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Ⅰ. 불교
  • 4. 사원의 경제 활동
  • 4) 사원의 상행위

4) 사원의 상행위

 고려시대의 사원은 사원전을 확대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나아가 많은 사원노비들을 확보하여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수공업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술·소금·가축·파·마늘·유봉밀 등의 생산판매를 통해서도 사원의 경제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본래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그 초기부터 사원이나 승려들의 경제적 자급자족을 위해 상업활동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인도 불교의 상업관이 중국을 거쳐 고려에도 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인도불교의 상업관은 사원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생활 이상의 이윤을 목적으로 한 영리행위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사원의 승려들이 불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물품들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상행위가 점차 심해지게 되었다. 이에 충숙왕 3년(1316)에는 승려들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478)≪高麗史≫권 85, 志 2, 刑法 2, 禁令 충숙왕 3년 3월. 그러면 이와 같은 사원 및 승려들의 상행위에 대해서 그 일단의 구체적인 실상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사원 및 승려들의 상행위의 예로서 양조업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미 국초인 성종 2년(983)부터 개경에 6개소의 酒店을 설치하여 술의 판매를 장려하였다.479)≪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10월. 그러나 이같은 국가의 주점설치는 사원의 양조업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국가와 백성들을 계도해야 할 사원이 술을 생산하여 판매함으로써 사회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규제하는 법적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즉 현종 원년(1010)에 승니들의 양조행위를 금하는 규제조치가 내려졌다.480)≪高麗史≫권 85, 志 2, 刑法 2, 禁令 현종 원년. 이러한 사실은 금지령이 내려지기 이전부터 사원에서 양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원의 양조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현종 12년에 취해진 조치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그 해 6월에는 모든 사원의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즐기는 것을 금지하였고481)≪高麗史≫권 85, 志 2, 刑法 2, 禁令 현종 12년 6월. 또 다음 달에도 다시 사원에서의 양조를 금지하였던 것이다.482)≪高麗史≫권 85, 志 2, 刑法 2, 禁令 현종 12년 7월. 이러한 양조행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는 국가가 사원에 대해 형식적인 금지령만을 내리고 강력한 의법조치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당시 사원의 세력을 짐작케 해 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양조에 소모된 미곡의 소비량이 어느 정도인지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현종 18년 6월에 楊州에서 아뢴 내용중에 “莊義寺·三川寺·靑淵寺 등의 승려들이 금령을 어기고 양조한 쌀이 360여 석이나 되었다”483)≪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18년 6월.고 하였다. 이로 보아 양조행위가 전국의 사원에서 행해졌다면 그 소비량은 실로 막대했을 것이고, 단순히 사원의 승려들이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원에서 생산된 술은 사원 자체에서만 소비된 것이 아니라 상품화할 목적으로 생산하여 판매되고 있었다. 즉 인종 9년(1131) 6월에 內外寺社의 승도들이 술과 파를 팔고 있었던 사실에서484)≪高麗史節要≫권 9, 인종 9년 6월. 양조된 술이 상품으로서 판매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같은 국가의 계속되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원에서 지속적인 양조행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이에 대해서는 불교의 세속화라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성종 15년(996)의 철전화폐의 사용485)≪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貨幣 성종 15년 4월.과 숙종 2년(1097)에 鑄錢官을 두어 금속화폐의 유통을 장려한 사실486)≪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貨幣 숙종 2년. 