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2. 대장경의 조판
  • 2) 속장의 조판
  • (2) 장소 수집 및 조판 경위

(2) 장소 수집 및 조판 경위

 의천은 세번째로 올린 주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선종 2년(1085) 4월 7일 밤 임금과 모후에게 서장을 남기고 제자 壽介 등을 대동, 미복으로 貞州로263)貞州는 昇天府의 古址이며, 지금의 京畿道 開豊(豊德) 근처의 海岸이다. 나아가 송나라 상인 林寧의 선편에 의탁하여 출국했다.264)≪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2년 하 4월 경오.
≪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覺國師 煦.
金富軾,<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307쪽.
林 存,<仁同僊鳳寺大覺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330쪽.
그가 5월 2일 송나라 板橋鎭에 도착하여 입국한 까닭을 송나라 철종에게 표를 올려 알리니, 철종은 안내원 蘇注(廷)를 보내어265)義 天,<謝差引伴表>(≪大覺國師文集≫권 5). 도읍인 汴京의 啓聖寺에 머물게 하였다. 垂拱殿에서 며칠간 빈객의 예우,266)義 天,<謝朝見日賜物表>·<謝効迎表>·<謝撫問表>(≪大覺國師文集≫권 5). 특히 황태후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267)義 天,≪大覺國師文集≫권 5·6의 各種 謝皇太后同前表. 이어 별원에서 화엄법사 有誠과 賢首·天台의 교리 판석 및 兩宗의 깊은 뜻을 두루 토론하였다.268)金富軾, 앞의 글, 307∼308쪽.
林 存, 앞의 글, 330∼331쪽.
또한 相國寺를 방문하여 雲門宗 圓炤禪師 宗本에게 법을 묻기도 하고, 興國寺에 가서 西天三藏 天吉祥에게 인도의 사정을 자세하게 듣기도 하였다.269)林 存, 위의 글, 331쪽.

 한 달여를 京師에서 보내다가 杭州의 淨源법사에 가서 수업할 것을 표로 올려270)義 天,<乞就杭州源闍梨處學法表>(≪大覺國師文集≫, 권 5).
―――,<謝依允所請表>(위의 책, 권 6).
허락을 받았다. 안내원 楊傑의 인도를 받으며 떠났는데, 도중에 金山을 지날 때는 佛印선사 了元을 방문하여271)林 存, 앞의 글, 331쪽. 章疏를 탐색하기도 했다. 항주에 이르러 화엄좌주인 정원법사를 大中祥符寺에서 처음으로 뵙고 수강한 데272)金富軾, 앞의 글, 307쪽. 이어 항주지사 蒲宗孟의 요청으로 南山 慧因院에서 周譯 華嚴經(實叉難陀 역 80권본)을 강의하였다.273)위와 같음. 의천은 은화를 희사하여 經論·疏鈔 7천여 권을 찍어 절에 비치하게 하고274)≪西湖志≫권 10, 寺觀 1, 惠因講寺.
金富軾, 앞의 글, 307쪽.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물론 한 벌씩을 수집해 왔을 것이다. 그 후 의천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고승들과 담론하였다.275)朴 浩,<高麗國大聖日興王寺故國師詔諡大覺大和尙墓誌銘>(≪韓國金石全文≫中世 上, 亞細亞文化社, 1984), 531∼533쪽.
金富軾, 앞의 글, 308쪽.
특히 그 중 慈辯대사 從諫과는 천태의 교리, 靈芝寺의 元炤율사와는 율학과 정토교학을 논의하기도 하였다.276)林 存, 앞의 글, 331쪽.
金富軾, 위의 글.
또한 본국에서 가지고 간 智儼·賢首·澄觀·宗密의 여러 장소에 대하여 많은 학문승들과 더불어 진지하게 토의하기도 하였다.277)≪慧因寺志≫권 8, 晋水法師傳.
趙明基,≪高麗大覺國師와 天台思想≫(東國文化社, 1964), 14쪽.
특히 이들 장소 중에는 중국이 두 차례 법난을 겪는 사이에 없어진 것을 역수입한 것이 있어278)≪佛祖歷代通載≫제 28, 정묘 무진.
趙明基, 위의 책, 14쪽.
중국 화엄종 부흥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279)常盤大定,<宋代に於ける華嚴敎學興隆の緣由>(≪支那佛敎の硏究≫第3, 春秋社, 1943). 이렇듯 장소에 대한 논의가 진지했음은 그만큼 의천의 장소수집 범위가 넓혀지고 자못 활기를 띠어 협조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으로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의천은 귀국에 앞서 먼저 京師로 가서 송나라 철종에게 인사하고 항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秀州의 眞如寺를 방문하여 長水법사 子璿의 탑전에 참배하였다.280)金富軾, 앞의 글, 308쪽. 그 후 귀국길에 오를 때에도 明州에 들러 育王廣利寺에서 雲門宗의 의천선사 懷璉을 뵙고,281)林 存, 앞의 글, 331∼332쪽. 선종 3년(1086) 5월 20일 본국의 朝賀回使를 따라 귀국하였다.282)≪高麗史節要≫권 6, 선종 3년 6월.
義 天,<至本國境上乞罪表>(≪大覺國師文集≫, 권 8).

