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1. 불교사상의 전개
  • 5) 승관조직과 승과제도
  • (1) 승관조직

(1) 승관조직

 우리나라 승관의 역사는 삼국시대 신라에서부터 찾아진다. 즉 진흥왕 11년(550)에 安藏法師를 大書省으로 삼고 그 이듬해에는 고구려에서 귀화해 온 惠亮法師를 國統(寺主)으로 삼았다는 것162)≪三國遺事≫권 4, 義解 5, 慈藏定律條 分註.
≪三國史記≫에는 권 40, 雜志 9, 職官(下) 武官條 끝부분에 승관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원성왕 원년에 처음 승관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등이 승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교단 통제기구로서의 신라 승관조직의 구체적인 형태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주요 승관직으로 대서성·국통 외에도 大國統·都唯那娘·大都唯那·州統·郡統 등이 있었으며, 대체로 신라의 승정 초기에는 중국 남북조시대 각국의 것이 혼합되고 뒤에는 수·당제를 모방했을 것으로 인정된다.163)李弘稙,<新羅僧官制와 佛敎政策의 諸問題>(≪白性郁博士頌壽紀念佛敎論文集≫, 1957), 668쪽.

 이처럼 신라 진흥왕대부터 승관조직이 있어 왔다면, 고려시대의 그것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체계적인 조직과 임무 및 기능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정비된 모습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승관조직 또한 제대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중앙 승관조직인 僧錄司에 관한 약간의 내용이 몇몇 자료에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지방 승관에 관해서는 “式目都監에서 黃州 등 10州郡의 僧官印을 거둘 것을 주청하였다”164)≪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원년 10월.는 유일한 기사를 통해 그 존재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승록사는 고려 불교계와 가장 관계가 깊은 중앙의 관부였음에도≪고려사≫백관지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전시과나 녹봉에 대한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서·비문·문집 등에 단편적으로 수록되어 있는 기사들에 의존하여 중앙 승관조직으로서의 승록사의 성립과 직제·기능 등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승록사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태조 21년(938) 3월의 일로 나타난다. 즉≪고려사≫에 “西天竺의 승려인 弘梵大師(㗌哩嚩日羅)가 왔을 때 왕이 兩街를 크게 갖추고 法駕로써 그를 맞이하였다”16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1년 3월.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 기록은 외국의 승려를 맞이하는 왕의 거둥에 승록사가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는 승록사제도가 승과제도에 앞서 태조 때부터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과, 그 조직의 편제가 양가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아울러 짐작케 해주고 있다.

 양가는 곧 左右兩街임을 승록사 관계 기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종대 蔡忠順이 찬한<玄化寺碑陰記>도 그런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음기에서는 현화사에 般若經寶를 설치하고 널리 경전을 간행할 때 공이 많았던 사람에게 각각 시상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官使左街都僧錄大師 光肅, 副使左街副僧錄 釋眞, 右街副僧錄 彦寶, 判官右街僧正 成甫, 其僧記事 2인, 俗記事 5인 등이 언급되어 있다.166)蔡忠順,<高麗國靈鷲山大慈恩玄化寺碑陰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50쪽. 즉 좌우 양가로 구성되어 있는 승록사의 조직과 함께 양가에 각기 도승록·부승록·승정과 같은 직제가 있었고, 다시 그 밑에 약간명씩의 僧·俗 記事를 두었던 것이다.

