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장의 전래본 가운데 초간본은 오직 3종이 알려져 있을 뿐이며, 그 밖에는 중간본 또는 번각본이 아니면 근대에 分門의 원형을 그대로 찍어낸≪大日本續藏經≫이 있을 뿐이다. 속장 초간본 3종 중 완질이 그대로 전래되고 있는 것은 일본 奈良의 東大寺 도서관에 소장된 澄觀 찬술의<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제 1∼20권 40축뿐이다. 각 권은 감색으로 짙게 물들인 원 표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지폭 31.2cm의 양질 닥종이를 사용, 23cm의 높이로 그은 상하단변 안에 각 항 20자를 배자하고 있으며, 전장은 각 권마다 다르나 대체로 500cm에서 700cm 사이의 길이이다. 글자체는 중간 글자의 方筆(모난 필) 歐體系로서 매우 필력이 있고 단정하다. 새김과 인쇄가 섬세 정교하여 書品이 송판보다 월등하다는 평이다.
≪교장총록≫의 大華嚴經部에 들어 있는<隨疏演義鈔>40권은 징관 찬술에 해당하며302)義 天,≪新編諸宗敎藏總錄≫권 1, 2쪽. 권 제4의 下부터 권 제20의 下에는 다음과 같은 간행기록이 표시되어 있다.
권 제4의 下∼권 제5의 下 3권
大安 10년 갑술세(선종 11, 1094)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권 제6의 上∼권 제10의 下, 권 제11의 下∼권 제15의 下 19권.
壽昌 원년 을해세(헌종 1, 1095)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권 제11의 上, 권 제16의 上∼권 제20의 上 10권.
壽昌 2년 병자세(숙종 1, 1096)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권 제20의 下 1권
壽昌 2〔3〕년 정축세(숙종 2, 1097)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위의 권 제20의 下에 새겨진 ‘수창 2년 정축세’는 그 간지로 보아 ‘수창 3년 정축세’를 잘못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또 권 제1의 上부터 권 제4의 上까지에는 간행기록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이<수소연의초>가 권 제11의 上을 제외하고는 권의 순차에 따라 조판 연대가 차례로 표시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태안 10년보다 앞서 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언제 일본으로 유출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수소연의초>의 각 권을 두루 살펴 보면 여러 곳에 이 절의 사문 宗性이 독경하고 적은 글이 있다. 그런데 그 글에 貞永 원년(1232), 嘉禎 4년(1238), 建長 원년(1249), 文永 6·8·9년(1269·1271·1272) 등의 연대 표시가 있고, 또 같은 절의 대법사 正算이 普門院으로 보내고 쓴 글에는 文明 12년(1480)의 연대 표시가 있다. 그리고<수소연의초연기>해설에서는 이 절의 東南院 覺樹가 保安 원년(1120) 7월 太宰府에서 쓴 將來記에 의거, 송의 상인 莊永 蘇景 등에게 의뢰하여 고려에서 수입해 온 100여 권 불경 가운데 있는 20권 40축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303)≪東大寺圖書館新築紀念 東大寺藏國寶·重文善本聚英≫(東大寺圖書館, 1968), 7∼8쪽. 위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일찍이 고려 때 일본으로 유출된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속장 초간본은 일본 동경의 大東急文庫에 소장된 징관 찬술의<貞元新譯花嚴經疏>전 10권 중 권 10 영본 1축이다. 지폭 31.4cm의 양질 닥종이를 사용, 23.3cm의 높이로 그은 상하단변 안에 각 줄 20자를 배자하고 있으며 전장은 1,940cm이다. 글자체가 모난 필의의 힘있고 단정한 구체계인 점에서<화엄경수소연의초>와 공통된다. 새김과 인쇄도 역시 섬세 정교하며, 권축장이 크고 늠름하여 書品이 한결 돋보인다.304)千惠鳳,<新羅·高麗の書跡·典籍>(≪韓國美術≫2, 講談社, 1986), 114·272쪽.
≪東國大學校八十周年紀念 貞元新譯花嚴經疏≫권 10, 影印本 및 解說.≪교장총록≫의「대화엄경부」에 들어 있는<貞元疏>10권은 징관이 찬술한 것인데,305)義 天,≪新編諸宗敎藏總錄≫권 1, 3쪽. 이 권 10영본 권말에 “수창 원년 을해세(헌종 1, 1095)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라는 간행기록이 있다.
