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1) 불교행사의 유형과 전개
  • (3) 불교행사의 전개와 의례적 구조

(3) 불교행사의 전개와 의례적 구조

 고려시대에 개설된 불교행사를 살펴보면, 태조에서 덕종대까지는 팔관회와 연등회의 양대법회와 화엄법회 등이 개설되다가 靖宗 이후에 이르러서 인왕경·금광명경도량 등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종대에 이르러 위의 여러 도량과 더불어 文豆婁道場·摩利支天道場 등의 밀교적 의식 도량이 개설되기 시작하여 이후에는 계속 밀교적 도량이 많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몽고의 외침이 잦았던 고종대에 특히 많은 불교행사가 개설되었는데 그 중 인왕도량·반야도량·화엄신중도량 등이 자주 개설되었음이 주목된다.

 즉 고려 초기에 연등회·팔관회와 화엄법회 등만이 열리고 있었던 것은 초기의 불교의례가 아직 신라의 옛 풍습을 전승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다만 장차 밀교의례를 수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터전을 화엄법회를 통하여 마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가 開泰寺에서 개설한 화엄법회의 疏文에서, “弟子는 머리를 조아려 허공의 法界에 두루 계시는 十方의 三世一切諸佛과 諸會菩薩·羅漢聖象·梵釋四王·日月星辰·天龍八部·岳鎭海瀆·名山大川 등 일체 靈祗에 귀의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화엄세계의 법계관인데, 이는 동시에 태조를 위시한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화엄사상의 원리에서 보면, 재래의 신앙요소들을 수용하는 체계이다.

 이렇게 수용된 범석 4왕 이하의 모든 재래의 신들을 華嚴聖衆이라 하고, 한편 이들에 의한 신앙체계를 華嚴密敎라 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화엄법회의 개설이 장차 본격적인 밀교의례를 전개시킬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이 화엄사상의 우주관에 의한 사고양상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면 다양한 문화 사이의 융합 양상이 나타나게 되고 또 사회 계층간의 융합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단계의 고려 불교행사가 인왕경·금광명경도량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초기의 화엄법회 등에서 밀교적 법회의 기반이 마련되고 그러한 법회가 국가적 입장에서 국가불교로 개설되었기 때문에 호국경전에 의한 법회로 전개·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밀교의례가 성행하게 된다는 사실은 이 때가 되면 천태·화엄 등의 교학사상이 크게 융성하였음은 물론 다른 밀교 경전도 더욱 깊이 이해되었던 데서 연유한다.

 한편 몽고의 외침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고종대에는 어느 왕대보다도 더욱 많은 祈禳的 불교행사가 시행되었는데, 天兵華嚴神衆道場이 자주 개설된 것은 국토가 어지럽게 된 것이 화엄신중의 옹호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결과이다. 즉 화엄신중은 불국토 옹호의 기능을 가진 聖象으로서 이들 신중을 위하고 섬겨야 국토의 고난을 면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면, 고려시대에 국가불교의 입장에서 거행된 불교행사는 연등회와 팔관회 등과 같이 전통적인 풍습을 전승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입장을 지니며, 다른 한편 신구의 사회계층을 융합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도 이바지하였다. 이들 행사는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전국적으로 행하는 축제적 행사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같은 재래문화 요소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하는 의미를 지닌 법회가 화엄법회였고, 나아가 이같은 화엄법회의 기반은 보다 다양한 祈福·祈禳을 목적으로 한 밀교의례를 전개시키게 되었다. 즉 이는≪화엄경≫에서 설하는 毘盧遮那如來를「能統一」의 객체로 하고 諸佛菩薩·諸天神·名山大川·龍神 등을「所統一」의 객체로 하는 統一神的 多神敎의 형태를 지니는 것이다. 예컨대 여기「所統一」의 객체란 천재지변·가뭄·질병 등을 예방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중생의 요청을 통찰하여 그에 應同할 수 있는 尊身을 말하고,「能統一」의 객체는 普門의 존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自性身에 의한 중생구제의 大悲本誓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흔히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一卽多 多卽一’에서,「一」은 능통일의 객체이며「多」는 소통일의 객체가 되는 셈이다. 이상과 같은 신앙체계를 화엄밀교라 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밀교적 불교행사는 화엄밀교의 신앙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각종 밀교의례의 의궤가 혼합되어 성행하였다.

 고려사회에서 불교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큰 계기는 태조의 훈요 10조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가르침에 의해 후대의 왕들은 더욱 불교를 존숭하였고, 국가적으로 불교행사를 시행하여 사회 발전의 장애 요인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고려사회가 불교로서 장애 요인에 대응해 나가는 불교사회가 되었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바이며, 여기에는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던 천태사상·화엄사상·선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으나 특히 감성을 통한 불교적 분위기 조성은 밀교에 의한 것이었다.

 즉 裨補思想에 의한 堂塔伽藍이 여기저기 조성되었고, 그 낙성법회가 성대히 거행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크고 작은 공적·사적의 요구에 의하여 궁중에서 혹은 전국의 사원에서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각종의 밀교적 불교행사가 성대히 행해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행사를 이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때, 그 사회적 의미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불교는 기도불교·법회불교·의례불교로 시종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기도불교·의례불교는 그 속에 정신이 충만해 있을 때에는 사회적으로 불교적 분위기를 조성할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불안을 제거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이를 통하여 불교 본래의 안심법에 다가갈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이 형식화·고정화하게 되면 실생활에서 유리되고 나아가 안심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고려 후기에 知訥에 의한 선사상의 고취나 신흥사대부들에 의한 성리학의 수용 등은 이같은 고려 의례불교의 形骸化가 낳은 산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서 고려시대의 불교행사가 역사발전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그 사회적 성격은 어떠하였는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가 발전을 도모한다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였는데 여기에 각종 불교의례 행사가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불교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화엄사상이 재래의 전통사상과 각 계층의 다양한 문화 양상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체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셋째, 불교의례 행사는 다양한 국민의 요청에 감응한다는 성격을 지님으로써 사회의 구체적 관심사와 결합할 수 있었다.

 이상을 다시 종합하여 말하면, 국가적 입장에서 행한 고려의 불교행사는 사회적 안심을 가져오게 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하겠다.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바는 최종적으로 안심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고승들은 모두가 다 안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던 천태·염불·선사상도 안심의 문제가 그 주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고려시대의 불교 사상가들이 이 안심의 문제를 본질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결국 불교행사는 안심을 느끼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불교행사는 사회적인 구체적 관심사와 잘 결합하여 문화화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불교행사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갖는 의미로는 大世界와 小世界의 상관관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계층구조에 대한 사회질서의 유지에 공헌하였음을 들 수 있다. 한편 종교적 의미를 찾는다면 농경사회의 고민을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불교의례 행사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행사의 축제적 성격과 더불어 그에 곁들여 特赦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의례 행사는 후기가 되면 지나치게 형해화되고, 또한 유교적 기준에 의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건국 이래 줄곧 고려인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 관심사와 관련되어 종교·사회·정치적인 여러 방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洪潤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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