 좌우 양가로 구성된 승록사의 정확한 성립 연대를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우선 통일신라시대 승관제에서는 그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승록사는 고려 태조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기는 개국 초 무렵부터였을 가능성이 높다. 태조가 창업할 때에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다수의 승려들이 직·간접으로 협찬했던 사실이나, 훈요10조 등에 보이는 태조의 信佛 및 불교정책 방향167)洪庭植,<高麗佛敎思想의 護國的 展開>(I)(≪佛敎學報≫14, 1977), 14∼17쪽.등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양가 승록사제도가 중국 당·송의 승관제도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고려의 승록사는 그런 당·송 승관제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168)安啓賢,<高麗僧官考>(≪東國史學≫5, 1957), 99쪽. 이는 당에 유학하고 돌아와 태조의 창업에 협찬했던 승려들의 권유에 따라 승관제도를 실시하면서 그 조직 편제를 본땄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신라 후기 승관제가 수·당제를 모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양가 승록사제도 역시 당·송대의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비록 제도 자체는 모방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고려적인 독자성 또한 분명히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신라의 승관으로서 수·당제에서는 볼 수 없는 都唯那娘이169)李弘稙, 앞의 글, 665쪽. 있었던 것처럼, 고려의 승록사에서 당·송 승관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승직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로서 僧維를 들 수 있다. 즉<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의하면 광종 7년(956)의 일로서 左僧維 大德 淡猷·右僧維 大德 宗乂가 왕사의 喪事를 맡아 처리하고 있다.170)李夢游,<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朝鮮金石總覽≫上), 205쪽. 이 좌승유와 우승유는 곧 좌가승유·우가승유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승유라는 승관명은 당·송의 승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승유라는 직명은 고려에서 처음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171)安啓賢, 앞의 글에서는, 僧維를 維那의 약칭으로 보고 이것이 신라 때의 중앙 승관에 이미 나타나 있음을 들어, “고려의 兩街僧錄制度는 唐宋의 僧錄司제도와 新羅의 中央僧官제도를 適宜 절충하여 놓은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다.

 승유를 포함하여 양가 승록사의 승직 단계 또한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여기저기 보이는 자료를 종합하여 그 대체적인 모습은 짐작해 볼 수 있다. 승록사의 조직체계로서 승직의 단계는 앞의<玄化寺碑陰記>에 보이는 도승록·부승록·승정 외에 승록이라는 직계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즉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① 右街僧錄 惠英(<七長寺慧炤國師塔碑>,≪朝鮮金石總覽≫上, 277쪽).

② 左街僧錄 崇演(<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위의 책, 289쪽).

③ 左街僧錄 道元(≪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21년 정월).

④ 右街僧錄 繼通(<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301쪽).

 이 가운데 혜영은 문종 7년(1053)에 부승록이었다가 이듬해인 문종 8년에 우가승록이 된 경우이며, 문종 8년에 좌가승정이던 도원은 13년 후인 문종 21년(1667)에 좌가승록으로 승진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승록이 부승록의 상위직임에는 분명한데, 여기서 다시 검토해야 할 문제는 이 승록과 도승록과의 관계이다. 우선 이들이 동일한 직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승정이나 부승록을 일컬을 때 그냥 승록이라 한 경우가 없다는 점과 위에 열거한 승록 기록의 예 등에 비추어 승록은 곧 도승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172)安啓賢, 위의 글, 97쪽.
李載昌,<高麗佛敎의 僧料·僧錄司制度>(≪朴吉眞博士華甲紀念韓國佛敎思想史≫, 圖光大出版部, 1975), 440쪽.
그것을 각기 다른 직급으로 보려는 견해가173)許興植,≪高麗佛敎史硏究≫(一潮閣, 1986), 346쪽.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후자가 더 타당할 듯하다. 무엇보다도 도승록과 부승록 사이에는 한 단계가 더 있는 편이 자연스러우며, 도승록을 굳이 승록이라고만 기록해야 할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록사의 조직은 좌우 양가에 각각 위로부터 都僧緣·僧錄·副僧錄·僧正의 순서로 직위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다음의 사례들은 다시 양가도승록 혹은 양가도승통이라는 직위가 더 있었음을 보여준다. 먼저 양가도승록의 예로서는 예종 6년(1111)에 鄭晃先이 찬술한<金山寺慧德王師碑>음기의 隨職階加者 명단에 兩街都僧錄 光國이 보이며,174)鄭晃先,<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韓國金石全文≫中世 上, 亞細亞文化社, 1984), 549쪽.<億政寺大智國師智鑑圓明塔碑>에는 공민왕 8년(1359)에 왕이 普愚의 제자 粲英을 兩街都僧錄으로 삼았다175)朴宜中,<億政寺大智國師智鑑圓明塔碑>(≪朝鮮金石總覽≫下), 715쪽.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지국사비는 조선 태조 2년(1393)에 세워진 것인데, 당시 建碑 감독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보이는 대사 尙柔의 직명 또한 양가도승록으로 되어 있다.176)朴宜中, 위의 글, 719쪽. 이로써 양가도승록의 명칭은 일찍이 예종대에서부터 조선 초에까지 걸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가도승통은 현종 17년(1026)에 崔忠이 지은<弘慶寺碣>중에, 사원개창의 詔命을 받고 이를 수행했던 대사 逈兢의 직명이 左右兩街都僧統이라 한 데서 처음 발견된다. 그러나 이후 양가도승통의 직명은 시기적으로 무려 2백여 년이 지난 고려 후기에 가서야 다시 보인다. 즉<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에 慈恩宗의 彌授가 국존에 책봉되기 이전인 충선왕 5년(1313)에 양가도승통이 되었으며, 이듬해 충숙왕 원년 봄에는 왕으로부터 새로 만든 양가도승통의 관인을 받고 있는 것이다.177)李叔琪,<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朝鮮金石總覽≫上), 488쪽.

