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선종 입장에서 교종사상의 포용
왕건은 호족연합책으로 후삼국을 통합해 갔다. 그런 과정에서 결혼정책을 추진하여 자신은 물론 전국 유력 호족의 딸과 결혼하였을 뿐 아니라, 호족과 중앙귀족들의 자제들을 혼인시킴으로써 호족들 사이의 상호 결속을 이루었다. 아울러 왕건은 승려와의 결속을 중요시하였다. 신라 하대의 지방호족은 대체로 거대한 사원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사원의 주지는 지방세력을 형성하였거나 아니면 유력한 호족과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이 승려와 결합을 시도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 있었다. 왕건은 승려를 통하여 그들과 결합관계에 있는 지방호족과의 결연을 의도하였다.031)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1981), 141∼152쪽. 왕건과 승려와의 결연이나 호족연합책 등은 당시의 불교사상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왕건은 불교의 종파를 초월하여 교·선의 어느 승려와도 연결을 가졌다. 승려에 대한 왕건의 이러한 태도와 연관되어 고려 통일기의 불교사상은 그안에 다른 종파의 사상을 융합하여 갔다. 고려 통일기의 불교사상은 교·선이 융합되어 가는 경향을 가졌고, 그것은 호족연합책과 연관된 시대적 소산이었다. 고려 초의 교선융합사조에는 대체로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선종승려가 교종사상을 융합하려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교종승려가 선종사상을 융합하려는 입장이었다.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사상을 융합하려는 대표적인 사람은 玄暉이다. 신라말 이래 선사라 하더라도 대개 화엄사상을 익혀 알고 있었으며, 고려 초 왕건과 연결된 선승들은 대체로 화엄을 중시하여 그것을 습득하고 있었다. 현휘의 사상적 특성을 간명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직 禪德을 尊崇하고자 佛戒를 늘 행하며, 大師의 말은 어긋남이 없고 마음으로 靈器를 전한다.
② 생각컨대 世間·出世問은 모두 佛性으로 돌아가야 되고, 體에는 分別이 없으므로 모두 一乘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一託의 松門이 十經의 槐律로 된다(<忠州淨土寺法鏡大師慈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53∼156쪽).
선사이지만 현휘는 항상 佛戒를 행하고 언행을 일치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적은 그가 교선융합사상의 경향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一託의 松門은 禪門을 뜻하고 十經의 槐律은 교종사상으로 이해된다. 松門이 槐律로 됨은 선문을 중심으로 교종사상, 특히 화엄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다. ‘일탁의 송문’ 내에 ‘십경의 괴율’이 포함될 수 있으며, 세간·출세간의 모든 현상이 불성으로 돌아가 一乘으로 만나게 된다. 이것은 ‘一中에 일체가 있고 한 티끌 속에 十方의 세계를 포함시킨다’는 화엄사상과 다를 바 없다.
현휘는 선종사상 내에 화엄사상을 융합시켜 하나로 돌아감을 강조하였다. 다음 기록을 유념해 보기로 하자.
千萬의 一流도 바삐 흐르다 보면 門閾을 지나지 않게 되어 큰 차이를 나타낸다. 만약 禪關에 경건히 參謁하여 우러러 돌이켜 보고 매번 들어 曉誨하여 修行한다면, 급기야는 鍾을 쳐 크게 울린다 하더라도 바다에 들어가 같은 맛이 된다(<忠州淨土寺法鏡大師慈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54쪽).
현휘는 萬象을 천만 갈래로 흐르는 개천의 물로 비유하여, 그것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비록 차이가 있으나 바다에 들어가면 동일하게 된다고 하였다. 현휘에게서 문제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깨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나 모든 법은 같은 眞性을 가졌으므로 그는 그 안에서 동질성을 발견하여 융합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위에 떨어지는 물이 바로 바다를 생각할032)崔彦撝,<忠州淨土寺法鏡大師慈證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55쪽. 정도로 동질성을 내세워 큰 하나로 돌아감을 강조했다.