및 동왕 6년에 은 한 근으로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따 은병을 만들어487)≪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貨幣 숙종 6년. 통용시켰던 국가의 화폐유통 정책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숙종 9년에는 금속화폐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주·현에 명해 酒食店을 열어 백성에게 판매를 허가하게 함으로써 양민들로 하여금 돈의 이용을 알게 하였다.488)≪高麗史節要≫권 7, 숙종 9년 7월. 주식점의 판매를 통해 화폐의 이용을 손쉽게 하고자 하는 국왕의 노력은, 결국 당시 많은 미곡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원에서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원은 막대한 사원전에서 생산되는 미곡과 왕실·귀족·양민들에 의해 시납된 미곡 등 엄청난 양의 미곡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막대한 양의 미곡을 오랫 동안 저장한다는 것도 사원으로서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미곡을 술로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당시 통용되던 철전과 은병, 특히 화폐가치가 높았던 은병을 확보하여 미곡의 저장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가 사원의 경제력을 증대시키려고 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양조행위의 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고려의 사원은 많은 鹽盆을 소유하고 소금을 생산판매하여 이득을 취해 경제력을 증대시켰다. 고려시대 염제에 대해≪고려사≫食貨志 鹽法條에서 국초의 제도는 역사서에서 고찰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489)≪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전기의 염제에 관한 상황은 잘 알 수가 없다. 일단 기록상으로 국가에서 소금에 관심을 갖고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의 일이다. 곧 충렬왕 14년(1288) 3월에는 모든 도에 사신을 파견해서 소금을 전매하게 하였는데,490)≪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충렬왕 14년 3월. 이 사실로 보아 소금의 전매가 실시된 것은 충렬왕 때부터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후 충렬왕 18년 7월에 鹽稅別監을 경상·전라·충청도에 나누어 보내고,491)≪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충렬왕 18년 7월. 21년 7월에 경상·전라도에 파견했던492)≪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충렬왕 21년 7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소금의 전매는 국가의 의도대로 시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몽고와의 30여 년에 걸친 항쟁으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宮院이나 寺社 및 권세가들이 국용에 충당되어야 할 염분을 장악하고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소금의 전매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게 되자 충선왕은 소금의 전매를 통해 부족한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충렬왕 24년 정월의 충선왕 하교에서는 “염세는 옛부터 천하의 공용인데 지금 모든 궁원·사사·권세가들이 모두 다투어 차지하고 그 세를 납부하지 않아 국용이 부족하니 유사는 추궁하여 없애도록 하라”고 하였다.493)≪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충렬왕 24년 정월. 모든 궁원이나 사사 및 권세가들이 염분을 차지하고 탈세를 하여 국용이 부족하게 되자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선왕의 노력은 즉위 후 불과 8개월만에 원나라로 소환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충선왕은 복위하여 소금의 전매제를 다시 시행하였다. 즉 충선왕 원년 2월에 傳旨하여 內庫·常積倉·都鹽院·安國社 및 諸宮院·內外寺社가 소유한 염분을 모든 관청에 납입시키도록 하였다.494)≪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鹽法 충선왕 원년 2월.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본다면 사원은 소금의 전매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곳곳에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염분에서 생산된 소금이 사원에서 모두 소비되었을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 대부분은 사원의 경제력 증대를 위해 민간사회에 판매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원은 국가의 재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佛法의 수행보다는 재부의 축적에 더욱 힘썼으니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음은 당연한 소치라 하겠다.

