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4)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의 창립
  • (1) 당시의 동아시아 불교

(1) 당시의 동아시아 불교

 大覺國師 義天은 고려 불교사에서 뿐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불교사에서도 국제적 위치가 뚜렷이 부각된다. 그는 신라의 원효처럼 많은 저작을 남기지도 않았고 고려 후기의 뛰어난 선사들처럼 깊은 종교적 경지에 몰입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천이 불교관계 서적을 통해 송·요·일본과 교류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의천이 살았던 시기는 고려 초기부터 끊임없이 북방 변방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질곡에서 벗어나 평화정책을 쓰고 있던 고려 문종 이후가 된다. 이 시기의 고려는 서쪽에 송, 서북쪽에 요, 동북쪽으로 여진, 남쪽에는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인접해 있었다. 고려는 이 국가들과 정치·경제·문화에 걸친 교류를 통해 평화를 구가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외세에 의해 국력을 소모하지 않은 위정자들은 내치에 힘을 기울여 국가의 부흥과 건설을 이룩함으로써 문화의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115)李丙燾,≪韓國史―中世篇―≫(震檀學會, 1961), 208쪽. 고려는 송·요와 등거리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한족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외래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불교사에서 5호16국이라는 변방 이민족의 불교문화가 한족의 강남불교보다 반드시 열등하지 않았듯이 요의 불교활동도 남쪽의 송에 버금갔다. 의천은 불경과 원효의 저술을 요나라에 기증하고, 요나라의 불교관계 연구서들을 고려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대륙 북방에 버티고 있던 요의 역대 황제는 불교보호정책을 폈기 때문에 불교문화는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 요의 불교가 가장 극성한 때는 聖宗(983∼1030), 興宗(1031∼1054), 道宗(1055∼1100) 3대인데, 이 때가 요나라문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도종은 華嚴과 梵語(Sanskrit)에 통달한 왕이었다. 요에는 각지에 탑과 사원이 건립되고 제왕이 참석한 불교행사가 행하여졌으며 승려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다. 따라서 명예와 영달을 위해 승려가 되는 사람들이 급증해 갔다. 요나라는 契丹大藏經을 조조하였는데 모두 5,048권을 흥종 때에 완성하였다.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요나라 불교문화의 가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16)道端良秀,≪中國佛敎史≫(法藏館, 1965), 197∼199쪽.

 요의 불교는 많은 고승과 학자를 배출하였고,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밀교와 율이 성행하여 융합불교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요에서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알려주는 예로서 민간인 재속신자와 승려의 신행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결사성격의 千人邑會같은 것도 있었다.117)李龍範,<契丹佛敎와 千人邑會의 활동>(≪白性郁博士頌壽紀念論文集≫, 東國大, 1957), 751∼773쪽.

 한편 송은 唐末 五代에 걸친 혼란을 수습하고 後周의 무장이 세운 나라이다. 북방 요나라와 대치하였다가 여진족 금과 함께 요를 멸망시켰지만 결국 금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강남으로 옮겨가서 남송을 건립하고 원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전후 320여 년간 존속하였는데, 우리나라 고려 광종 11년(960)부터 인종 4년(1126)까지가 북송이고 그 후 충렬왕(1279)까지가 남송이다.

 불교가 외래사상으로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외래 변방민족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으나, 수·당 이래 한민족에 의하여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 말의 혼란을 틈타 다시 변방민족이 득세하면서 불교계도 많은 변혁을 초래하게 되었다. 당 말과 5대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거치면서 세워진 송의 불교는, 당나라 때 불교 여러 종파가 발전하였던 것과 달리 선종이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당 말엽의 會昌法難으로 많은 불교서적들이 사라지고 산속의 선종만이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종은 5대에 이르러 臨濟宗·潙仰宗·曹洞宗·雲門宗·法眼宗의 5家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그러나 송대에 위앙종은 일찍이 그 맥이 끊어지고 법안종의 法眼 文益(885∼958)은 남당에 초빙되어 淸凉寺에서 법문을 널리 펴면서 활약하였다. 한편 雲門 文偃(964∼949)은 南漢의 운문산에서 운문종을 열어 크게 선풍을 진작하였다. 5대 때에는 이 두 사람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문익의 제자인 天台 德韶(891∼972)와 그의 제자인 永明 延壽(904∼975)는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연수가 종풍은 드날렸으나 그 이후의 법안종은 별로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 후 선종의 이름으로 활약한 것은 운문과 임제(?∼867)의 두 계통뿐이었다. 임제종계통에서 다시 두 파가 갈리게 되므로 흔히 선종을「5家 7宗」이라 한다. 이 선종과 대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天台宗뿐이었다. 천태종도 당나라 때에는 쇠미하였다가 교세를 가다듬어 부흥하게 되는데 고려의 諦觀법사가 천태관계 경론을 가지고 吳越에 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화엄종도 교종이었으므로 교세가 쇠미하였는데, 의천이 많은 화엄관계 서적들을 가지고 가 당 말 이후 법난과 전란으로 산일되었던 경론이 갖추어짐으로써 화엄교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의천이 송나라에 간 때는, 5대의 오월 왕가의 불교보호정책으로 義寂에 의해 천태교적이 수집되어 천태종이 부흥된 후였다. 이 번영은 전술한대로 제관법사에 의해 천태교적이 중국에 역수출된 역사적 사실에 연유한다. 의적의 제자에는 고려 출신으로 제관 이외에도 義通, 智宗 등이 있었는데, 의통(927∼988) 문하에서 遵式(963∼1032)과 知禮(960∼1028)가 배출되었다. 의적의 동문에 志因이 있고 그 제자에 晤恩(?∼986)으로부터 源淸(?∼996), 智圓(976∼1022)의 차례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송대 천태종의 대표적 인물로서 천태종을 부흥시켰으나, 山家·山外 양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하였다. 흔히 의통과 지례의 일문을 산가파라 하고 지원의 일파를 산외파라 일컬었다. 산가파는 實相論, 산외파는 唯心論의 입장에서 대립·논쟁을 계속하면서 천태교학의 정밀함을 더하였다. 산외파는<大乘起信論>의 사상을 수용하였는데, 산가파의 지례계통이 번영하였으므로 이 계통이 정통이 되었다. 이 지례 문하로는 尙賢, 本如, 梵臻의 四明3家가 유명하고118)島地大等,≪天台敎學史≫(中山書房, 1976). 범진 문하에서 慈辯 從諫이 배출되었다. 의천이 송에 갔을 때 이 자변 종간에게 天台敎觀에 대하여 배우고 귀국했다. 의천은 천태종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산가파에서 교·관을 전수한 것이 된다.

 의천은 일본에서도 불교관계 서적을 구한 적이 있다. 당시의 일본은 最澄과 空海가 804년에 입당했다가 귀국하면서 법등을 전한 이후, 天台宗과 眞言宗이 각각 독자적인 종파로 공인받고 있었던 平安시대이다. 奈良시대 이후 6宗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 두 종파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번영하였다. 특히 일본의 천태종은 圓敎와 密·禪·戒의 네 기본요건을 지니고 발전하였다. 천태의 교관에다 밀교와 계(圓頓戒)를 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의천은 중국대륙과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관심의 시야를 넓혀 불교의 세계성을 지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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