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4) 대각국사 의천의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의 창립
  • (4) 불교개혁운동과 천태종 개창

가. 불교계의 개혁

 고려 불교계를 개혁한 의천시대에는 주로 조계·화엄·유가의 3대업이라는 종파가 있었다. 이 세 종파는 고려 초부터 존재하였는데,<僊鳳寺大覺國師碑>陰記에는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되었으므로 4대업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국사와 왕사가 소속했던 종파를 보면 조계종·화엄종·유가종으로 나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화엄종과 유가종을 교종이라 하고, 조계종을 선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 의천이 천태종을 개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시도한 의도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교종인 화엄종과 선종인 조계종에 관한 그의 인식을 통하여 개혁의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의천이 소속했던 화엄종을 살펴보기로 한다. 의천은 화엄종의 경전을 강의할 때 三觀과 五敎의 교·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37)崔柄憲,<天台宗의 成立>(≪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4), 89쪽. 그러나 고려 화엄가들에게는 교학만이 있고 觀門이 결여되어 있었다. 중국 화엄가의 초기 사상에서는 관문과 함께 종교적인 신이와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138)鎌田茂雄, 앞의 책, 59∼69쪽. 그런데 고려 화엄종에서 정통 화엄교학을 전수하였던 균여대사는 당시의 화엄종세력을 통합하여 광종대에 상당히 활약하였다. 그럼에도 균여를 포함한 이 시대 화엄가들은 의천의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균여의 화엄사상에 대하여는 아직 연구과제가 남아 있으나, 대체로 관문이 결여되어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의천은<새로 참여한 학도 緇秀에게 보임>139)≪國譯 大覺國師文集≫권 16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9), 126쪽.이라는 글에서 화엄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비록 대학자라도 “관문을 배우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실천이 중요하므로 법계관문 즉 ‘한마음에 법계를 관하는 법문’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의천이 이와 같이 관문에 역점을 두었던 사실은 고려 불교계의 사상적 배경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후술할 선종의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의천은 어머니 인예태후에게 ‘天台三觀은 최상의 眞乘’이라고 아뢴 적이 있는데,140)<僊鳳寺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과≪大覺國師文·外集≫권 13. 이는 천태종 개종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천태교관에서 3관에 관심이 모아졌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불교의 실천면에서의 관문이란 의천에게 주어진 당위적인 과제였다고 보겠다. 그리고 그가 편찬한≪교장총록≫에 균여의 저술뿐 아니라 고려 화엄학자의 저술을 전혀 수록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저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천이 균여를 폄하한 것이 詞腦歌(향가)로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천도 방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저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천이 고려 화엄종의 승려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 것은 그들의 사회적 활동을 바람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앞서 나왔던 글에서 “바른 도를 행하는 이가 적고 삿됨을 따라 배운다”라고 평하고 또 “편벽되고 삿된 주장이나 명성과 이익에 빠져 있다”라고141)≪國譯 大覺國師文集≫권 16, 140쪽.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데서 당시의 화엄가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균여는 많은 저작을 남긴 대표적 화엄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을 비호하는 측근세력으로서의 행적이 보인다.142)金杜珍,<均如華嚴思想의 역사적 의의>(앞의 책), 365쪽. 그는 보편적 진리인 불법을 탐구하는 불교학자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전제권력자의 왕권을 비호하였다. 그는 신이와 이적을 보임으로써 광종과 깊은 연관을 유지하였다고 추정된다. 신통과 신이는 화엄종 초조인 杜順의 행적에서도 나타난다고 앞서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회가 혼란하고 민중이 방향감각을 상실할 때 흔히 발생하는 종교현상의 부분인 것이다. 비록 균여 자신은 혼란한 사회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심의 발로로 쓴 방편이었다고 하더라도 보편적 진리인 正法의 불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면 의천의 안목으로는 邪道의 길로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지배자의 주변에서 맴도는 인물의 행적이라면, 세속적 명성에 현혹된 탐욕의 소산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의천이 고려 화엄가들에게 실망을 금치 못한 것은 이상과 같이 觀門이 결여되어 있는 화엄사상뿐 아니라, 세속적 명리 추구에 쫓기어 종교의 보편적 진리를 객관적 안목으로 이해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의천은 다시 선종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禪이란 인도불교 이래 戒·定·慧인 3學의 하나로서 어떤 불교에서도 중요시하는 기본요건이다. 그러므로 선은 인도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많은 승려들이 실천 수행하였다. 신라의 원효도 그의 저술에서 선과 止觀에 대해 해설하고 또 스스로 이를 실천하였다.143)李永子,<元曉の止觀>(≪佛敎の實踐原理≫, 山喜房佛書林, 1977), 429쪽. 그러나 나말려초에 들어온 선종은, 인도불교 이래의 정통선이 아니고, 8세기 이래 중국에서 새롭게 토착화되어 발전한 중국 특유의 가풍을 가진 것이다. 이른바 ‘마음에서 마음을 전한다’는 의미로서 ‘문자에 의하지 않으며 가르침밖에 따로 전한다’는 교판에 의해 전개된 중국 독자적인 祖師禪을 말한다. 의천 당시의 선풍은 비록 法眼宗風을 익힌 고려 선승들이 귀국하였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문자를 거부·배척하는 조사선풍이 풍미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의천은 당시의 선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선가에서는 통발이나 덫(경론의 비유)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가장 높은 근기의 지혜있는 이에게 맞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장 낮은 근기의 사람이 (남이) 말하는 것을 귀로 듣고 배워 가지고 한 법을 증득했다고 하며 (스스로 만족하고서) 경론을 가리켜 ‘풀로 만든 개(무가치한 것)요 깻묵지게미(보잘 것 없는 것)’라고 한다. 이는 잘못이 아니겠느냐(≪大覺國師文集≫外集 권 12, 靈通寺碑文).

