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1) 나말려초의 교종과 선종
  • (1) 왕건의 선대 세력과 선종

(1) 왕건의 선대 세력과 선종

 신라 하대 초기에는 중앙귀족이었다가 지방의 연고지를 찾아 나아간 落鄕豪族 세력이, 지방에서뿐 아니라 중앙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그 사회를 움직여 갔다. 그러나 신라 말이 되면 지방민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면서 등장한 토착호족이나 軍鎭勢力이 오히려 강성해졌다. 진성여왕 이후 후삼국시대가 되면 지방의 대호족이 주위의 군소 지방세력을 흡수하면서 삼한을 통합하려는 기운이 익어가고 있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것은 토착호족 세력과 군진세력이 제휴하면서 이루어져 갔다. 王建은 바로 이러한 세력배경을 가지고 등장한 인물이다.

 왕건의 선조인 聖骨장군 虎景은 신라 하대 개성지방의 호족이었으며001)李佑成,<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高麗 其人制度의 起源과의 關係에서―>(≪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100쪽. 조부인 作帝建 때에는 開城·貞州·鹽州·白州·江華·喬桐·河陰 등의 백성을 동원하여 永安城을 쌓고「宮室」을 지을 정도로002)≪高麗史≫권 首, 高麗世系. 강력한 호족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작제건은 서해의 龍女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編年通錄≫에는 용녀가 막연히 서해 용왕의 딸로 되어 있으나, 李齊賢이 인용한≪聖源錄≫에는 平州(平山)사람 豆恩坫 角干의 딸이라 하였다.003)“昕康大王之妻 龍女者 平州人豆恩坫角干之女子也”(위의 책). 용녀의 집안은 평주지방의 호족이었는데, 西海龍으로 나타난 것은 해상세력임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왕건의 先代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토착 호족세력이었는데, 禮成江을 배경으로 한 해상세력과 결합하여 대호족세력을 형성하였다. 왕건의 부친인 龍建은 삼한을 병합하려는 의사를 가질 정도로 집권적인 대세력을 형성하였다.004)金杜珍,<了悟禪師 順之의 禪思想-그의 三遍成佛論을 中心으로>(≪歷史學報≫65, 1975), 11∼13쪽.

 신라 하대에 지방호족은 선종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자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은근히 선종을 옹호하였고 선종사원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왕건의 선대도 그 세력권 내에 여러 선종사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順之가 주지로 있었던 五冠山의 瑞雲寺도 그러한 사원 중의 하나였다.

 순지의 생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는 약관에 오관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헌안왕 2년(858)에는 중국에 유학했다. 65세에 입적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순지는 20세에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중국에 유학한 것으로 추측한다면, 그는 적어도 진성여왕대까지는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순지의 俗姓은 朴氏이고 浿江人이며, 祖考의 가업은 雄豪하였고 대대로 邊將으로서의 명예가 그 지방에 잘 알려져 있었다.005)≪祖堂集≫권 20, 順之. 곧 순지의 집안은 지방호족이었다. 순지가 주지로 있었던 서운사는 그 이전의 龍嚴寺를 고친 것이었는데, 그 檀越은 왕건의 부친인 龍建과 조모인 龍女였다.006)≪祖堂集≫권 20, 順之傳에 의하면 順之가 주석한 五冠山 龍嚴寺의 단월은 元昌王后와 威武大王인데 서운사로 고쳤다. 元昌王后는 景(昕)康大王인 作帝建의 부인이며 威武大王은 龍建이다.

 신라 하대의 선종은 外息諸緣 즉 밖으로부터의 거추장스런 간섭을 배제하면서 見性悟道를 주장하였다. 때문에 그것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지니는「內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진성여왕대를 지나면서 지방의 대호족이 주위를 흡수 통합해 가는 분위기 속에서 선종사상은 변화하여 갔다. 순지의 선사상은 바로 이런 면을 밝힐 수 있게 한다.