 이 외에 약간 다른 예로서 兩街僧摠,178)李夢遊,<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朝鮮金石總覽≫上), 203쪽.
金廷彦,<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朝鮮金石總覽≫上), 213쪽.
兩街都摠攝,179)李齊賢,<贈諡文正權公墓誌>(≪益齋亂藁≫권 7). 禪敎都摠攝180)<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531쪽.
李 穡,<檜巖寺禪覺王師碑>(≪朝鮮金石總覽≫上), 499쪽.
등도 보이지만, 어떻든 좌우양가도승록 흑은 양가도승통은 그 직명이 말해 주듯 승록사의 양가를 통할하는 최고의 승직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로써 승록사 조직체계의 대강이 드러난 셈이지만, 고려 승관조직에서만 볼 수 있는 승유의 존재와 양가승총 및 양가도총섭 등의 위치는 아직 불분명하다. 이 문제는 승록사 구성직의 명칭 변화를 시기별로 추적해 봄으로써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승관명의 시기별 조사에 의하면 승록사 구성직의 명칭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크게 세 차례에 걸쳐 변화하였다.

 그 첫째 시기는 900년대로 승총과 승유의 시기이고, 둘째는 11세기부터 12세기의 전형화된 시기로 승록과 승정이 위주이며, 셋째는 주로 14세기부터 도승통이나 도총섭으로 명칭이 바뀌고 있다. 이는 정치사에서 제도의 형성기, 확립·안정기, 그리고 변화기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과도 상통한다.181)許興植, 앞의 책, 343쪽. 즉 승총과 좌승유·우승유가 보이는 초기는 제도의 형성시기로서, 이 때는 승총을 최고 책임자로 하며 좌우 양가에 각각 승유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럴 경우 승총과 승유 사이 혹은 승유 아래에 보다 세분화된 직책이 존재했다고 본다. 그것이 제2기에서의 직책과 대체로 동일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제도의 확립·안정기에 해당하는 둘째 시기는 양가도승록 혹은 양가도승통을 최상직으로 하는 승록·승정의 순서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양가도승록과 양가도승통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가 자세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멀리는 현종 17년(1026)에서부터 가깝게는 조선 태조 2년(1393)까지 이 시기 중에 양가도승통과 양가도승록이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양 직명이 혼용되었을 수도 있다.

 셋째 시기의 양가도총섭은≪益齋亂藁≫권 7에서만 발견되며, 禪敎都摠攝은 고려 말 승려들의 비문에서 비교적 자주 눈에 띈다. 양가도총섭의 경우 역시 자세하지 않지만 선교도총섭은 승록사의 직명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億政寺大智國師碑>의 비문을 쓴 旋車爾의 직명이 ‘前內願堂判曹溪宗師禪敎都摠攝…大禪師判僧錄司事’182)朴宜中, 앞의 글, 717쪽.인데, 이 하나의 사례에서만도 선교 도총섭이 승록사와는 별개의 직책임을 알 수 있다. 물론 判僧錄司事라는 또 새로운 직책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한 사람이 선교도총섭으로서 판승록사사를 겸하고 있음은 이들 두 직책이 서로 다른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승록사는 모든 시기에 걸쳐 좌우 양가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직명은 시기별로 약간씩 변화되어 왔다. 따라서 11∼12세기의 승록·승정 위주의 전형화된 형태를 중심으로 그 순서를 다시 설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左右兩街都僧錄