 이렇듯 義天은 입송해서 1년 2개월 동안 각지를 순방하면서 고승 50여 인을 만나 각종 교리를 묻는 구법활동을 통해 각 종파의 찬술과 소초를 3천여 권이나 수집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283)≪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覺國師 煦.
金富軾, 앞의 글, 307쪽.
李能知,<大覺求法始興台敎>(≪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297∼305쪽.

 의천은 귀국 후에도 국내에서는 물론 요나라와 일본에서까지 두루 章疏를 모아 집대성하여≪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는 장소 목록을 선종 7년(1090) 8월에 엮어냈다.284)“時後高麗十三葉左宥之八年歲次庚午八月初八日 海東傳華嚴大敎沙門義天叙”(義天,≪新編諸宗敎藏總錄≫). 이 교장총록은 의천에 의해 엮어진 목록이므로≪義天錄≫이라 일컫기도 하고, 교장총록의 내제에≪海東有本見行錄≫이라 적혀 있으므로 이를 별칭으로 일컫는 이도 있다. 장소의 수록 범위는 경·율·론 삼장이 상·중·하의 3권에 차례로 분류 수록되어 있는데, 그 장소의 총수는 1,010부 4,857권으로 집계되는 방대한 양이다.

 그런데 이 교장총록은 우리 국내에서는 일찍이 없어져 볼 수 없고, 오직 일본에 유출된 자료에 의해 그 전모와 서지 사항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安元 2년(1176, 명종 6)에 필사한 옛 초본을 비롯하여 寬永 21년(1644, 조선 인조 22)에 필사한 초본, 그리고 元祿 6년(1693, 조선 숙종 19)에 간행한 목판본이 알려져 있는데, 1933년에는 이들 책을 바탕으로 대교하여 신연활자본을 찍어내서 널리 유통시켰다. 그 전본에 의해 찬술 및 소초자와 장소수를 조사해 보면 그 태반이 수·당시대를 전후한 중국 학승들의 것이고, 우리나라 학승들은 30명 117부로 집계되고 있다.285)閔泳珪,<新編諸宗敎藏總錄>(≪韓國의 古典百選≫, 1969), 55∼57쪽. 신라학문승의 장소 중에 누락이 있고286)閔泳珪,<新羅章疏錄長編 不分卷>(≪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347∼402쪽. 또 고려의 경우에는 諦觀의≪天台四敎儀≫만이 가려 수록되었으며, 일본 승려의 장소는 아예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던 것은 의천의 안목에서 엄선한 데 기인한 듯하다.

 한편 교장총록을 엮을 때까지 미처 조사되지 못해 누락된 것도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양 학승들의 교장 찬술과 소초를 의천이 최초로 방대하게 모아 간행하려고 엮은 목록인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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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續藏≪大方廣佛花嚴經隨疏演義鈔≫ 권 8 上
<도판 1>續藏≪大方廣佛花嚴經隨疏演義鈔≫ 권 8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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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목록에 담겨진 장소의 간행에 관한 것은≪高麗史節要≫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선종 3년(1086) 6월 의천이 송나라에서 돌아온 날짜에 그 간행 기사가 일괄 수록되어 있다.287)≪高麗史節要≫권 6, 선종 3년 6월. 한편<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의하면≪新編諸宗敎藏總錄≫을 엮은 다음 해인 선종 8년(1091) 봄 남쪽지방에 내려가 장소를 더 조사하여 4천 권을 찾아냈다. 이것들은 해가 오래되어 먼지가 끼고 누렇게 바랬으며 좀이 먹고 훼손되어 있었으나, 모두 수습하여 돌아와 흥왕사에 교장사(도감)를 설치하고 뛰어난 사람들을 소집하여 본문의 오류와 결락을 바로잡은 다음 개판케 하니, 몇 해 안되어 文籍이 크게 갖추어졌다는 것이다.288)金富軾, 앞의 글, 309쪽.