권 10의 1축이 헌종 원년에 간행되었으므로, 그 앞의 권 제 1∼9는 그 이전의 1∼2년 사이에 개판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의 일본 전래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위의 동대사 소장본과 비교하여 보면 형태와 조건이 서로 비슷하다. 비록 잔질 영본이지만 간행기록이 있는 속장의 초간본은 위의 <수소연의초>와 이것뿐이다.
끝으로 또 하나 들 것은 권말이 결락되어 간행기록을 잃은 淨源(1011∼1088) 찬집<注仁王護國般若經>권 1∼4의 1책(故趙明基 소장)이다.306)趙明基,<大覺國師의 天台思想과 續藏의 業績>(≪白性郁博士頌壽紀念佛敎學論文集≫, 1959), 23쪽.
文化財管理局編,≪動産文化財指定調査報告書―1985. 10. 現在―≫(1985), 13∼14쪽. 의천의 ≪교장총록≫권 1에 수록된<仁王經>아래의 ‘法四卷’ 다음에는 ‘科一卷’이 더 붙어 있으나307)義 天,≪新編諸宗敎藏總錄≫, 34쪽. 여기서는 그 과문이 결락되어 간행기록을 잃었다. 그러나 판식·판각기법 등이 위에서 든 일본 동대사 소장의<화엄경수소연의초>와 大東急文庫 소장의<정원신역화엄경소>와 비교해 보면 서로 비슷하다. 특히 판각이 정교하여 글자체가 힘있는 모난 필의 구체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인쇄가 깨끗하여 판본이 우아 미려하다. 그리고 ‘建’의 글자를 피휘 결획한 것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찬집자인 정원은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 가서≪화엄경≫을 수강했던 스승이다. 의천은 그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매우 컸으므로, 이 소초는 의천이 생존했던 12세기 초까지의 사이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속장을 번각한 것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전래본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손꼽힌다.
玄範,<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권 13·14 (松廣寺 소장)
대안 9년 계유세(선종 10, 1093)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慧淨,<妙法蓮華經纘述>권 1·2 (송광사 소장)
수창 원년 을해세(헌종 1, 1095)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道液,<淨名經集解關中疏>권 3·4 (閔泳珪 소장)
수창 원년 을해세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宗密,<圓覺禮懺略本>권 2∼4 (개인 소장)
수창 3년 정축세(숙종 2, 1097)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公哲 찬술, 志薀 刪補,<金剛般若經開玄鈔>권 4·5·6 (송광사 소장)
수창 4년 무인세(숙종 3, 1098)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法寶,<大般涅槃經疏>권 9·10 (송광사 소장)
수창 5년 기묘세(숙종 4, 1099)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思孝 科定,<妙法蓮花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권 1 (송광사 소장)
수창 5년 기묘세(숙종 4, 1099)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吉藏,<法華玄論>권 3·4 (개인 소장)
건통 2년 임오세(숙종 7, 1102) 고려국 대흥왕사 봉선조조.
이들 번각본의 바탕은 선종 10년(1093)부터 숙종 7년(1102) 사이에 간행된 것들이다. 대부분이 영본 또는 잔결본이므로 번각기록은 잃었으나, 天順 5년(세조 7, 1461)의 刊經都監 중수기록이 있는<金剛般若經疏開玄鈔>권 6과 대사하여 보면 판각의 솜씨와 지질 등이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세조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번각해낸 간본임을 알 수 있다.308)韓國文化財保護協會編,≪文化財大觀 8―寶物 6, 書畵·典籍―≫(1986), 74∼79·170·221∼224·256쪽.
千惠鳳,≪書藝·典籍―國寶 12―≫(藝耕産業社, 1985), 171∼173·284∼285쪽.
