침내 고려에까지 진출하였다.≪고려사≫世家에 보면, 현종 15년(1024) 9월에 “大食國의 悅羅慈 등 10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고 하였으며, 이듬해 9월에도 “대식국의 蠻夏, 詵羅慈 등 10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정종 6년(1040) 11월에는 대식국의 상인 保那盍 등이 와서 水銀·龍齒·占城香·沒藥·大蘇木 등 각종 물자를 바쳤는데,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그들을 客館에서 후하게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이 돌아갈 때에는 많은 금과 비단을 주었다.800)≪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6년 11월 병인.
아라비아 상인의 내왕에 관한 기사는 위에 보이는 3회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고려와 지속적인 무역활동을 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송의 상인은 고려와 아라비아 상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제약을 받아 고려에 대한 아라비아 상인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계속되지 못한 것 같다.801)김상기,<해상의 활동과 문물의 교류>(≪국사상의 제문제≫4, 국사편찬위원회, 1959), 56쪽.
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정치적 관계나 문화적 교류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상인들의 무역기사만 3회에 걸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는 매번 일시에 100여 명씩 출입한 것을 볼 때 그들의 무역이 매우 대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는 송을 통하여 다른 나라에 매우 부유한 나라, 문물이 발달하고 풍성한 나라로 소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의 욕구를 충동하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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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