 ≪祖堂集≫에 나오는 순지의 사상으로 相論과 三遍成佛論이 있다.007)우선 相論은 四對八相·兩對四相·四對五相으로 구성되어 있다. 4대8상은 所依涅槃相(○相:頓悟)·牛食忍草相(○*牛相:頓證實際)·三乘求空相(○犇相:漸悟)·露地白牛相(○*牛相:迴漸證實際)·契果修因相(牛○相:衆行)·因圓果滿相(○*卍相:衆行)·求空精行相(○牛相:衆行)·漸證實際相(○*王相:漸證實際)이다. 양대4상은 想解遣敎相(牛○*人相:自己理智를 밝히지 못함)·識本還源相(○*人相:열반을 인식함)·迷頭認影相(○*人牛相:他方佛을 구함)·背影認頭相(○*人相:自己佛을 인식함)이며, 4대 5상은 擧■索蓋相(○相:佛體의 가능성)·把玉覓契相(○相:佛體의 형성)·欽入索續相(○*厶相:內在的 實我를 인식 못함)·已成寶器相(○*佛相:衆行에 이르지 못함)·玄印旨相(○*土相:實我를 추구함)이다. 상론은 삼편성불론보다 초기에 형성된 사상으로, 지방호족의 독자세력 형성에 도움이 된 것이었다. 특히 兩對四相에서는 교학 불교의 경전이나 불타에 대한 권위의식을 부정하고, 他方의 부처나 정토를 찾는 대신 그것을 자기 안에서 구하게 했다. 양대사상에서 교학불교가 부정되는 것은 下根人의 경우에 한한다. 이것은 上根人의 경우 교학도 허용된다는 결론이 된다. 四對八相 중 牛食忍草相에서는 화엄사상이 융합되고, 露地白牛相에서는 법화사상이 융합되었다. 四對五相은 순지의 선사상 체계를 일원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며, 사대팔상과 양대사상을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성격면에서 양대사상과 통하지만, 그 논리의 전개 방법은 삼편성불론과 비슷하다. 곧 사대오상은 삼편성불론을 성립시키기 위한 교량적 역할을 했다.008)金杜珍,<了悟禪師 順之의 相論>(≪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111∼112쪽.

 삼편성불론은 證理成佛·行滿成佛·示顯成佛로 나뉘인다. 증리성불은 頓悟에 의해, 행만성불은 漸修에 의해, 시현성불은 八相의 과정을 통해 성불한다는 것이다. 또 이 삼편성불의 경지는 모두 같다. 三遍實際論은 頓證實際·廻漸證實際·漸證實際이다.「內證外化」의 사상은 돈증실제에서 나타나는데, 선종사상과 화엄사상을 융합한 것이며, 돈오 후 自利利他行을 위한「衆行」을 행하게 한다. 회점증실제는「會三歸一」사상을 담고 있는데 선종사상과 법화사상을 융합한 것이며, 三乘人으로 하여금 돈오 후에 衆行을 행하게 한다. 점증실제는 교선일치의 사상을 담고 있는데, 漸敎悟나 頓悟의 어느 것으로도 깨칠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러한 순지의 선사상은 지방의 대호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삼편성불론은 각기 독자적 방법을 추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내재적 實我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지방의 대호족을 중심으로 군소세력을 통합하는 데 필요한 사상은 돈증실제론에서 나타난「內證外化」사상이다.009)金杜珍, 앞의 글(1975a), 43∼44쪽. 內證은 頓悟의 과정이며, 내재적 實我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갖게 된다.「外化」는 주위의 세력을 포섭 융합해 가는 衆行과정이다. 회점증실제론에 나타난「회삼귀일」사상은 용건이 삼한을 통합하려는 의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이었다. 점증실제론에 나타난「교선일치」사상은 지방의 대호족이 주위의 군소 지방세력을 흡수 동화하면서 통합된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순지의 선사상은 중국 潙仰禪宗의 接化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위앙선종 그대로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선종사상은 元曉 사상의 전통을 이은 면을 지녔다. 특히 원효가 법화경의「회삼귀일」사상을 주장한 이후, 순지에 의해 그것이 다시 주장된 셈이다. 법화의「회삼귀일」사상은 삼한을 통합하려는 사회사상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순지의 삼편성불론은 고려시대 불교사상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義天은 화엄종에서 出身하여 법화사상을 수용하였고, 신라 말의 선종을 받아들이면서 天台宗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천태종은 순지의 사상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또 순지의「교선일치」사상은 고려시대 불교의 교선융합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돈증실제론은「先悟後修」를 주장한 知訥의「定慧雙修」로 연결된다. 점증실제론은 漸修를 닦은 후 頓悟 과정을 논한 것이기 때문에, 義天의「敎觀兼修」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순지의 선사상은 의천의 천태종이 일어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고, 고려시대 불교사상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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