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嚴經道場은≪화엄경≫을 외며 강독하고 普賢菩薩이 세운 10大願을 마음에 되새기어 참회하는 한편,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또는 재난을 없애기 위하여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화엄경≫은 우주의 질서를 미적으로 표현한 대승경전 중에 으뜸을 차지하는 경전으로서, 그 속에 담겨있는 가르침도 훌륭하지만 경전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된 경우도 많았다.
국론통일의 사상으로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화엄사상은, 중국의 則天武后가 국론통일의 사상에 毘盧遮那佛을 이용한 것이라든지 일본 奈良朝의 聖武天皇이 東大寺에 盧舍那佛을 만들어 전국에 國分寺를 설치할 때 그 이론적 근거로 이용하였던 것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나라를 달리하여 널리 채용된 국가경영의 근본사상이었다.
신라시대부터 각 경전의 효력을 믿었지만 특히 화엄경은 부처의 화려한 세계를 보여주는 경전이었던 만큼 최고 경전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경향은 고려 시대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화엄경도량이 설행된 가장 주된 이유는 국토를 불교 수행의 도량으로 본≪화엄경≫에 근거를 둔 오랜 신앙의 결과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국난이 극심하였던 고종대에 왕의 親設로 17회나 설회되었던 華嚴神衆道場과 고려의 講經法會 중 가장 많은 설행 횟수를 가진≪仁王經≫,≪金光明經≫등의 호국경전의 강경의식도 그 경전들이 갖는 호국적인 의미와 더불어 화엄사상이 그 배후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볼 때, 화엄도량의 설행목적도 이것들과 큰 연관을 갖고 있다 할 것이다.
화엄경도량은 또한 찬불의 의미로도 설행되었다. 태조가 백제를 항복시킨 기념으로 開泰寺를 짓고 화엄법회를 연 것과 문종 즉위시 永興 지방의 적을 물리치고 화엄도량을 실행한 것 등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편 문종 37년(1083) 7월 興國寺에서 5일간에 걸쳐 열렸던 화엄도량에서는 날씨가 고르기를 기원했으며, 숙종 7년(1102) 4월에는 송충이의 해를 막기 위해 화엄경을 외는 의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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