 의천 당시에도 이상과 같이 스스로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경론을 무용지물처럼 생각하는 선승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의천은 단순히 특정 종파의식을 가지고 자기 종파를 비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교계에서 경전을 무시하는 실상을 직시하고 부처님의 정법을 실현하는 방법상의 오류를 시정하려는 개혁의지를 뚜렷이 보였다. 이 개혁의지는≪교장총록≫을 편찬할 때, 禪 관계의 모든 전적을 제외한 데서 뚜렷이 부각된다. 의천은 화엄종의 淸凉 澄觀을 존경하였는데, 심지어 그의 제자인 宗密의 선서마저 제외한 데서 당시의 선종을 얼마나 폄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의천은 교에 의해 실천하는 정통 선과 중국적 조사선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옛날 선이란 敎에 의거하여 선을 익히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선은 교를 떠나 선을 말한다.「선을 말함」은 그 명목에 집착하여 그 내실을 잃는 것이다(<釋門正統>8,≪日本卍續藏經≫제2편 130책).

 이것은 宋의 飛山 戒珠(1063∼1077)가 지은≪別傳心法議≫를 간행하면서 붙인 발문의 내용인데, 여기에서 그는 거짓됨의 폐단을 없애고 옛 성인의 순수한 도로 귀착해야 함을 강조한다. ‘敎 밖에서 달리 전한다’는 종지에 대한 부정적 의식은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에까지 미치고 있다. 즉 요의 道宗이 경론을 새로 선정하여≪續開元釋敎錄≫3권을 詮曉 등에게 편수토록 조서를 내리면서, 그 때 요에 유행하던 선종의≪六祖壇經≫과≪寶林傳≫을 모두 불태워버린 일이 있었는데, 의천은 이 일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144)<釋門正統>8(≪日本卍續藏經≫제2편 130책).
朴鍾鴻,≪韓國思想史≫(瑞文堂, 1972), 150쪽.
≪육조단경≫은 南宗禪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고,≪보림전≫은 선종계열의 祖師의 인연담을 싣고 있으며 선종 28조의 전등계보를 수록한 것으로서 선종으로서는 중요한 저서이다.

 요는 불교국가였고 도종은 화엄교학을 연학하던 학자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교는 중국 북지에서 유행하던 종밀의 선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밀이「화엄과 선의 융합」을 주장하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러므로 도종은≪보림전≫을 불태우면서 종밀의≪禪源諸詮集都序≫를 인쇄하여 반포한 것이다.145)神尾■春,≪契丹佛敎文化史考≫(滿州文化協會, 1937), 111쪽. 도종과 의천은 조사선을 이단시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종밀의 화엄적인 선교일치사상에 대하여 반드시 견해가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의천은 화엄교학과 선이 모두 불교의 분파이긴 하지만 그 일방성에 객관성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천이 3대 종파의 하나인 법상종계의 瑜伽唯識學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리적으로 五性各別設을 주장하였으므로 사상적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의천은 화엄교학과 그 대승적 교학이 일치하면서 관문의 체계가 완벽한 천태교학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의천은 교종인 화엄종과 선종인 조계종 모두에서 발견되는 선·교 어느 한 쪽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교·선의 통합을 지향했다. 그것은 의천이 불교란 교외적인 이론체계를 가진 철학임과 동시에 실천을 필수로 하는 종교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圓覺經을 강의할 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리인 법은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말과 형상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말과 형상을 떠나면 미혹에 빠지고 말과 형상에 집착하면 진실을 미혹케 된다. …교리를 배우는 이는 내적 (마음을) 버리고 외적인 것을 구하는 일이 많고, 참선하는 사람은 밖의 인연을 잊고 내적으로 밝히기를 좋아한다. 이는 다 편벽된 집착이고 양극단에 치우친 것이다(<講圓覺經發序>,≪大覺國師文集≫권 3).

 이것은 宗密(780∼841)의 초기 저술인≪圓覺經略疏≫에 의거해 강의하며 교와 선의 상호보완성을 주장하며 쓴 것이다. 종밀은 화엄종 第4祖 澄觀(738∼839)의 사상을 계승하였으나 선의 입장과 화엄을 받아들인 점이 징관과는 상이하다. 징관은 화엄의 입장에서 선을 융섭하고 있는데 비해 종밀은 교가 곧 선이라고 보았다. 종밀은≪선원제전집도서≫에서 선을 4종으로 분류하였으나, 한편 天台止觀인 三止三觀을 비판하였다.146)鎌田茂雄, 앞의 책, 586쪽. 의천이 종밀의 후기작인 이≪都序≫를≪교장총록≫에 수록하지 않고 오히려 천태지관의 저술을 많이 넣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 많다고 하겠다.

 종밀의 사승인 징관은 일찍이 삼론·천태·화엄·선·율에 능통하여 이를 화엄교학에 의해 통합하려고 한 종합불교의 수립자이다. 그는 특히 천태학을 湛然에게 배웠다. 그래서 “天台와 賢首五敎는 크게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의천이 청량의 화엄적인 종합불교를 지향했다고 보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의천이 처했던 고려 불교계와 징관이 처했던 당의 후기 불교계가 같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천은 고려 선종계의 모순과 화엄종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화엄의「法界三觀」사상의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화엄의 실천론은 천태지관사상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法藏은≪起信論義記≫에서 천태지관을 추천하였고, 또≪般若心經略疏≫에서도 천태지관에 의해 해석하고 있다. 징관도≪法界玄鏡≫상권에서 천태삼관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147)鎌田茂雄, 위의 책, 60쪽. 의천의 선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법안종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비판은 다시 진일보하여 天台宗 개창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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