 또한 사원은 佛家의 계율에 위배되는 牧畜業과 파·마늘·기름·꿀 등을 생산하여 판매함으로써 부를 축적하였다. 먼저 목축업을 통해 상행위가 이루어졌던 사실에 대해서는 문종 10년에 내린 制旨 중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곧 역을 피한 무리들이 沙門에 의탁하여 재물을 불려 생계를 경영하며 耕田畜産으로 생업을 삼아 估販으로 풍습을 삼으니, 나아가서는 계율의 조문에 위배되고 물러가서는 淸淨의 규약이 없다는 것이다.495)≪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 이는 계율에 위배되는 축산을 생업으로 삼아 목축한 축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러면 사원에서 목축한 畜種들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고려사≫에 말과 소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 있어 일단 사원에서 목축한 동물은 말과 소가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에 대한 기사로는 비록 고려 후기의 기록이지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던 僧 普虛가 왕으로부터 왕실의「莊」인 迷元莊을 하사받아 이를 현으로 승격시키고 전원을 널리 점유하여 왕실에서 사용하는 內乘馬라 칭하면서 많은 말을 목축하였던 사실이 있다.496)≪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9월. 보허는 공민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던 普愚이다. 보우는 공민왕의 은우를 입어 迷元莊을 收租地로 하사받아 이 곳을 직접 관리하여 말을 사육하였다. 이 사실 외에 다른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문종 10년의 ‘밭갈이와 축산을 생업으로 하여 상업을 풍습으로 삼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초기부터 말을 사육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말은 왕실·귀족은 물론이고 군사·역에 이르기까지 필수불가결한 소용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가적 차원에서 마정을 관리하였다.497)≪高麗史≫권 82, 志 2, 兵 2, 馬政. 특히 고려 후기 유목민족인 원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에는 말의 소용이 더욱 증대하여 원은 제주도에 牧馬場까지 설치하고 말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말의 사육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인해 親朝나 助征의 일이 있을 때에는 번번이 말을 요구하였다.498)≪高麗史≫권 82, 志 2, 兵 2, 馬政 충렬왕 14년 2월. 이에 고려조정은 원에 말을 진상해야 했으므로 말의 가치가 높았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원의 지배를 벗어난 공민왕 이후에는 왜구·홍건적의 침입 등의 전란으로 수많은 戰馬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말값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많은 전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원은 목마에 필요한 목마장의 확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수익성이 높은 목마를 간과할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실로 공민왕 이후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공민왕 때에 3회에 걸쳐 승려들과 사원으로부터 전마를 거두어 군용에 충당하였고,499)≪高麗史≫권 82, 志 2, 兵 2, 馬政 공민왕 3년 6월·8년 12월·10년 10월. 우왕 때에도 역시 승려들과 사원으로부터 전마를 징수하였다.500)≪高麗史≫권 82, 志 2, 兵 2, 馬政 신우 원년 9월. 이같은 사실은 사원에서 목마했을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원에서는 소도 사육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종 18년(1231) 11월 기축에 왕륜사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몸에 머리가 두 개였는데, 한 머리에는 귀가 두 개였고 또 한 머리에는 귀가 하나였다(≪高麗史≫권 55, 志 3, 五行 3 고종 18년).

신우 10년(1384) 4월 신묘에 松山 石方寺의 암소가 암·수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高麗史≫권 55, 志 3, 五行 3 신우 10년).

 위의 기사들은 王輪寺·石方寺에서 소가 사육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려 후기의 사실이므로 고려 초기부터 사원에서 소를 사육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고려사≫오행지의 기록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던 일을 낱낱이 수록한 것이 아니고 뜻밖에 일어났던 기이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보면 고려 초부터 소가 사육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農牛로서 사육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여하간 사원에서 수익성이 높은 말이나 소를 사육하여 경제적 부의 축적에 힘쓰고 있었음은 사실이라 하겠다.

