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2) 광종대의 불교통합운동과 천태학의 연구
  • (2) 천태학의 연구

가. 법안종의 성립

가) 법안종의 등장

 광종대 초기까지 선종이 유행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9산선파가 모두 흥했던 것은 아니다. 광종은 그 중 鳳林山派와 曦陽山派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어, 광종 원년(950)에 高達山의 證眞(元宗)大師 璨幽를 국사에 봉하고 그 다음 해에는 鳳岩寺의 靜眞大師 兢讓을 서울로 불러 帝釋院에 머물게 했다. 즉위초에 광종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政道를 구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피비린내나는 왕위계승의 와중에서 광종의 즉위를 정당화하려는 이념을 모색하려는 것이며, 보편적인 법을 내세우는 불교이념을 통하여 치국의 모책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다만 광종이 9산문 중 특별히 봉림산문이나 희양산문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것은 두 산문이 교선일치 내지 성상융회적 사상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상융회적 사상경향은 선종의 黙守를 위한 空觀의 인식이어서, 뒷날 전제정치의 이념을 제공하는 균여의 성상융회사상과는 입장을 달리할지라도 그것을 성립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058)金杜珍,<高麗光宗代 法眼宗의 登場과 그 性格>(≪韓國史學≫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13쪽. 광종이 두 산문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나타낸 이유가 바로 이러한 데 있었다. 그런데 선사들이 선종의 입장에서 성상융회사상을 포용하려는 경향은 法眼宗을 성립시키는 데 작용하였으며, 더욱이 玄暉의 교선융합사상이 광종대의 법안종사상을 대두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광종대의 교선일치적 사상경향인 법안종이나 天台宗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고려 초에 법안종이 많이 전해졌는데 당시의 법안종 승려로 慧炤·靈照·靈炤 등이 있었다고 한다.059)李能和,<高麗初多傳法眼派>(≪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344∼346쪽. 이것은 광종대에 법안종이 대두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외에도 법안종 승려로서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로 道峯 慧炬·寂然 英俊·眞觀 釋超·智宗 등이 있다. 이들은 고려 초 법안종 성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인데, 고려사회에서 활약한 시기는 석초를 제외하면 대체로 광종대 말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광종대 중기에 법안종은 이미 고려 국내에 알려져 있었으며, 광종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광종은 중국의 延壽를 흠모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제자의 예를 폈으며, 고려 승려 36인을 그 문하에 보내어 印記를 받아 귀국하게 하였다.060)道 原,≪景德傳燈錄≫권 26, 知覺禪師 延壽. 이러한 기록은 그 연대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지종이 광종 10년(959)에 오월국으로 들어가 연수의 문하에 수학하게 된 사실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종 외에 석초도 중국 천태 德韶의 法嗣인 龍冊曉榮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광종대 중기에 활동하였다.

 광종대 중기에 활동한 법안종 승려들은 교선일치보다는 오히려 성상융회적 사상경향을 띠고 있었으므로, 전제정치를 이념면에서 돕고 있던 균여의 사상과 배치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광종은 법안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또 지종은 법안종 승려로서가 아니라 선승으로서, 성상융회의 사상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광종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긍양의 法孫으로서 찬유와도 연결되었고, 그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승과에 합격하여 광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법안종이 크게 등장한 시기는 광종 19년(968) 이후이다. 광종 19년에 惠居가 국사에 봉해지고 그의 문도인 영준 등이 연수의 문하로 유학하였다. 그리고 광종 22년(971)에는 道峯院·高達院·曦陽院의 三不動門을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법안종의 기준에서 설정된 것이었다.061)道峯院은 法眼宗 사찰이다. 다만 高達院과 曦陽院은 성상융회적 사상경향으로 말미암아 광종 초에 왕실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선종의 입장에서 성상융회사상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법안종사상이다. 곧 그것은 ‘禪的 理事觀’으로 불리운다(金杜珍, 앞의 글, 1983, 31∼32쪽). 이 때의 법안종사상에서는 교선일치의 경향이 크게 강조되었다. 광종 10년(959)에 연수 문하로 유학한 지종이 광종 21년에 귀국하였다. 10년이 넘도록 중국에 체류한 그가 갑자기 귀국하게 된 것은 아마도 국내에서 교선일치의 사상 경향이 용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처음 중국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연수 문하에서 定慧論 등 교선일치의 사상체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종의 사상은 성상융회사상이 지배적인 광종대 중기의 고려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려웠으므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교선일치적 사상경향이 대두하면서 귀국하게 되었을 것이다. 광종 19년 이후 교선일치 체계의 법안종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점차 세력을 만회하여 가고 있던 호족세력과 유기적인 관련이 있었다. 이 때가 되면 호족세력은 비록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왕권에 제약을 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광종과 밀착된 인물들이 역사의 그늘에 숨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실력자, 즉 호족세력의 압력을 받아 하나 둘씩 처단되어 갔다.

