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2. 대장경의 조판
  • 1) 초조대장경의 조판
  • (1) 조판의 동기 및 착수시기

(1) 조판의 동기 및 착수시기

 신라시대에 싹튼 목판인쇄술은, 고려시대에 불교가 나라의 종교로 격상되어 사찰이 도처에 늘어나고 국민의 신앙심이 날로 높아지자 사찰판 불서의 간행을 자못 성행케 하였다. 그 중 목종 10년(1007) 개경의 摠持寺에서 간행한≪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약칭서명:보협인다라니경)이 오늘날 2종 전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앞서 개판된 중국의 吳越板에 비해 雕板術에 있어서 월등히 우아하며 정교하다.

 고려 초기의 목판인쇄술은 불교 흥륭정책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때마침 북송에서 동양 최초로 새긴 開寶勅版의「印成大藏經」이 고려에 도입되었다. 이 개보칙판 대장경은 송나라 태조가 開寶 4년(971, 광종 22) 高品 張從信 등을 蜀의 益州에 보내 판각을 착수케 하여 12년 걸려 太平興國 8년(983, 성종 2)에 완성을 본 것이다.210)志 磐,≪佛祖統紀≫권 43, 開寶 4년·太平興國 8년.≪高麗史≫에 의하면 성종 10년(991)에 그 대장경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중국측 사료인≪文獻通考≫에는 그보다 2년 앞 8년(989)에 고려승 如可가 와서「釋氏大藏經」을 청하므로 내려주었다고 하선 성종였고,211)馬端臨,≪文獻通考≫권 325, 四裔 高麗.≪宋史≫고려전에도 그와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212)≪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端拱 2년. 그러나 그것이 印成인지 筆寫인지의 구분 표시가 없어「인성대장경」의 전래 여부는 알 수 없다. 또한 우리측 사료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양쪽의 정사에 다 같이 나타나는 것은 성종 10년의 도입이다.≪송사≫고려전을 보면 淳化 2년(991) 고려 사신 韓彦恭이 와서 조공하고 성종의 뜻을 진술하며「印成佛經」을 요청하므로 대장경과 함께≪御製秘藏詮≫·≪逍遙詠≫·≪蓮華心輪≫을 주었다고 한다.213)≪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淳化 2년. 그리고≪고려사≫열전에서도 한언공이 대장경의 사급을 주청하여 481함 2,500권과≪어제비장전≫·≪소요영≫·≪연화심륜≫을 송에서 얻어 돌아오니,214)≪高麗史≫권 93, 列傳 6, 韓彦恭. 임금이 이를 내전으로 맞아들여 스님을 모아 독경하였다고 한다.215)≪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0년 4월.

 동양에서 최초로 판각하여 인쇄한 개보판 대장경의 전래는, 불교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고려에서의 대장경 조판을 자극하였다. 또한 거란의 고려침입은 대장경 조판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종 12년(993)에 고려는 서북변에 쳐들어 온 蕭遜寧의 대군을 물리쳤지만, 거란은 이에 그치지 않고 현종 원년(1010) 11월에 재차 40만 대군을 일으켰고 이듬해 정월에는 개경을 침략해 대묘·궁궐·민옥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216)≪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정월. 전례없는 국란에 직면한 고려가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李奎報가 지은<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장경을 간행하여 佛力으로 외침을 물리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이를 거국적 발원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사정을 전하는<대장각판군신기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적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임금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입해 오자 임금은 남쪽으로 피란하였는데, 거란 군사는 오히려 松岳城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크게 발원하여 대장경 판본의 판각을 맹서하자 거란군사들이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 대장경은 매한가지이고, 전후에 새겨낸 것도 같으며, 군신들이 함께 발원한 것도 또한 동일하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나고 이번의 달단(몽고군)은 그러하지 않겠는가. 오직 여러 부처와 天人들이 얼마나 보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李奎報,<大藏刻板君臣祈告文>,≪東國李相國集≫권 25).

