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4. 사원의 경제 활동
  • 1) 사원경제의 배경
  • (1) 정치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고려시대에 사원경제가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왕실 및 귀족들의 비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고려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성립한 데 연유한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고려를 개창하였지만 신라와 후백제 지역에 산재하고 있었던 각처의 호족들을 새로운 왕조의 지배체제 속으로 완전히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태조는 호족연합정책을 실시하면서 왕권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각 처에 산재하고 있던 호족들은 나말에 형성된 禪宗寺院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족의 포용은 곧 선종 사원세력의 포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자신도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음을 그 訓要十條에서 언급하고 있다.442)≪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그러므로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불교를 열심히 신봉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 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불교계의 지원을 받았다. 광종은 당대의 고승인 均加를 기용하여 그의「性相融會」사상을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443)金杜珍,<均如의 “性相融會”思想>(≪歷史學報≫90, 1981, 34∼41쪽 ;≪均如華嚴思想硏究≫, 韓國硏究院, 1981). 또한 歸法寺를 창건하여 균여를 주지시켜 광종의 개혁정치를 적극적으로 성원해 줄 사회적 지지세력을 확보하고,444)金龍善,≪高麗光宗硏究≫(一潮閣, 1981), 97∼100쪽. 그 이데올로기를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이처럼 광종은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왕권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건국에 공이 많은「舊臣·宿將」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죄업을 씻고자 불교의 因果應報說에 의거, 많은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를 비호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목종 12년(1009)에 일어난 康兆의 정변으로 인해 즉위하였다. 현종이 즉위하기 전에 金致陽 일파가 자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고 三角山 神穴寺에 도피하여, 승려들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져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현종은 불교계에 많은 도움을 베풀어 사원과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인종대 정권을 오로지 한 李資謙의 집안은 불교계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즉 이자겸은 아들인 首座 義莊을 玄化寺에 포진시키는 등 당시 경제·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사원세력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445)金潤坤,<李資謙의 勢力基盤에 對하여>(≪大丘史學≫10, 1976).
李相瑄,<高麗時代의 隨院僧徒에 대한 考察>(≪崇實史學≫2, 1984), 10∼13쪽.
그리고 인주 이씨 가문에서는 李子淵의 아들인 金山寺의 慧德王師 韶顯을 비롯하여, 손자인 현화사의 世良, 淸平居士 資玄, 이자겸의 아들인 수좌 의장, 李資義의 아들인 흥왕사의 智炤大師 등 3대에 걸쳐 5명의 승려를 배출하여 사원과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였다.446)李相瑄, 위의 글, 12∼13쪽.

 무신정권기에 들어서서 무신들은 사원에 대한 탄압을 강구하였다. 왜냐하면 왕실·귀족의 비호로 확보되었던 사원세력은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그 기반이 흔들리게 되자 왕권을 회복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보장받고자 무신정권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충헌의 사원에 대한 탄압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즉 최충헌 형제가 정권을 장악한 뒤 명종에게 올린 10개 조문의 封事 중 2개 조문에서 사원에 대한 탄압책을 명시하였고, 왕의 서자로서 승려가 된 小君들이 왕의 측근에서 정치에 간여하므로 그들을 본래 기거하던 사원으로 돌려보내고 또 왕이 총애하던 僧 雲美·存道를 내쫓기도 하였다.447)≪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5월. 이와 같은 탄압에 대해 사원의 무장한 승도들은 최충헌 정권에 맞서 무력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최씨 정권은 이를 진압하고 불교계를 재편하여 자신들의 의도대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즉위하면서 政房을 혁파하고,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는 등 일련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지만 附元輩를 중심으로 하는 權門世族의 반발로 뜻한 바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공민왕 5년(1356)에 이르러 본격적인 개혁정치가 단행되었다. 즉 대외적으로는 反元政策,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작업은 元 順帝의 제2황후인 奇皇后의 배경을 믿고 권세를 천단하던 기씨일파 등 부원배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서북면과 동북면의 실지회복, 원의 연호사용 정지, 관제를 문종 때의 구제로 환원시키는 조치 등이었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은 그 원년(1352) 廣州 迷元莊에 기거하고 있었던 보우를 기용하여 왕을 보좌하게 하였다.448)≪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5월. 그 뒤 공민왕 5년에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圓融府를 세워 관속을 두고 사제의 예를 나눌 정도로 신임하였다.449)≪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4월. 또한 다음 달에는 보우에게 모든 사원의 주지 임명권을 주어450)≪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5월. 사실상 禪敎宗門의 총수가 되게 하였다. 이는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단행하는 데 있어서 나타날 수 있는 반대세력을 의식한 조치로서, 보우로 하여금 모든 사원세력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451)李相瑄,<恭愍王과 普愚―恭愍王初 王權安定의 一助를 中心으로―>(≪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그 뒤 공민왕 14년에 신돈을 등용하여 이전에 미처 완수하지 못했던 내정개혁 즉 왕권강화와 사회경제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 일도 보우를 기용한 배경과 거의 비슷한 역사적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일대를 통해서 불교가 국가적 종교로 신봉되면서 승려들의 지위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승려들은 불교사상을 지배체제의 이념으로 제공해 주면서 정치권력과 밀착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원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안정된 경제생활을 보장받아 사원경제를 발달시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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