 또한 사원에서는 파·마늘을 재배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문종 10년(1056) 9월의 기사에 “불경을 강의하는 장소를 베어서 파·마늘 밭을 만들었다”501)≪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10년 9월.고 하였고, 다시 인종 9년(1131) 6월에는 “內外寺社의 승도들이 술과 파·마늘을 팔았다”502)≪高麗史節要≫권 9, 인종 9년 6월.는 등의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원은 油蜂蜜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즉 의종 11년(1157) 10월에 “太府寺에서 기름과 꿀이 고갈되었다고 보고하므로 모든 사원에서 징수하여 齋醮의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라”503)≪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科斂 의종 11년 10월.고 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원에서 기름과 꿀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기름과 꿀 역시 사원에서의 소용품을 제외한 나머지 잉여품은 판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사원은 불가의 본질을 외면한 채 고리대와 보의 이식행위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고려사회의 양민들은 귀족 및 관리들의 苛斂誅求, 수차례에 걸친 전란,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지배귀족들의 강제성 고리행위까지 가중되어 양민들의 부담은 더욱더 무거워져 이중·삼중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양민들의 생활고를 덜어 주어야 할 사원에서까지 殖利事業을 통해 양민들의 고혈을 착취했으니 고려사회에 미친 폐해가 대단히 컸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고려사회에 통용되던 법정이자율은 경종 5년(980)에 정해진 3분의 1이 적용되고 있었다.504)≪高麗史節要≫권 2, 경종 5년. 그러나 이러한 법정이자율은 잘 준수되지 않아, 성종 원년(982)에는「子母相侔」라 하여 원금과 이자가 같은 액수가 되었을 때는 그 이상의 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보완되었다.505)≪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借貸 성종 원년. 그 뒤 모든 제도가 어느 정도 정비되었던 문종 원년(1047)에 子母停息法을 정하여 고리 행위를 완화시키려는 법식을 마련하였다.506)≪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借貸 문종 원년. 그렇지만 이러한 법식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고려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경제 구조의 변화에 기인하여 양민들의 생활은 더 어렵게 되고 고리대행위는 한층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고리대행위는 지배귀족층들 뿐 아니라 사원에 의해서도 양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되었다. 사원이 고리대행위를 하였음은 명종 18년(1188) 3월에 내린 制旨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곧 “道門의 승인들이 여러 곳의 農舍에서 함부로 貢戶로 인정하여 양민을 사역시키고, 또 거칠은 紙布를 강제로 빈민에게 대여해 주고 그 이자를 취하니 모두 금지하라”507)≪高麗史≫권 85, 志 2, 刑法 2, 禁令 명종 18년.고 하였다. 그리고 8년 뒤인 명종 26년에 崔忠獻 형제가 李義旼을 제거하고 올린 封事에서도 승려들의 이식행위의 폐단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승려들은 왕의 총애를 기화로 왕의 측근이 되어 불교를 관장하면서 고리행위를 통해 양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국가재정에까지 막대한 손실을 끼치면서 자신들의 財富 증식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508)≪高麗史節要≫권 13, 명종 26년.

 그런데 이와 같은 고리대행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禁令을 주장했던 최충헌의 아들 崔瑀의 자제들도 아버지의 권력을 배경으로 고리대행위를 자행하였다. 최우는 적자가 없어 기생 瑞蓮房에게서 萬宗·萬全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최우는 兵權을 사위인 金若先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나, 만종과 만전이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아들을 松廣社에 보내 승려가 되게 하고 禪師의 승계를 제수하였다. 그 뒤 만종은 斷俗寺에, 만전은 雙峯寺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불도 수업에 전념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변에 무뢰승들을 모아 식리사업에만 주력하여 鉅萬을 헤아릴 정도의 많은 金帛을 축적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경상도에서 축적하고 있었던 50여만 석이라는 막대한 양의 미곡을 식리사업에 투자하여 그 이자를 착복함으로써 양민들은 남는 곡식이 없어 국가의 조세까지도 여러번 바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刑部尙書 朴喧과 慶尙道巡問使 宋國瞻 등에 의해 최우에게 전해지자 두 아들을 개경으로 불러 들이고 죄질이 나쁜 문도들은 죄를 주어 민심을 수습하였다.509)≪高麗史≫권 129, 列傳 42, 崔忠獻 附 怡. 