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3. 불교행사의 성행
  • 2) 항례적인 불교행사
  • (7) 담선법회

(7) 담선법회

 談禪法會는 禪에 대한 이치를 서로 공부하는 한편 참선도 아울러 실천함으로써 선풍을 크게 떨치는데 주목적을 둔 선사들의 모임인데, 고려 초기부터 3년에 한 번씩 普濟寺에서 국가의 주재로 열렸다. 태조 왕건이 건국 직후에 五百禪宇를 개경과 지방에 창건하고 선승들을 중앙으로 초치하여 담선회를 열었는데, 이것은 선법을 선양하고 아울러 北兵을 진압하고자 한 것이었다.382)李奎報,<龍潭寺叢林會牓>(≪東國李相國集≫권 25). 의종 9년에 보제사에서 열렸던 담선법회가 ‘普濟國談禪齋’라고 불리웠던 것을 보면,383)<龍門寺重修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403쪽. 이것이 국가에서 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李圭報가 書房을 출입하던 당시에는 보제사와 나란히 西普通寺와 廣明寺에서도 열리게 되었다.384)李奎報,<西普通寺行同前牓>(≪東國李相國集≫권 25). 담선법회를 여는 데 꼭 3년을 기다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또한 迦智山門의 보제사에서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외에도 昌福寺와 大安寺에서도 있었는데, 대안사는 崔忠獻에 의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며 창복사는 희종 7년에 중창된 바 최충헌이 왕의 윤허를 얻어 담선법회를 해마다 열었던 곳이다.385)李奎報,<昌福寺談禪寺>·<大安寺同前牓>(위의 책, 권 25). 이들 사찰의 담선법회는 보제사 및 서보통사, 광명사의 경우보다는 국가적 비중이 좀 떨어졌지만 규모는 작지 않았다.

 국가에서 주관했던 담선법회와는 달리 따로 須彌山 廣照寺와 迦智山 寶林寺 등 구산선문의 각 본산을 위시하여, 가지산 龍潭寺의 경우처럼 말사에서도 담선법회가 열렸는데 대개 매년 겨울철에 열렸다.386)李奎報,<龍潭寺叢林會牓>(위의 책, 권 25). 그리고 이들 9산에서 열렸던 담선법회는 일명 叢林이라고 불리웠다.

 담선법회의 개최시기 및 기간, 규모는 각 사찰마다 서로 달랐다. 서보통사의 경우는 매년 4월 22일부터 7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88일간에 걸쳐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대안사에서는 매년 4월 15일부터 열렸고 창복사에서는 28일간 해마다 열렸다.387)위와 같음.

 창복사의 담선법회에서는 普照 知訥이 항상≪六祖壇經≫과≪大慧語錄≫을 주로 강설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다른 곳의 담선법회에서도 비슷하였을 것이다.≪대혜어록≫은 ≪육조단경≫과 아울러 보조 지눌 이후 고려 불교계에서 비로소 높이 받들어지는 바가 되었는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계에서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이규보의≪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는 禪會請說禪文, 同前願請說禪文, 同前禪會請說禪文 등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모두 頓悟漸修를 골자로 하는 지눌의 선사상이어서 普照 禪이 담선법회를 통하여 널리 퍼져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담선법회는 고종·원종 때에 더욱 성황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은 몽고병의 격퇴를 위한 기도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388)李奎報는<甲午年談禪日齋疏>에서 “나라의 판도가 공고하고 나라의 업이 강령하기를(皇圖鞏固 國業寧康)” 기원하였다(위의 책, 권 41).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만복을 아울러 기원하는 것을 목적과 취지로 하였던 담선법회가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 몽고군의 격퇴와 국가의 안태를 더욱 절실하게 기원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충렬왕 4년(1278)부터 그 후 3년 동안 담선법회는 중지되었다. 韋得儒와 盧進義가 고려에 와 있던 몽고인 洪茶丘에게 “국가에서 담선법회를 설행하는 것은 上國 즉 元을 저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원이 금지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은 그 해 3월 장군 盧英을 원에 보내어 해명하였고,389)≪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3월 및 권 104, 列傳 17, 金方慶. 6월에는 왕이 이 문제로 또 직접 원나라에 가기도 하였다.390)≪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6월. 충렬왕 6년 3월에 曺允通이 원에서 귀국하여 복설의 허가를 전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담선법회는 중지되었다가 다시 열리게 되었지만,391)≪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6년 3월. 충숙왕 원년(1314)에도 담선법회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일삼아 밝히기도 하였다.392)≪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숙왕 원년 정월.

 담선법회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 공민왕 때에도 演福寺에서 두 차례 열렸으며, 조선 태종 때에도 司諫院이 담선법회의 폐지를 청하였지만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洪潤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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