 ≪고려사절요≫기사는 조선 초기에 편수할 때 관련기사를 해당 사항의 첫머리에 일괄 수록한 데서 말미암은 것임을 고려하면, 이 속장의 조판은 넓게 잡아≪신편제종교장총록≫이 엮어진 선종 7년 8월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그 다음해인 선종 8년 봄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장소를 더 수집해 온 이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속장의 조판 경위와 마감 그리고 그 규모에 관해서도 문헌상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속장의 초간본, 중간본 또는 번각본, 그리고 근대에 본문의 원형을 그대로 찍어낸 대일본속장경에 나타난 고려 교장도감 조판연대를 조사해 보면, 大安 8년 壬申 즉 선종 9년(1092)에 고려국 흥왕사에서 왕명으로 조판한 崔致遠 찬술의<法藏和尙傳>1권이 가장 앞선 것이다.289)“大安 八年壬申歲(선종 9, 1092) 高麗國大興王寺 奉宣雕造”(崔致遠,<法藏和尙傳>≪大日本續藏經≫).<법장화상전>은≪교장총록≫권1,<대화엄경>아래에 수록된<賢首傳>제1권에 해당한다.290)“賢首傳一卷 浮石尊者傳一卷 已上崔致遠述”(≪新編諸宗敎藏總錄≫권 1, 海東有本見行錄 上 大華嚴經, 16쪽). 그 권머리에는<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의 정식 서명이 표시되어 있으나, 권말에는<華嚴宗主賢首國師傳>과 같이 그의 字를 사용한 양식의 별서명이 표시되어 있다.≪교장총록≫이 본시 약식서명으로 저록되어 있으니, 이 경우도 권말의 제목에 따라 약식 서명이 채택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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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續藏≪貞元新譯花嚴經疏≫ 권 10
<도판 2>續藏≪貞元新譯花嚴經疏≫ 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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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宋刻板≪大方廣佛華嚴經疏≫ 권 30에서 찍은 高麗印本
<도판 3>宋刻板≪大方廣佛華嚴經疏≫ 권 30에서 찍은 高麗印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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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 교장도감판 번각본에 실린 마지막 조판 연대는 吉藏이 찬술한<法華玄論>제 3·4권 영본의 ‘乾統 2년 壬午 고려 興王寺 開板’의 刊記에서291)“乾統二年壬午歲(肅宗 7, 1102) 高麗國大興王寺 奉宣雕造”(吉藏,<法華玄論>권 3·4,≪大日本續藏經≫). 볼 수 있는 숙종 7년(1102)이다. 그런데 의천은 그 전해인 숙종 6년 8월 뜻하지 않게 질병에 걸려 10월에 입적하였다.292)≪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6년 9월 갑신.
≪高麗史節要≫권 6, 숙종 6년 9월.
그러므로 속장의 조판은 그의 생전에 착수하였으나, 喪으로 중지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교장도감에서 서둘러 간행하도록 한≪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도 역시 그 다음해 초에 마무리되었다.293)“乾統二年壬午歲(숙종 7, 1102) 高麗國大興王寺 奉宣雕造”(玄奘 譯,<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1권,≪大日本續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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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宋刻板≪大方廣佛華嚴經疏≫에 고려 영통사가 새겨 넣은 도변상도
<도판 4>宋刻板≪大方廣佛華嚴經疏≫에 고려 영통사가 새겨 넣은 도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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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傳本의 조판 사례로 미루어 보면, 교장도감에서의 속장 조판은 그 업무를 주관하던 의천이 입적하자 숙종 7년(1102)에 마무리와 동시에 일단락되었던 듯하다.

