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Ⅱ. 대외관계
  •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 2) 아라비아 및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 (2)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2)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

 고려시대의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예성항을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이던 선박의 활동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예성항에의 선박 내왕의 모습에 대하여는 李奎報의 詩에 잘 나타나 있다.

조수가 들고 나매,

오고 가는 배는 머리와 꼬리가 잇대었구나.

아침에 이 다락 밑을 떠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돛대는 南蠻하늘에 들어 가누나.

사람들은 배를 가리켜 물위의 驛馬라 하지만,

나는 바람 쫓는 駿馬의 굽도 이에 비하면 오히려 더디다 하리 …

어찌 區區히 南蠻의 지경뿐이랴.

이 木道(배를 말함)를 빌리면 어느 곳이고 가지 못할 곳이 있으랴(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6, 又樓上觀潮贈同寮金君).

 물론 시적인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남방 여러 나라들과 빈번한 왕래가 있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종 당시 고려는 문화와 禮樂이 융성하고 商船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배들이 들어오고 있어 중국(송)으로부터 별 도움받을 것이 없다는802)≪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8월. 주장처럼 당시 고려의 해상무역은 중국뿐만 아니라 남양의 여러 나라와도 활발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고려사≫에 남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기사는 후기에 와서야 보이게 된다.≪고려사≫에 처음 나타나는 남양국가의 이름은 交趾인 바 그것은 “元나라에서 耽羅 達魯花赤〔다루가치〕를 교지로 귀양보내고 右丞 阿撒(아살)로 하여금 그를 대신케 하였다”803)≪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9년 9월 을축.는 기사이다. 이 기사는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탐라(제주도)의 다루가치를 교지로 유배시킨 것을 나타낸 것인데 당시 교지는 원의 지배아래 있었다.

 실제로 고려와 남양의 나라와 접촉한 사례는 충렬왕 24년(1298) 6월에 馬八國(Mobar) 왕자 李哈里가 사신을 보내어 銀絲帽와 금으로 수놓은 手箔·沈香 5근 13냥·베(土布) 2필을 왕에게 바친 경우이다.804)≪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즉위년 6월. 마팔국은 인도반도 동해의 코르만텔(Coromandel)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면포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이 때에 마팔국에서 고려에 예물을 보낸 것은 왕자비가 고려 蔡仁揆의 딸이기 때문이다.805)고려 충렬왕 때 蔡氏는 원의 承相 ■哥(얼가)에게 시집갔으나, 얼가가 처단되자 원 황제에 의해 孛哈里와 재혼하였다(위와 같음). 당시 고려에 들어온 마팔국산 면포를 西洋布라 하였는데 이 때가 서양포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예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고려시대의 남양과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인식이 많았다. 공민왕 때의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 고려는 중국과 비교적 가깝고 문물과 예예악이 서로 통하며 經史가 중국과 비슷하니 다른 藩國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 변방과 먼나라들 예컨대 占城·安南·西洋■里·爪哇·勃泥·三佛齊·暹羅斛·眞■ 등처의 새로 귀의한 나라들도 빈번히 사람을 보내오면 옛날의 禮에 의하라(≪高麗史≫권 44, 世家 44, 공민왕 22년 7월).

 또한 명황제는 “고려·안남·점성 등에 경서에 밝고 조행이 바른 선비는 명나라 會試에 응시하게 하라”806)≪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6월.고 하였으며 명나라 황제 즉위 초에 고려와 교지가 표문을 보낸 기사도 보인다.807)≪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7월 임인. 이와 같이 당시 고려는 중국을 중심으로 점차 남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고 있었다.

 중국을 통한 南蠻人의 입국은 王三錫이 처음인 듯하다.≪고려사≫王三錫傳에 보면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다 온 기록속에 왕삼석이 나오고 있다. 왕삼석은 남만 사람으로 성질이 경망스럽고 간특하며 기술도 없는 사람이나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幸臣의 소개로 충숙왕을 처음 뵙고 바로 왕의 시종이 되었다. 충숙왕과 함께 고려로 귀국한 후에는 의술로 왕에게 아첨하며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808)≪高麗史≫권 124, 列傳 37, 嬖幸 2, 王三錫.

 남양 국가에서 사신을 보내어 國書와 禮物을 진상한 기록으로는 공양왕 3년(1391)의 기록이 처음이라고 하겠다. 이에 의하면 暹羅斛國(Thailand, Siam)에서 奈工 등 8인을 파견하여 국서와 예물을 바쳤는데, 그 국서에는 성명과 봉인이 없고 다만 작고 둥근 도장만이 있어서 사신 신분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원래 그들은 무진년(1388;우왕 14)에 왕명을 받고 출발하여 일본에서 1년간 체류하다가 고려에 도착한 자들이다. 고려와의 거리는 대략 북풍이 불면 40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풍속은 한쪽어깨를 들어내거나 발을 벗으며, 높은 사람은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그 하인들은 尊長을 보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나, 통역을 세 번 거쳐야 말이 통할 수 있었다.809)≪高麗史≫권 46, 世家 46, 공양왕 3년 7월.

 이로써 고려시대의 남양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고, 또 중국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희귀한 남양산 물품들이 고려에 수입되었다. 따라서 남양과의 직접적인 무역은 조선에 들어가서야 비교적 활발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羅鍾字>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