만종과 만전의 고리대행위가 당시의 실권자였던 아버지 최우의 권력을 배경으로 해서 이루어진 특수한 예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앞에서 인용한 사실들과 관련하여 검토해 보면 이 당시 사원에서의 고리대행위를 통한 부의 축적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사원의 고리대행위는 고려 말기에는 더욱 더 심화되어, 공민왕 원년에는 이를 엄히 다스리도록 하는 宥旨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사원에서는 이식을 처함이 일정하지 않고 임의대로 이율을 정하여 고리를 취하였다. 심지어 양민들은 고리를 감당하지 못해 자녀를 팔기도 하였는데 3년이 넘도록 돌려 보내지 않고 노역을 시키는 사원이 많았을 정도로 고리 행위는 심화되었다.510)≪高麗史≫권 79, 志 2, 食貨 2, 借貸 공민왕 원년. 또한 우왕 때에는 遊食하는 승려들이 불사를 빙자하여 권세가의 書狀을 함부로 받아 州郡에 간청하여 양민에게 米 1斗와 布 1尺을 빌려 주고 각각 1石과 8尺으로써 거두니 이를「反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징수하기를 逋債와 같이 하므로 양민들이 이로 인해 굶주림에 떨게 되었다고 한다.511)≪高麗史≫권 135, 列傳 48, 辛禑. 강제로 양민들에게 쌀 1두와 포 1척을 빌려 주고 쌀 1석과 포 8척의 이식을 취하니 10배 내지 8배에 달하는 고리를 감당하기란 참으로 힘들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원은 왕실 및 귀족들의 비호하에 국가에서 정한 법정이율을 무시하고 공공연하게 임의대로 고리의 이율을 적용시켰다. 그 결과 국가재정에 손실을 끼침은 물론이고 양민들의 고혈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으니, 사원의 경제력 증대의 뒷편에서 일어난 사회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식리사업을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원의 기초적 경제행위로서의「보」를 운영하기도 하였다.「보」란 방언으로, 전곡을 시납하여 그 본전을 보존하고 이식을 취해 영원히 이롭게 한다고 하여 일컬어진 이름이다.512)≪高麗史節要≫권 1, 태조 13년 12월. 즉「보」라는 것은 시납한 전곡을 기본자산으로 하여 그 이자를 취해 어떤 특수 목적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보」는 오늘날의 장학기금·문예진흥기금·원호기금 등과 같이 특수한 목적의 명목으로 기금을 형성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이자로서 공익사업을 펼쳐나가는 비영리재단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여러가지 명목의「보」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지만 특히 사원과 연관되어 있었던 보로는 승려들의 佛學을 장려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佛名經寶와 廣學寶,513)≪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원년. 玄化寺의 금종을 주조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했던 金鐘寶514)<高麗國靈鷲山大慈恩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249쪽. 및 반야경의 주조를 위한 般若經寶,515)위와 같음. 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설치했던 忌齋寶516)≪高麗史節要≫권 5, 문종 14년 3월. 등이 있었다.

 이러한 명목의「보」가운데 특히 불명경보와 광학보의 설치를 위해 정종은 무려 7만 석이라는 막대한 양의 곡식을 여러 큰 사원에 시납하여 그 이식으로 승려들의 불학을 장려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보에서 얻어진 이식 수입이 모두 다 승려들의 불학 장려를 위해 쓰여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그 중의 많은 부분이 사원의 일반재산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사원의 승려들은「보」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이를 이용하여 고리대 활동을 자행하였다. 이는 성종 원년(982)에 崔承老가 을린 시무책 28개 조항 가운데에서, 불보의 전곡을 여러 절의 승인이 각각 州郡에 사람을 시켜 관장하여 해마다 長利를 주어 백성을 괴롭게 하니 금지하도록 청한517)≪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원·승려 및 귀족들의 양민에 대한 고리대 행위는 국가의 계속되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고려 초에는「보」를 중심으로 한 이식행위가 이루어졌다. 고리행위를 규제해야 될 귀족들이나 이러한 행위를 계도해야 될 사원까지도 각각 자신의 권력 및 왕실의 총애, 귀족들의 비호를 배경으로 가세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금지령이 실효를 거둘 수 없었음은 당연한 소치라 하겠다. 이러한 형식적인 금지령은 식리사업의 이율을 높이는 결과만을 초래하여 결국 힘 없는 양민들의 생활고만 더욱 가중시켰다.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재정마저 막대한 손실을 끼쳐 경제구조의 폐해와 사회구조의 혼란을 야기시켰으므로 고려의 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불교는 백성들의 비난의 대상으로 변모되어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배불론을 불러 일으켜 불교의 쇠퇴를 재촉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李相瑄>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