 이상과 같이 속장 조판의 마감시기를 고찰해 볼 때, 그 동안 개판된 장소의 규모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고려사≫권 90의 大覺國師傳과<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서는 의천이 수집한 章疏 4천여 권이 모두 흥왕사의 교장도감에서 조판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294)≪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覺國師 煦.
金富軾, 앞의 글.
이를 그대로 따른다면≪新編諸宗敎藏總錄≫에 담겨진 4,857권이 모두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질의 조판문제에 대하여는 이 분야에 조예있는 학자들이 한결같이 신중론을 펴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1천여 부 4천여 권이란 거질의 속장을 간행함에는 관리상 函 차례의 표시가 절대 필요했을 것이고,≪신편제종교장총록≫의 서문에서도 “함 차례와 권의 차례로 엮는다”고 하였다.295)“今以所得新舊製撰諸宗義章 不敢私秘 叙而出之 後有所獲 亦欲隨而錄之 脫或將來 編次函帙 與三藏正文垂之無窮 則吾願畢矣”(義天,≪新編諸宗敎藏總錄≫). 그런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간본에는 그 차례 표시가 전혀 없으므로, 속장은 전질이 아닌 부분적인 조판으로 그쳤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둘째, 교장총록에 수록된 장소로서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개판한 智儼 찬술의<華嚴經搜玄記>와<華嚴經探玄記>그리고 元曉 찬술의<金剛三昧經論>의 3종을296)千惠鳳,≪韓國典籍印刷史≫(汎友社, 1990), 76쪽. 속장과 대조해 볼 때 그 판식 글자체 등이 전혀 다른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다. 만일 속장이 모두 조판되었다면 오늘에 전래되고 있는 번각본의 경우와 같이 그 때의 판본을 번각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으므로 의천의 속장 조판은 전질이 아니고 수의적이며 부분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297)大屋德城,<朝鮮海印寺經板攷>(≪東洋學報≫15-3, 1926), 355∼360쪽.
閔泳珪, 앞의 글, 57쪽.
이것은 조선시대의 刊經都監에서 간행한 속장을 보더라도 의천이 흥왕사에서 조판한 것은 번각으로 중수하였으나, 원간본이 없는 것은 간경도감 본사 또는 그 분사에서 새로 판서본을 써서 조판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원간본이 전래되지 않아 새로 판서본을 마련한 것도 있겠지만, 본래 조판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金堤 金山寺의 韶顯대사는 廣敎院을 짓고, 속장을 간행하려는 의천의 큰 뜻을 돕고자 하였다. 즉 소현은 의천이 구법 및 장소 수집차 송으로 떠나던 전해인 순종 원년(1083)부터 시작해서 의천이 귀국하여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속장의 간행을 추진시킨 이후에도 계속하여 장소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의천이 죽은 다음해인 숙종 2년(1097)까지 15년 사이에<法華經玄■>·<唯識論述記>등 장소 32부 353권을 간행했고298)<金堤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298쪽. 선종 5년(1088)에 慈恩의<阿彌陀經通■疏>를 간행하였는데299)“此 求得將到流通之本也 予助洪願 付於廣敎院 命工重刻”(金山寺 廣敎院 大安 4年(宣宗 5, 1088) 刊行의 慈恩 撰≪阿彌陀經通■疏≫권 下, 刊記). 이러한 사례들도 속장이 부분적인 조판에 그쳤던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장도감에서의 속장 전질의 조판은 대단히 벅찬 사업이었으므로 이렇듯 소현이 의천의 장소간행의 넓은 뜻을 성의껏 도와 주었던 것으로 해석된다.300)趙明基, 앞의 책, 89쪽과 安啓賢,<大藏經의 雕板>(≪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3), 30쪽에서는 의천의 목록 가운데 규기의 唯識 관계 찬술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소현이 특히 유식관계를 맡아 開板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崔柄憲,<高麗 中期 玄化寺의 創建과 法相宗의 隆盛>(≪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255∼256쪽에서는 韶顯이 唯識學의 章疏 등을 간행하여 유통케 한 것은 신라 말기 이래 침체되어 있던 唯識學을 선양하는 데 커다란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의천이 화엄종 입장에서 續藏을 간행했던 것과 비교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셋째, 속장은 초조 및 재조 대장경의 경우와 같이 이미 간행된 책을 참작 또는 바탕으로 하여 새긴 것이 아니고, 본문을 한자한자 꼼꼼히 교감하고 보수한 다음, 깨끗이 판서본을 정서하여 새로 새겨낸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판한 판본이기 때문에 4천여 권이란 방대한 양을 10년 여에 모두 조판한다는 것이 사실상 지극히 어려운 사업이었음을 또한 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교장총록≫에 담겨진 장소의 조판이 義天의 궁극적인 소원이었음은 그의 총록 서문과 문집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뜻밖의 질병으로 나이 47세, 법랍 36세의 아직 젊은 나이에 돌연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아울러 고려하면 속장의 조판사업은 도중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떤 이는 15세기 중엽에 목활자를 만들어 불경 가운데 주로 장소류인<釋氏要覽>·<圓敎六卽儀>·<釋迦如來行蹟頌>·<傳法正宗記>·<碧巖錄>등을 많이 찍어낸 것을 보고 고려 주자로 속장을 모두 인출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301)尹炳泰,<高麗金屬活字本과 그 起源>(≪도협월보≫14-8, 1973), 10∼11쪽. 이것은 고려본 특히 고려 불서에 대한 폭넓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빚어진 잘못임을 첨언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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