속장의 번각본으로 발표된 것은 그 밖에도 子璿이 찬집한<首楞嚴義疏注經>권 4의 1·2, ■空이 찬술한<大般涅槃經義記圓旨鈔>권 13·14,309)朴奉石,<義天續藏の現存本に就て>(≪朝鮮之圖書館≫3-6, 1934), 31∼38쪽. 靈辨이 찬술한<華嚴經論>권 50∼56, 覺苑이 찬술한<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義釋演密鈔>권 7 등이 있다.310)趙明基, 앞의 글, 914∼915쪽. 이 잔질본들은 속장의 원조판기록이 표시된 권책을 잃었으나, 판식 글자체와 판각 솜씨가 역시 속장 원본과 같다. 그 중 <대반열반경의기원지초>에는 ‘천순 5년 신사세(세조 7, 1461) 조선국 간경도감 봉교중수’,<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의석연밀초>에는 ‘천순 6년 임오세(세조 8, 1462) 조선국 간경도감 봉교중수’의 번각기록이 표시되어 있다. 모두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속장 원본을 번각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국내에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는 澄觀 찬술, 淨源 집록의 <大方廣佛華嚴經疏>후인본은 杭州 慧因院에서 의천에게 화엄경을 강경하던 정원이 엮은 120권본에 해당하며, 당지에서 은 3천냥을 주고 판각을 주문하여311)蘇 軾,<乞禁商旅過外國狀>(≪蘇東坡奏議集≫15, 권 8). 이듬해인 선종 4년(1087) 3월 상인 徐戩 등이 가지고 와서 납품한 경판에서312)≪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4년 3월 갑술. 찍어낸 것들이다. 당시 항주지사였던 東坡 蘇軾이 올린 주의에는 그 경판의 상거래가 부당함을 맹렬히 지적했는데,313)蘇 軾,<論高麗進狀>(앞의 책, 권 6).
―――,<乞禁商旅過外國狀>(앞의 책, 권 8). 그 경판수는 총 2천 9백여 편이였다.≪교장총록≫‘大華嚴經’ 아래의 ‘大疏注經 一百二十卷’에 해당하는 주소본이며,314)義 天,≪新編諸宗敎藏總錄≫권 1, 3쪽. 고려 교장도감에서 다시 새기지 않고 이 송각판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세종 6년(1424) 5월 일본 京都의 室町幕府에 사급되기까지315)≪世宗實錄≫권 26, 세종 6년 12월 무오. 끊임없이 인출 보급되어 그 전래본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전래본 가운데는 공민왕 21년(1372) 9월 영통사에서 李美冲·朴成亮·金師幸 등의 시주로 공인을 모집하여 도변상도의 판화를 정교롭게 새겨 권수를 한결 아름답게 장식한 것도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316)千惠鳳,<義天의 入宋求法과 宋刻注華嚴經板>(≪東方學志≫54·55·56, 1987), 914∼915쪽.
한편 일본 高野山에서는 우리의 속장에 의거 중간해내기도 하였다. 일본 高野山 대학도서관에는 志福이 찬술한<釋摩訶衍論通玄鈔>권 1(전 4권 중잔존 영본)과 法悟가 찬술한<釋摩訶衍論■玄疏>권 5 (전 5권 중 잔존 영본)의 간본이 소장되어 있는데,317)千惠鳳, 앞의 책 (1990), 72쪽. 여기에는 수창 5년 기묘 즉 숙종 4년(1099)에 고려국 대흥왕사가 봉선 조조한 본래의 간기가 그대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에 의해서도 우리의 속장이 일찍이 일본에 유출되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속장의 원 조판기록은 그 밖에도 우리의 장소를 바탕으로 하여 그대로 거듭 찍어낸≪대일본속장경≫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 智儼이 찬술한<金剛般若經略疏>권 2에는 수창 원년(大安 10년) 갑술세(선종 11, 1094), 鮮演이 찬술한<華嚴經談玄決擇>권 6에는 수창 2년 병자세(숙종 1, 1096), 慧遠이 찬술한<地持論義記>권 10에는 수창 3년 정축세(숙종 2, 1097)의 표시가 있다. 더욱이 그 중<金剛般若經略疏>와<地持論義記>에는 조판연대에 이어 그 책을 새기기 위해 정서한 판서자와 교감자까지 그대로 식자되어 있다. 앞의 것은 魯榮이 판서하고 則瑜 등이 교감하였으며, 뒤의 것은 蔣髦가 판서하고 玄湛·會凡·覺樞 등이 교감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