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2) 팔관회

(2) 팔관회

 태조 왕건은 신라의 풍습을 이어 받은 泰封의 연중행사를 그대로 계승하여 건국한 해(918) 11월 궁중의 儀鳳樓에서 팔관회를 열었는데, 그 후에도 계속 매년 11월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더욱이 태조가 그 말년에 10훈요를 제정하여 장차 그의 뒤를 이어갈 후손들에게 내내 명심하도록 가르쳐 놓은 조항 가운데서 팔관회를 매년 개최할 것을 당부한 일은337)≪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그 후 팔관회가 고려의 국가적인 연중행사로 성대하게 베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팔관회는 본래 불교의식의 하나로서,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헛된 말 하지 말며, 음주하지 말라는 불교의 五大戒에, 사치하지 말고, 높은 곳에 앉지 말며, 오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세 가지를 덧붙인 계율을 지키는 의식이다. 이 여덟 가지의 계율을 하루 낮 하루 밤에 한하여 엄격히 지키게 함으로써 불교에 입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8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八齋會, 八關齋會 또는 八關會라고 불렀는데 지극히 종교적인 금욕과 수행을 목적으로 한다.

 경전상으로 보면 8계를 수행하는 풍속은 불교 이전에 이미 바라문가에 있었는데 불교에서 이를 이어받아 출가자만이 아니라 재가신도들도 승려들처럼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고 승려들의 생활을 따라 하도록 했다. 팔관회가 지닌 원래의 의의는 이처럼 불교의 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재가신도들로 하여금 자기의 처지에서 항상 지킬 수 없는 승려들의 계율생활을 모방하여 하루 동안이라도 지켜보고 수행을 하여 공덕을 거두라는 뜻이었다.

 중국은 남북조시대 이전에 이미 개인의 집에서 팔관회가 열렸고 남북조 이후에는 국가의 차원에서 팔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고유의 팔관회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져 금욕, 수행의 의례보다는 국가와 결합된 불교의 의식으로서 기복을 목적으로 하는 法儀로 화하고 엄격한 절차가 아니라 행락의 행사로 변질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를 처음 수용한 고구려에서 팔관회를 개최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에 귀순하여 百座講會와 함께 八關之法을 전해온 惠亮法師338)≪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가 고구려 승려이었으므로 고구려에 이미 팔관회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팔관회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단 두 가지뿐이다. 즉 진흥왕 33년(572) 10월 20일에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위해 外寺에서 7일간 팔관회를 개설했고,339)≪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33년 10월. 선덕왕 5년(636) 皇龍寺의 구층탑을 건립한 후 팔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340)≪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九層塔. 이를 통해 보면 신라의 팔관회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고, 재가자의 일시적 출가수행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죽은 자를 위한 祈福과 追福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나아가서는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으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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