 위의 내용을 보면 초조대장경 판각의 동기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초조대장경 조판은 북송의 개보칙판 대장경이 도입됨에 따른 문화적 자극과 현종 2년 거란군이 침입하자 그 판각에 의한 佛力의 가호로 외침을 물리쳐야겠다는 대발원으로 승화작용하여 착수되었다고 여겨진다. 당시의 사정을 소개한<대장각판군신기고문>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앞선 기록이고, 이민족 외침의 긴박상이 너무나도 비슷한 몽고군의 내침전란에서 대장경 간행의 교훈을 그대로 본받아 적용했던 사정 등을 아울러 고려하면, 위에서 언급한 초조대장경 조판의 동기와 착수시기는 넉넉히 납득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초조대장경 조판의 동기를 현종이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불경을 간행한 것과217)≪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9년 6월. 결부시켜 언급한 연구가 있다.218)池內宏,<高麗朝の大藏經>上 (≪東洋學報≫13-3, 1923), 18∼20쪽.<玄化寺碑>陰記에 의하면 현종은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친히 조곡 2천여 석을 시주하는 한편, 여러 신하와 양반들에게서도 시주를 받아 현화사를 짓고 새로 종을 주성하여 몸소 이를 친 것은 물론 신료들에게도 치게 하였고 또 각기 衣物과 匹段을 희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工人들에게 특별히 명하여≪大般若經≫600권,≪三本華嚴經≫·≪金光明經≫·≪法華經≫등을 판각하고「般若經寶」를 설치하여 사방에 찍어 펴내게 하였다.219)蔡忠順,<玄化寺碑陰記>(≪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249쪽. 현화사의 창건작업이 현종 9년(1018) 6월에 시작되어 동왕 13년에 비석이 세워짐으로써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들 불경의 판각은 그 후기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의 불경 간행을 초조대장경 조판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은, 그 판각의 동기로 보아 과연 그러할까 의심스럽다. 이와 같이 초조대장경 조판의 동기를 한낱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고 풀이하고, 그 조판의 착수시기를 현화사의 낙성 무렵으로 주장하는 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난을 타개하려고 거국적으로 발원 착수하여 이룩한 國刊 초조대장경을 임금이 사사로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사하고 간행한 사찰판으로 여기는 견해라든지, 오늘에 전래되고 있는 고려시대 간행의 불경이 입증해 주듯이 국간의 초조 및 재조 대장경만이 한 줄에 14자 배자의 대형 판본이고, 사찰 간행의 불경은 한 줄에 17자 또는 그 이상의 글자가 배자된 중형 판본들인데,220)초조 및 재조 대장경 중, 다만 재조의≪三本華嚴經≫만이 14자의 초조본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17자의 사찰본을 바탕으로 간행되었을 뿐이다. 그 밖에는 모두 한 줄에 14자인 점에서 17자 또는 그 이상의 글자가 배자된 사찰판본과 곧 식별된다. 그리고 위의 재조<삼본화엄경>이라 하더라도 ■次 표시의 유무 여하에 따라 사찰판본과의 식별이 또한 용이하다. 이를 혼돈하는 견해를 아울러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초조대장경의 조판을 국왕의 사적인 문제와 관련시켜 보는 견해는 전래본에 대한 실증적 분석없이 오직 문헌 기록만을 가지고 우리 문화를 낮추어보던 식민지시대의 사관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을 아직도 받아들여 초조대장경의 조판이 현화사에서 그 절 창건의 총책임자인 崔士威에 의해 추진되었고,221)朴泳洙,<高麗大藏經板의 硏究>(≪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243쪽.≪초조대장경목록≫또한 그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간주하는 견해가 없지 않다.222)鄭駜謨,<高麗初雕大藏經目錄의 復元>(≪書誌學硏究≫2, 1987), 3∼108쪽. 다 아는 바와 같이≪초조대장경목록≫은≪開元釋敎錄≫에 근거한 북송 개보칙판 대장경의 체제를 그대로 따른 것이고, 거기에 최사위 이후에 수입된 경전을 판각되는 대로 분류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편입시킨 간행목록임을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문종 17년(1063)에 들어온 거란대장경은 북송 개보칙판에 없는 것과 누락된 것, 착사가 심한 것, 이역인 것 따위를 가려 새겨 새로 편입시키거나 교체 편입시킨 것이다. 그리고 문종 37년에 들어온 宋朝大藏經은 송대에 새로 번역된 경론을 비롯한≪貞元續開元釋敎錄≫·≪貞元新定釋敎錄≫·≪續貞元釋敎錄≫수록의 경론을 간행되는 대로 편입시킨 목록이다. 따라서≪초조대장경목록≫이 최사위의 편찬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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