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6) 축수도량 및 기신도량

(6) 축수도량 및 기신도량

 祝壽道場은 국왕의 생일날에 복을 비는 행사로 일찍부터 매우 성대히 열렸는데, 중앙의 관원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지방의 관원들까지도 하례를 올렸다. 제8대 현종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슬픈 마음에 兩京과 여러 道의 하례를 일체 금하고 다만 축수도량만을 간소하게 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전에 축수도량이 이미 성대한 행사로 치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량은 문종 때에 와서 국왕의 생일을 成平節로 제정하여 경축하는 데에 이르렀다. 문종은 즉위년 12월의 생일날에 乾德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은 다음 宣文殿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국가에서는 이 날로부터 7일 동안 外帝釋院에서 祈祥迎福道場을 열었다. 또한 문무백관들은 興國寺에서, 지방의 4도호부·8목에서는 각각 그 지역에 있는 사찰에서 도량을 베풀었고 이것을 연례행사로 삼았다.377)≪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즉위년 12월.

 국왕의 생일날에는 문무백관의 하례식과 축수도량이 열릴 뿐만 아니라 반승행사도 아울러 베풀어졌다. 고려가 멸망하기 바로 전해인 공양왕 3년(1391) 2월의 생일날에도 왕이 檜巖寺에 행차하여 1천여 명의 승려에게 반승하였는데,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왕이 직접 향로를 받들고 각 승방을 돌면서 일일이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동행하였던 왕비와 세자들도 함께 철야하면서 예불하였고 다음날에는 왕이 또 승려들에게 베 1,200필을 희사하였다.378)≪高麗史≫권 46, 世家 46, 공양왕 3년 2월. 이에 앞서 공민왕 17년의 왕 생일에도 3천여 명의 승려에게 반승을 베풀었다.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말기에도 국왕 생일의 의식절차가 이처럼 성대하였으니 초기나 중기의 상황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 왕실에서는 忌辰道場·諱辰道場·忌日道場 등이라는 선왕 또는 선왕비의 忌日행사를 불교식으로 열어 엄격히 지켰다. 왕실의 조상숭배 행사는 중국의 유교식 예제에 바탕을 둔 太廟에서의 행사 등도 있었지만, 불교가 국교로 숭상되었기 때문에 불교식 조상숭배 시설인 眞殿寺院에서의 기신도량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진전사원은 왕과 왕비의 초상화인 眞影을 모셔 놓은 사찰을 말하며, 그 곳에서 매년 기일마다 불교식 齋를 올려서 薦福하는 행사가 기신도량이다.

 선왕의 추모행사가 불교식으로 정례화된 것은 성종 때이다. 성종은 당 태종이 그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사원에서 5일간 불공을 올린 것을 본따서, 왕조의 개창자인 태조와 父君 戴宗의 기일에는 5일간, 모후 宣義王后의 기일에는 3일간 불공을 올리도록 하였고 그 忌月에는 1개월 동안 도살을 금하였다.379)≪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12월. 태조의 기신도량은 그 이후 주로 봉은사에서 열렸는데, 봉은사는 광종이 태조의 원당으로 세운 사찰이었다.380)≪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2년. 다음 목종 때에도 교를 내려, 태조와 부왕 경종을 위한 忌齋를 각각 5일간 열도록 하였으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의 기재도 각각 1일 동안씩 열도록 하였다.381)≪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원년 5월. 덕종과 문종 때에는 부군 현종을 위한 기선도량을 해마다 5월에 현화사에서 열었는데, 현화사는 현종이 왕권의 확립과 문화의 전통을 널리 과시하는 한편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국력을 기울여 세웠던 사원이었다. 숙종 때에는 매년 7월에 부군 문종의 기신도량을 흥왕사에서 열었으며, 9월에는 모후 仁睿太后의 기신도량을 國淸寺에서 열었는데, 흥왕사와 국청사는 각각 문종과 인예태후의 원찰이었다. 그 후 예종은 매년 10월에 숙종을 위한 기신도량을 열었으며, 인종은 또한 4월에 예종의 기신도량을 여는 등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선왕들의 진전사원에서 계속되었는데, 기신도량 때에는 반승이 아울러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선왕의 기일에 지내는 추모제의 성격을 지니는 기선도량 외에 매년 7월 15일에≪目蓮經≫과≪盂蘭盆經≫을 외며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비는 盂蘭盆齋도 여러 차례 베풀어졌다. 이는 예종대에 처음으로 기록에 보이는데 예종 원년과 4년의 7월 15일에 승려들을 궁궐로 초청하여 長齡殿에서≪목련경≫을 외며 조상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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