나) 법안종사상

 광종대에 활동한 법안종 승려들의 비문은 서너 개가 현전한다. 광종대의 법안종사상은 이들 비문을 중심으로 하여 미약한 부분은 중국 법안종사상의 이해를 통해서 보강할 수 있다. 중국의 법안종은 靑原 行思선사의 법맥을 이은 雪峰 義存의 法孫인 文益에 의해 개창되어, 天台 德韶와 永明 延壽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확립되었다. 문익이나 덕소·연수 등은 모두 고려 초의 법안종 성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연수의 사상이 광종대 법안종을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국에서는 당대 초에 法相宗이 풍미하였는데, 그 뒤 화엄종이 등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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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法眼宗의 系譜
<표 2>法眼宗의 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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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 내부에서 화엄종과 법상종의 대립을 해소하려 했다. 法藏이나 澄觀의 사상은 각각「性相融會」나「性相決判」으로 특징 지워진다. 연수는 선승이지만 교계의 대립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종합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결실이≪萬善同歸集≫으로 엮어졌다.≪만선동귀집≫에서는 교와 선의 문제도 다루었지만, 그 주된 관심은「空」과「有」즉「性」과「相」의 융합에 비중이 두어졌다. 때문에 광종은≪만선동귀집≫을 읽고 거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연수의 또 하나의 저술인≪宗鏡錄≫에는 교선일치의 사상체계가 더 강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선종의 입장에서 천태나 화엄 및 법상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다. 연수는 교·선의 융합을 내세우지만, 그 중「敎」는 화엄사상과 법상종사상을 융합한 교계의 대립을 해소한 것이다. 곧 그는 선종의 입장에서 성상융회사상을 포용하려 했다.062)延壽는 敎宗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성상융회사상에 더 비중을 두어≪萬善同歸集≫을 저술하였다. 그러한 사상기반 위에 敎禪一致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것이≪宗鏡錄≫으로 종합되었다.

 지종은 연수의 문하로 나아갈 당시에 법안종의 성상융회적 성향에 매료되어 있었다. 또 지종보다 조금 시대가 앞서는 석초는 성상융회의 사상체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광종대 중기의 법안종에 대한 관심은 성상융회적 경향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안종사상에는 교선일치의 경향이 담겨 있고, 그것은 선종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면서 교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

 고려 초의 법안종 승려들도 처음엔 성상융회사상에 관심을 두었지만, 점차 시대가 내려오면서 교선일치의 사상체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영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종도 처음 출국할 당시에는 성상융회의 사상경향에 몰두해 있었지만, 연수 문하에서 수학하는 동안 점차로 교선일치의 사상체계에 심취하였다. 지종뿐 아니라 광종대 말에 활동한 법안종 승려들은 대체로 교선일치의 사상경향을 지녔다. 그들은 교종 내부의 융합 즉 성상융회사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으며, 교선일치의 사상경향을 가졌으나 어디까지나 선종의 입장에 서 있음을 명백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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