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4. 사원의 경제 활동
  • 3) 사원의 수공업

3) 사원의 수공업

 고려시대 사원의 僧尼들은 사원에서 소용되는 물품들을 사원 자체에서 생산하여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나 사원의 경제력 증대와 더불어 가내수공업적 단계로부터 점차 전문적인 수공업 단계로 발전하여, 자급자족적 생산단계를 벗어나 수공업제품의 상품화가 촉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원의 수공업에 대한 고려 전기의 기록은 없으므로, 전기의 수공업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기의 기록이 약간 보이므로 이를 토대로 고찰해 보면 사원의 수공업 수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여승이 있어 白苧布를 헌상하였는데 가늘기가 매미 날개와 같았고, 꽃무늬를 섞어서 짠 것이었다. 제국대장공주가 시전 상인에게 보이니 모두 말하기를 전에 보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여승에게 어디에서 이것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에게 한 여종이 있어 이것을 잘 짜나이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이 여종을 나에게 보내는 것이 어떠한가’라 하므로 여승이 깜짝 놀랐으나 부득이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충렬왕, 齊國大長公主).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에게 한 여승이 백저포를 헌상하였는데 가늘기가 매미 날개와 같고 花紋이 섞여 있었다고 하여, 백저포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백저포를 시전상인에게 보인 바 시전상인들도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라 할 만큼 직조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만들어 낸 사람이 여승의 여종이라는 점에서 여종이 사원 내에서 직물을 생산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사실에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여종이 직조한 화려한 꽃무늬의 백저포를 수도하는 여승들이 착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의 승니들이 착용할 수 있는 의복은 緇衣였으므로 백저포로 만든 화려한 꽃무늬 수도복은 착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백저포는 왕실·귀족들의 여인들에게 헌납하거나 또는 조공품을 위해 전문적으로 생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적어도 이 시기에는 사원에서의 수공업이 전문적인 수공업단계로 발전하여 직물의 상품화가 촉진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여종은 공인에 불과하였고, 여승이 직조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했을 것이므로 여승들도 직물생산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여승들이 기거하는 여러 사원에서도 직물 생산에 힘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참고해 보면 어느 정도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남산 아래 한강의 위 荳毛浦에 한 尼舍가 있어 이름을 彌陀寺라 하였는데 이 곳에 기거하고 있는 尼姑 등은 모두 극히 가는 면포 짜는 것을 생업으로 하였다(<花紋苧布尼婢織成>,≪朝鮮佛敎通史≫下篇, 471쪽).

 이 기사는 미타사의 여승들이 모두 細綿布 짜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직조업은 미타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승들이 거처하는 여러 사원에서도 직조업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여승들이 직조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전문적인 수공업단계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기사에 뒤이어서 在家僧妻들도 직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또 북도의 大鎭과 각 郡의 在家僧妻 등도 麻布를 직조하였는데 아주 가볍고 가늘어서 속칭 鉢內布라고 불렀다. 생각컨대 가히 하나의 바리 안에다가 1필의 포를 담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花紋苧布尼婢織成>, 위의 책, 471쪽).

 곧 군사의 요충지인 북도의 6진과 각 군의 재가승처들도 麻布의 직물 생산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바리 안에 한 필의 포를 담을 수 있는 아주 가볍고 가느다란 鉢內布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직조기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원의 직조업은 가내수공업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수공업단계로 발전하여, 사원에서 소용되어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직조품을 생산하여 상품화하였을 것임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사원에는 직물류 이외에 기와를 굽는 기술을 가진 승려도 있었다.

충렬왕 3년 5월 임진일에 승 六然을 강화에 보내 유리와를 굽게 하였다. 그 만드는 방법은 황단을 많이 쓰므로 이에 廣州의 義安土를 취하여 구워, 유리와를 만드니 품색이 南商이 파는 것보다 뛰어났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5월).

 충렬왕이 僧 六然을 강화도에 보내 유리와를 굽게 하였는데 육연은 廣州의 義安土를 가져다가 黃丹을 많이 사용해서 南商들이 판매하는 것보다 품질과 색상이 아주 뛰어난 유리와를 만들어 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연관시켜 볼 때 사원에는 절을 지을 때 필요한 기와를 굽던 사찰 전용의 瓦窯址가 있었던 것 같다.

 1980년 11월 10일부터 22일까지 경주사적관리사무소 학술조사단은 慶北 月城郡 內南面 葺長里 天龍寺 부근에서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기와를 굽던 두 개의 대규모 와요지를 발견하였다. 이곳의 발굴조사 책임자는 당시 천룡사에 기와를 공급하기 위한 사찰 전용의 와요지가 있었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475)≪서울신문≫, 1980년 11월 22일(발굴책임자:韓炳三).

 이 기와가마터는 천룡사만의 건립을 위해서 만들어진 일시적인 것이 아니 라 경주 일대 더 나아가서는 경상도 일대의 사원 건립시에도 기와를 공급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사원이 건립되고 있었으므로 이외의 다른 지역에도 사찰 전용의 기와가마터가 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기와가마터에서 기와를 생산하는 역할은 육연 같은 승려기술자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사원에 소속되어 있는 사원노비들이 맡았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처럼 사원의 기와를 굽는 일 또한 직물류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수공업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도 사원은 불상이나 불구의 제작을 위해 목공기술과 금속가공기술을 소지한 자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이미 신라 문무왕대에 蒲鞋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廣德이라는 승려가 있었고,476)≪三國遺事≫권 5, 感通 7, 廣德 嚴莊. 고려 후기의 全英甫는 제석원의 奴로서 금박을 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477)≪高麗史≫권 124, 列博 37, 全英甫. 이와 같이 사원은 많은 수공업기술을 가진 노비나 승려들을 거느리고 다량의 물품을 생산하여 자신들을 위해 소비하고 남는 잉여품은 상품화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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