일찍부터 忠州 劉氏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현휘는 효공왕 10년(906)에 중국에 들어가, 道乾의 법을 받고는 태조 7년(924)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왕건은 그를 국사에 봉하여 충주의 淨土寺에 머물게 했다. 이 때 현휘는 왕건을 위해 法王의 교화를 말하였다. 그것은 왕건을 위해 賢士를 등용하는 등의 구체적인 정책의 건의였다. 태조 24년(941)에 입적하기까지 그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태조 3년(920) 이후가 되면 해상권이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현휘의 귀국은 왕건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충주의 정토사는 통일 이전에도 왕건의 세력권 내에 들어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충주 유씨들에 의해 경영된 절이다. 현휘는 충주 유씨세력과 깊이 연관되었으면서도 왕건과 돈독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의 교선융합사상은 왕건의 호족연합책을 이념면에서 뒷받침하는 연립적인 통일사상이었다.033)金杜珍,<玄暉(879∼941)와 坦文(900∼975)의 佛敎思想―高麗初의 敎禪融合思潮와 關聯하여―>(≪高柄翊先生回甲紀念 史學論叢≫, 1984), 397쪽.
현휘뿐 아니라 고려 초기 선사들의 사상은 연립적인 통일사상의 경향을 띠어갔다. 특히 왕건과 연결되어 왕정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던 大鏡 麗嚴·法鏡 慶猷·先覺 逈微·眞澈 利嚴 등 四無畏士034)<長湍五龍寺法鏡大師普照慧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164쪽.의 사상은 현휘와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4무외사들은 중국에 유학하여 雲居 道膺으로부터 선종사상을 전수받아 왔다. 그런데 도응의 사상 속에는 “-切는 즉 萬法이요, 萬法은 즉 -心이며, -心은 즉 一切性이다”035)金東華,≪禪宗思想史≫(太極出版社, 1975), 295쪽.라는 화엄사상과 융합되는 면이 내포되어 있다. 왕건이 현휘를 국사로서 경배하였을 뿐 아니라 4무외사를 존경하였던 이유는 이러한 그들의 사상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초의 선사들은 이들처럼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체로 교선융합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海龍王寺의 開山祖인 普耀禪師는 吳越로부터 대장경을 가지고 들어왔다.036)≪三國遺事≫권 3, 塔像 4, 前後所將舍利. 선사인 보요가 대장경을 가지고 들어온 데에서 당시에 선사들이 불교경전을 외면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의 포용
교종승려들도 선종사상을 융합하려 했다. 신라하대 선종이 유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교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나, 고려 초에 화엄종을 위시한 교종세력이 점차 대두하여 갔다. 특히 화엄종 세력이 더 커져 갔는데,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한 왕건은 충남 連山에 開泰寺를 세우고 그 疏文을 직접 찬술하였다. 개태사는 후백제 유민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건되었는데, 화엄도량으로 나타나 있다.037)文明大,<開泰寺 石丈六三尊佛立像의 연구―毘盧舍那丈六三尊佛像과 관련하여―)(≪美術資料≫29, 國立中央博物館, 1981), 9∼10쪽. 왕건이 직접 비문을 찬술하였을 정도로 중요시된 개태사는 통일국가의 화엄 진흥책과 연결되었을 법하다. 왜냐하면 화엄사상은 통일신라 이래로 중앙왕실과 연결될 수 있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고려 초가 되면 선종사상뿐 아니라 화엄종사상까지도 교선융합의 경향을 띠어갔다. 말하자면 화엄종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합하려는 사상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속한 대표적 인물이 坦文이다. 탄문의 교선융합사상은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① 釋氏의 三藏에 六△가 있는데 △△△△는 △禪의 根이요, 밖으로 經論은 律敎의 문이다. 누가 그 전부를 실로 갖추었겠는가. 오직 大師이다.