  └左街:都僧錄─僧錄─副僧錄─僧正

  └右街:都僧錄─僧錄─副僧錄─僧正

 이같은 조직을 갖춘 승록사의 기능에 관해서는 임원들의 활동을 통해 그 대강이 파악된다. 승록사의 직명을 살피는 과정에서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었지만 승록사 임원들은 주로 국가의 불교관련 행사 주선과 왕명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맞아들이는 데 동참한 것을 비롯하여, 왕사·국사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광종대 이후에는 이에 관한 일들도 주요 임무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승록사에서 왕사·국사의 책봉서를 전하거나 하산을 배행하고, 그들이 입적한 뒤에는 喪事와 建碑의 임무를 맡아 처리하는 예가 잦았던 것이다. 또 세속의 학자들과 함께 藏經都監의 구성원이 되어 印經 업무를 담당한 사례도 보이며, 사원 개창에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록사의 활동이 불교행사 주선 및 왕명의 수행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興王寺에 상주시킬 계행이 높은 승려 1천 명을 선발할 때 이 업무를 주관했던 경우나183)≪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21년 정월. 특히 중앙과 지방 각 사원의 승적을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했던184)李藏用, <若滕爲兩街都僧錄官誥>에는 若滕을 兩街都僧錄으로 임명하는 官誥의 서두에서 “緇籍掌領 無曠苾蒭之職”이라 하였는데, 이는 곧 승록사에 전국의 僧籍을 관장하는 임무가 있었음을 유추케 한다(≪東文選≫권 27). 것으로 보아, 승록사에 행정적 기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승록사는 불교교단과 국가의 행정적 협력기구로서 국가의 불교행사 주선 및 불교정책 수행에 대한 보조역할을 담당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보겠다.

 한편 광종대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보이는 왕사·국사도 넓은 의미에서는 고려의 승관조직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만일 그렇다면, 승록사의 기능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그 순서는 당연히 좌·우양가도승록 혹은 도승통 위에 왕사→국사의 순서로 배열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왕사라는 것은 한 임금이 본받는 것이요 국사라는 것은 한 나라가 의지하는 것”이라고 한 李奎報의 글185)李奎報,<故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敎書>(≪東文選≫권 27).에도 엿보이듯이 국사는 왕사보다 우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왕사도 마찬가지였지만, 국사는 학덕과 도력이 높은 고승을 국가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극진히 예우하고 존호를 더 하였다. 국사는 고려 전기에는 상징적인 기능 외에 뚜렷한 역할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원의 간섭기에는 승정을 장악하는 등 매우 실질적인 기능을 가졌으며, 그 명칭도 國統 또는 國尊으로 변하고 있음이 주목된다.186)國統 혹은 國尊으로서의 명칭 변화는 元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를 지배하는 원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國師 외에 고려의 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며,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국사의 명칭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미 충렬왕 때 왕사였다가 충숙왕 즉위년(1313)에 국통에 오른 無畏 正午나 역시 충숙왕 때의 慈淨國尊 彌授가 불교 모든 종파의 주지를 파견하는 등 승정을 전관하고 있음은187)朴全之,<靈鳳山龍巖寺重創記>(≪東文選≫권 68).
李叔琪, 앞의 글, 488쪽.
그 좋은 예이다. 이들 중 무외국통도 그러하지만 특히 미수의 경우 그의 승정 장악은 정확하게는 국존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양가도승통으로서 또는 독립 관부로 세워진 懺悔府를 주관하는 內殿懺悔師의 자격에 의한 것이었다. 미수는 양가도승통(1313)·내전참회사(1315)를 거쳐 충숙왕 11년(1324)에 국존으로 책봉되는데, 그에게 모든 승정이 맡겨지는 것은 미수가 내전참회사가 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같은 특수한 상황은 원 간섭기의 정치적 혼란과 맞물린 승정의 일시적 변화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국통이나 국존이 승록사 제도와 직접 연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고려시대의 주된 승관조직인 승록사는 조선 세종조 초기까지도 존속하였다. 그러나 억불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그 폐지 건의가 잇따랐고, 결국 세종 6년(1424) 4월 예조에서 제시한 禪·敎 양종으로의 종파 폐합 등 불교정비 방안의 일환으로 그것이 혁파되기에 이른다. 즉 서울의 興天寺를 禪宗都會所로, 興德寺를 敎宗都會所로 삼고, 行首를 뽑아 승정을 살피게 하는 동시에 승록사 소속의 노비를 양종도회소와 동·서부학당에 옮겨 소속시키고 있다.188)≪世宗實錄≫권 24, 세종 6년 4월 경술·정사. 이같은 조치에 뒤이어 승록사는 자연히 폐지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승록사는 고려 불교제도의 성립과 더불어 확립 발전하였고 조선 초의 억불정책과 함께 폐지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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