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1) 나말려초의 교종과 선종
  • (4) 나말려초의 화엄결사

가. 오대산의 화엄결사

 五臺山事蹟은≪三國遺事≫에 실려 있는데, 지금까지는 신라 중대의 신앙결사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속에는 신라사회에서 행해진 불교의 여러 신앙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오대산은 본래 문수가 거주하는 곳이었는데, 뒤에 五臺의 各臺는 眞身의 상주처로 되었다. 곧 東臺에 觀音, 南臺에 地藏, 西臺에 無量壽, 北臺에 釋迦, 中臺에 文殊가 거주하였다. 또 중대에는 문수를 모시는 眞如院과 아울러 華藏寺와 文殊岬寺가 따로 있었으며, 그것은 모두 문수신앙과 관계되었다.023)≪三國遺事≫권 3, 塔像 4, 臺山五萬眞身.

 오대산사적에 얽힌 불교신앙은 신라 불교의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겠지만, 막상 그것의 성립시기는 신라 중대에 한한 것이 아니다. 그 중에 진여원은 성덕왕을 전후한 시기에 개창되었을 것이지만, 5대의 각 臺가 모두 결사된 시기는 신라 말엽이었다. 오대산이 문수의 주처지에서 五如來의 상주처로 관념되는 것은 당의 澄觀에 의해서였으며, 그가 활동한 9세기는 신라 하대에 해당된다.024)朴魯俊,<唐代 五臺山信仰과 澄觀>(≪關東史學≫3, 1988), 105∼107쪽. 오대산 내지 月精寺사적과 깊이 연관된 최초의 인물은 信孝이다. 그가 만난 五類聖衆은 5대의 각 대에 상주하는 진신과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신효는 신라 하대의 인물이다.025)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新文館, 1918), 136쪽의 五臺佛宮山中明堂條에서 信孝는 高麗 때의 公州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효 외에 오대산사적에 깊이 관여된 자는 信義인데, 그는 梵日의 문인이다. 범일은 진성왕 8년(894)에 입적하였으므로 신의는 적어도 진성왕대 이후에 활동하였을 것이다. 신의가 입적하고 난 후 월정사 내지 오대산사적은 폐허가 되어 내려왔는데, 이를 중창한 자는 水多寺의 長老인 有緣이다. 유연이 중창하면서 월정사는 점점 큰 절이 되었으며, 오대산사적 역시 완전하게 갖추어져 갔다. 후삼국의 동란기에 폐허가 된 월정사를 다시 일으켰기 때문에 유연은 아무리 시대가 빨라야 후삼국시대 말, 아마 나말려초에 살았던 듯하다.

 오대산신앙 속에는 慈藏의 사상전통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나 자장이 말년에 은거하여 문수의 진신을 보려 했던 곳인 淨岩寺는 오대산사적의 중심도량인 월정사가 아니며,026)金杜珍,<慈藏의 文殊信仰과 戒律>(≪韓國學論叢≫12, 1990), 23∼29쪽. 거기서 그는 문수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죽어갔다. 자장은 오대산의 문수신앙과 반드시 밀착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뒤에 월정사 중심의 오대산신앙이 결성될 때에는 자장계 불교신앙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자장은 말년에 의상계 화엄종으로부터 배척당했는데, 오대산사적에서는 자장계와 다른 불교종파와의 반목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은 오대산사적이 형성될 당시에 자장계와 의상계의 화엄종 사이의 갈등이 정리되었음을 알려준다.

 오대산신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의상계 화엄신앙이다. 東臺에 관음이 중요시되어 모셔진 점이나 5대의 각각에 圓通의 불상을 모신 점 등은 의상계 화엄사상의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대산사적의 성립에 실제로 깊이 관여한 신효나 유연은 모두 의상계 화엄종에 속한 인물로 생각될 수 있다. 오대산신앙 속에는 신라 法相宗의 전통이 자의적인 힘에 의해 정리된 느낌을 준다. 신라불교 신앙으로 대단히 중시되어 온 미륵신앙이 배제되어 있고, 미타는 무량수로 나타나 있다. 곧 미륵과 미타의 兩尊을 모시는 법상종 교단의 신앙이027)文明大,<新羅 法相宗의 成立 問題와 그 美術>下 (≪歷史學報≫63, 1974), 60쪽. 오대산사적 내에 배제되어 있는 셈이다. 미륵과 미타를 모시는 법상종 교단의 맥이 궁예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에,028)金柱珍,<高麗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1;≪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117∼118쪽). 오대산사적이 성립되는 시기는 적어도 궁예가 축출된 고려 초기여야 할 것이다.

 고려 말 閔漬가 찬한<五臺山佛宮山中明堂記>에는 5대의 각 대에 이루어진 결사는 왕건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의 내용이 곧 그것이다.

五臺山은 佛聖眞身이 상주하는 곳이다. 월정사는 五類聖衆이 행적을 나타낸 곳이다. 하물며 이 절은 역시 오대산의 목과 입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가 왕업을 열 때 옛 聖訓에 의해 매년 봄·가을로 각각 백미 200석과 소금 50석을 바쳤으며, 별도로 공양하여 복리를 쌓는 비용으로 하고 드디어 역대의 恒規로 삼았다(李能和,≪朝鮮佛敎通史≫下, 138쪽).

 왕건은 옛 聖訓에 의해 매년 200석의 쌀과 50석의 소금을 바치고 그 외에도 따로 공양을 드리고 있다. 옛 성훈은 寶川이 남긴「後來山中輔益邦家之事」일 것 같다. 물론 그 속에 5대의 각 대의 결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산중에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五類聖衆信仰과 월정사를 목과 입으로 비유하면서 각 대에 대한 구체적인 결사를 결성한 것은 왕건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사실이 보천의 오대산사적으로 부회되어 기록되었던 듯하다. 眞如院은 비록 신라 중대에 설립되었겠지만, 그것과 연관된 孝明의 등극 사실 등은 어쩌면 궁예를 축출하면서 등장하는 왕건의 사적과 은유적으로 얽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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