② 迦耶山寺에 이르니 그 승도들이 仙樂을 갖추어 부처를 영접하듯이 했다. 이에 幡旗가 구름처럼 나부끼고 鉢螺가 번개처럼 울렸으며, 敎·禪의 1천여 인이 奉迎하여 절로 들어갔다(金廷彦,<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朝鮮金石總覽≫上, 224∼230쪽).
탄문은 莊義山寺에서 주로 화엄을 수학하고 15세 되던 해에 信嚴律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妙覺과 아울러 律義를 갖추었다. 곧 교종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셈이다. 이후 장의산사의 수도생활이 그에게 교선융합사상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경전을 하루 동안 읽으면서 반드시 수행을 했고, 신엄율사도 그에게 “하루 동안 현행을 행함이 30夫를 대적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心傳」과 아울러 경전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다. 탄문의 사상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지적한 머릿 부분의 비문 기록에는, 그가 禪根과 아울러 律敎를 갖춘 인물로 부각되어 있다.
밖으로 경론을 추구함이 율교라면 안으로 自性을 깨치는 면이 선근이다. 이와 연관시켜 그의 법호인 탄문과 字인 大悟는 교선융합적인 사상과 연관하여 붙여졌다. 즉 탄문은 敎의 뜻에서 붙여진 것이고 자성의 깨침은 신라하대 이래 선종산문에서 강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탄문은 교선융합사상 경향을 내세우면서 고려 초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선종산문의 포용에 관심을 두었다.
실제 탄문은 광종 26년(975)에 普願寺로 돌아올 때 교종·선종의 승려 1,000여 명의 영접을 받았다. 보원사는 義湘 이후 華嚴十刹 중의 하나로 줄곧 화엄도량으로 중요시되었으며, 개경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곧바로 연결이 가능한 곳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 왕실은 일찍부터 보원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보원사 내에는 교종뿐 아니라 선종 승려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선종 승려들은 물론 신라 하대 이래의 9산 선문에 속해 있었던 자들로 보인다. 교종·선종 승려가 대립하지 않은 채 한 곳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광종대 말이라는 시대적 여건 속에서 이해되어야겠지만, 탄문사상의 교선융합 경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탄문은 화엄의 입장에서 교종사상을 받아들여 종합하였다. 태조 18년(935)초에 西伯山의 神朗太大德이「覺賢의 餘烈」을 편찬하여 方廣의 秘令을 펴고 있었는데, 입적할 때가 되어 탄문을 초청했다. 탄문이 신랑에게 나아가 화엄 三本을 들려주니, 신랑이 부끄러워 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화엄대교가 번성하게 되었다.038)金廷彦,<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朝鮮金石總覽≫上), 226쪽. 心傳者로 표현된 신랑태대덕은 선종 승려로 생각된다. 그가 편찬한「각현의 여열」은 선종 조사의 행적을 모은 승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저술을 편찬하기 위해 신랑은 고려 초기까지의 선종사상의 전통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종사의 흐름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신랑이 탄문을 청하여 듣고자 한 것은 선종계통이 아닌 화엄사상이었다.
탄문은 화엄종 승려이지만 선종사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광종 19년(968)에 歸法寺에 주석한 후에도039)金龍善,<光宗의 改革과 歸法寺>(≪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106쪽. 탄문은 선종 사원과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었다. 화엄종 승려이지만 선종과의 인연을 넓게 가지는 과정에서 선종의 신랑과 교류하였다. 그런데 막상 신랑이 탄문에게 감응된 것은 화엄 3본을 듣고서였으며, 탄문이 신랑에게 화엄을 설함은 마치 석가가 가섭에게 설법한 것이나 혹은 淨名이 文殊에게 묵대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었다.040)金廷彦, 앞의 글, 226쪽. 이것은 선종사상에 대한 화엄사상의 우위를 말한 것으로, 탄문은 화엄사상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